Castaways & Cutouts / The Decemberists
밴드의 본격적인 첫 이야기는 "My name is Leslie Anne Levine"이라는 구절로 첫 문장을 맺는다. PJ 하비의 98년 <Is This Desire?> 중 "Angelene"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작품과 <Castaways & Cutouts>는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우선 두 작품 모두 옴니버스 구조 하에 알레고리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리고 악곡의 형식을 빌린 각각의 단편에서 인물의 삶은 대체로 비극으로 다뤄진다. 하비의 것은 각 설정된 타자를 연민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결핍과 고통을 여과 없이 표출하고자 만든 것이었다.
어느 사건으로 인해 트라우마에 시달리거나, 기구한 환경에 놓인 채 욕망이나 미련 따위를 버리지 못하는 각 인물들은 저마다 특정한 이름을 갖고 있다. 마치 그 이름들이 불안과 부정의 일종을 하나씩 대변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들은 당시 개인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던 자신의 정신 상태에 관한 분신이던 셈이었다.
앨범의 핵심적인 형식과 특성을 함축하는 한 마디가 'Angelene'의 "My name is Angelene"이다. 콜린이 이를 차용한 지는 작업 당시를 기점으로 몇 년 채 되지 않았다. 이미 여러 인터뷰에서 포크 외에도 여러 장르음악에 꽤나 박식한 모습을 보인 그이지만, 그럼에도 음악적 성격이 상당히 다른 특정 노래로부터 힌트를 얻은 것은 의외일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의 도입 형식은 비슷할지라도, 전개를 거듭하면서 성질이 다름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하비의 이야기는 비교적 사실적이다. 안타깝지만 지금도 이 세상의 누군가는 분명 인물과 같은 처지에 있을 것이라는 추측마저 너무 뻔하게 느껴질 정도다. 또한 비련의 여인에 대해 다루는 노래의 기타 멜로디가 지극히 우울한 것은 전혀 이상할 게 아니다.
반면에 콜린의 이야기는 사실과 무관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당신이 유령이 실존한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여기는 것이 당연할 테다.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Leslie Anne Levine"은 어머니에게 닥친 불의의 사고로 인해 사산된 여야가 한 맺힌 영이 된 채 자신의 허망한 운명에 대해 한탄하고 있다. 말 그대로 슬픈 동화인 것이다.
그런데 그의 노래는 "Angelene"에 비해 그다지 우울하게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따뜻하고 심지어 약간은 경쾌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어쿠스틱 기타의 소리만 들어보면 오래간만에 풋풋한 고향길에 들러 편안함과 반가움을 노래하는 모습일 것만 같다.
이것이 디셈버리스츠만이 연출할 수 있는 '테일의 형식'이다. 어디까지나 "옛날 옛적에(once upon a time)~"로 시작하는 전래동화나 극(劇)일뿐인 것이다. 가상과 실제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이것이 어쩌면 특정 실화를 바탕으로 하거나,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반영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의도하는 작가주의 뮤지션들과 상반된 모습이다.
오히려 콜린은 이것이 엄연한 허구임을 강조한다. 우화(fable)임을 상기시킨다. 그의 우화는 대개 희비극적 성격이 강하다. 그로부터 자아내는 관조적 아이러니가 "Angelene"과 "Leslie Anne Levine"의 궁극적인 차이를 결정한다.
희비극과 아이러니, 그것이 콜린의 내러티브 방식이다. 이는 본작의 모든 트랙을 관통하는 줄기이며, 비교적 성격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초반부다. 대략 오프너부터 "Odalisque"까지의 구간이 되겠다. 이때 그에게 희극이란 코미디와 같은 우스꽝스러움이 될 수도 있고, 부드러운 낭만극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코어는 항상 비극이다.
전자의 예로는 "July, July!"를 들 수 있겠다.
실수로 자신의 배에 총을 쏜 삼촌이나 익사한 쌍둥이 형제 등 누군가의 심각한 불상사를 잔칫날 합창곡인 것처럼 흥겹게 노래한다.
곡에 대한 substacks에서의 코멘터리에 따르면, 앨범 내에서 다소 튄다고 느낄 만큼 작정하고 경쾌한 팝임에도, 그는 충분히 본인다운 노래가 나왔음에 만족했다. 도살당한 닭의 유령과 사람의 내장, 피 등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는 비극임을 넘어서 잔혹동화에 가깝건만, 그의 묘사가 너무 과장되고 황당해서, 또한 후렴구가 너무 유쾌하고 친근해서 내용을 알고 듣더라도 이미 코미디처럼 느껴진다. 말하자면 아이들에게 차마 들려줄 수 없는 블랙 코미디인 것이다.
"A Cautionary Song"은 한 술 더 떠, 성노예 노릇을 하는 딸아이의 어머니에 대해 노래한다. 그것도 강간범들 시점을 직접 빌려서 말이다. 딸에게 다음 차례가 될 것이라고 조롱하는 구절에서는 불쾌함까지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콜린에게는 그저 '우화'일뿐이다. 아코디언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 스코틀랜드의 아재들이 짓궂은 농담을 콧노래로 흥얼거리는 이미지와 다르지 않다.
낭만극의 경우에는 어떨까. "Here I Was Dreamt An Architect"는 나지막한 아련함을 더한 <존 오브 인터레스트>라 할 만하다. 화자가 한 때 순수하게 꾸던 건축가로서의 꿈을 그리는 모습은 마치 '분분한 낙화'로 화제가 된, 아름다운 문학청년로서의 마음을 간직하시던 낭만어부가 생각난다. 항해와 관련된 디셈버리스츠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가 서 있는 곳은 아쉬움이 아닌 절망이다. 바닷바람과 석양빛 대신 피바람과 비명 소리가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다. 그러나 화자로 분한 콜린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감미롭고 차분하며, 기타 멜로디와 오르간의 하모니가 너무나도 잔잔하고 측은해서, 비르케나우가 그저 평화로운 시골 바닷가 동네 중 하나일 뿐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이 역시도 비극을 담고 있지만 보기에는 희극인 방식이다. 그의 이야기는 일상이나 삶의 애환, 모성이나 사랑, 희망 등이 아니라 이것들을 둘러싼 폭력과 부조리의 현실이 본질이다. 앨범 커버에 대입하면, '문학동네' 출판사의 책 표지로도 손색없는 돛단배 그림보다 그 옆에 섬뜩하거나 처량한 유령들의 실루엣이 중심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재차 강조하듯 이는 어디까지나 우화일 뿐이다. 실제 매춘부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발화 역시 발화자 본인이나 주변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한 고발이나 고백이 아닌, 이야기꾼으로서의 구전에 불과하다. 그의 관조적 태도는 이에 근간한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것은 단순한 감정 이입 이상으로 더욱 불편하고 무거운 어느 것이다. 아이러니는 이에 근간한다. 그리고 이러한 아이러니로부터 역사나 현 사회에 대한 모종의 의문과 반성으로 이어지는 알레고리일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단지 우화일 뿐임을 꾸준히 강조함에도 역사와 연관 지어 논하게 되는 이유는, 역사적 배경이나 역사에 대한 함의가 작용하는 곡이 일부 실제로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미 우리는 "Here I Was Dreamt An Architect"라는 사례를 접했다.
특히 홀로코스트가 주요 소재로 쓰인다. 제목으로 쓰인 "Odalisque"이란 낱말은 오스만 제국의 첩을 뜻한다. 화자의 처지를 지칭하는 말인데, 그녀는 이름하여, '시대에 의한 첩'이 된 셈이다. 심지어 And what we do with ten dirty Jews라는 구절이 직접적으로 나오는 순간, 사실상 은유로서의 기능으로 정의 돼오던 알레고리의 틀마저 벗어난다.
이로부터의 대주제는 당연히 전후의 부조리와 공포에 결부된다. 더 구체적으로는 존엄을 해치고, 터전을 망가뜨리고, 인권을 유린하고, 자유를 빼앗고, 목숨을 위협하는 등에 관한 공포다. 콜린은 또 다른 사건과 파장을 배경으로 삼아 주제 의식을 지킨다. "Cocoon"에서는 훨씬 시대를 거슬러, 서기 79년의 폼페이 화산 폭발 이후의 비극을 다루기도 한다. 그리고 이를 다시 근대 이후 전쟁의 역사와 연결한다.
그의 테마와 서술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초기 작품들─<크로노스>, <판의 미로> 등─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우화를 빌려 스페인 내전에 대해 이야기하고, 내전에 관한 이차적 이야기를 품고, 최종적으로 부조리와 공포라는 관념을 전달하는 그였지 않은가. 혹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와도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유머와 그 뒤에 숨긴 잔혹한 냉소(혹은 연민)에 관해서는 이 둘의 중간선상에 있다고나 할까.
“occupation songs,” as I’ve called them, usually are pieces of fiction — in that I feel like I’m writing about a character outside of myself
특이한 점은 콜린이 자신의 내러티브 방식과 관련된 곡들을 occupation songs(직업 노래; 번역가가 아닌 나로서 정확히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이를 업(業)으로 이해한 게 맞다면, 어떤 의미에서 업이라고 여기는 지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픽션과 자신과 구분되는 캐릭터(설정에 의한 제3의 인물), 그는 확실히 자신의 방식을 누구보다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달리 말해 그의 방식은 지극히 의식적인 것이다. 혹은 전공생 시절부터 이어져 온 일종의 직업병, 즉 오히려 지극히 습관적이며 본능적인 방식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만.
만약 전자라면 그 스스로도 자신을 이야기꾼으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명백한 자기 인식은 방법론으로부터 특성으로서의 몇 가지를 도출하는 것을 넘어, 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태도를 보게 한다. 그는 스토리텔링을 '담당'하고 있으며 '수행'함으로써 이 일을 지속하는 Writer라는 것이다.
이때 그의 태도는 포크계의 싱어송라이터들과 구분된다. 그 구분점은 'myself'에 있다. 가령 스티븐 수프얀이나 아드리안느 렌커처럼 다양한 테마나 에피소드를 사적인 언어로 겉에서 꾸미거나, 취약한 자기 고백을 내재시키는 경우와 대비된다. 이들 역시 자신들의 업무이자 본분으로 여기는 것처럼 스토리텔링을 '수행'하는 예술가들이다. 그들의 이야기 역시 얼마든지 외부이자 사회로 확장될 수 있고, 종종 그것을 의도한다.
반면에 그에게 인물이란, 그리고 이야기란 철저히 나의 바깥('outside' of myself)으로부터 이루어진다. 즉, 연관성을 최대한 배제한다. 그는 관조적인 시각을 고수하는 관찰자 내지는 전지적 작가일 뿐이다. 이는 이야기 속 주인공 및 화자가 반드시 작가 본인이어야만 하고, 본인을 둘러싼 현실이 배경이어야만 하는 일반적인 '포크적 글쓰기'에 싫증을 느낀 탓일까.
그러나 그에게도 사적인 요소가 일절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를 처음부터 의도하는 것이 아닌 가사를 쓰고 나서 나중에 보니 자신도 이를 뒤늦게 발견하는 식인 듯하다.
하물며 소재 및 콘셉트를 정하거나 영감을 얻는 데는 대부분 그가 살고 있는 포틀랜드를 배회하여도 본 것들이거나, 여행으로 갔던 곳, 혹은 그의 취향이 가득 반영된 여러 소설책이나 시문들이 즐비해 있다. 이를테면 당시 그의 거처였던 NE Halsey St. 근처에서 본 닭을 도축하는 장면을 "Here I Was Dreamt An Architect"의 구절 일부의 모티브로 삼거나, 대문호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등장하는 노랫말을 후렴구로 인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앨범 내에 제시된 몇 가지 사례를 비롯하여 그들의 음악에 '인용'이 주는 의미에 대해 약간이나마 구체적으로 파고들어 가 볼까 한다.
Leslie Anne Levine의 이름 선언이 피제이 하비의 아이디어를 차용한 것이 아니고서, Jerzy Kosinski의 <페인트로 얼룩진 새>나 Elem Klimov의 <컴 앤 씨> 등 홀로코스트에 대한 여러 책과 영화를 접하지 않고서, 음악에서 문법을 사용하는 방식에 밥 딜런의 노래 "Lady, Lady, Lady"를 참고하지 않고서, 오로지 그 스스로 이 모든 이야기들을 창작한 것이라면 어땠을까.
<In the Aeroplane Over the Sea> 속 제프 망굼의 소녀와 시대를 향한 이야기에 <안네의 일기>가 모티브가 되지 않았다고 가정하는 일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다. 근대 독일이란 배경만 참고하고, 그녀가 정작 실존한 적 없이, 철저히 망굼의 창작으로만 탄생한 캐릭터라는 셈이다.
물론 그럴 경우 그들의 작가적 창의성은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월등히 뛰어난 것이 돼있을 것이다. 시대를 향한 통찰력은 말할 필요도 없을 테고. 진작에 그들은 소설 출간을 업으로 삼고 노벨 문학상에 등재될 위인이 돼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개인의 창작적 재능으로만 여길 뿐, 음악 및 예술문화에서 문학이 지니는 가치와 상관관계를 도출하는 데 있어 마땅한 아이디어를 제공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의심이 든다. 이전 것의 특정 내러티브나 어느 텍스트를 재해석하고 차용하는 일련의 흐름으로부터, "문학성을 계승한다"라는 개념이 지니는 의미는 꽤나 중요하다.
포크로어라고 하는 것, 혹은 전승이라고 하는 행위가 나름대로 숭고함을 지닐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한다. 이때의 포크로어란 단지 텍스트만, 혹은 대략적인 줄거리 및 맥락 등이 이어지는 것에 한하지 않는다. 내리티브의 총체적인 측면은 물론 시대상, 작가적 태도, 현실이나 관념을 예술로 옮기는 데 있어서의 관점 등 모든 것에 대해서 후대들이 계보와 역사와 문화를 만든다.
그리고 제프 망굼이나 콜린 멜로이 등 이야기꾼과 음악가로서의 재능을 동시에 지는 이들이 이를 이해하고 리릭시즘에 적용하면서, 대중음악을 비롯해 문학 외의 현대 문화 전반의 영역으로 확장 및 통합한다. 스토리텔링의 세계가 더욱 무한해진다.
한편, <Castaways & Cutouts>의 사운드는 (1)에서 다뤘던 전작 <Five Songs> EP에 근접한다. 반대로 한참 후의 <Picaresque>와는 대조된다. 후자만큼의 화려하고 웅장한 챔버 팝을 구현하는 것이 환경상 불가능했던 탓도 있지만, 나는 본작이 포크식 접근을 꾀한 것에 대해, 문학에 관한 레퍼런스를 적극적으로 차용한 것과 동일한 맥락으로서, 드라마틱한 연출보다 스토리텔링 그 자체의 미학에 도전하고자 했다고 볼 것이다.
따라서, 유랑하는 이야기꾼으로서 디셈버리스츠의 모습은 오히려 본작이 훨씬 충실하게 반영돼 있다. 그들에게 고작 며칠 동안 묵을 숙소는 주어질지 몰라도, 스타디움 규모 이상의 세트장이 빌려 그곳에 눌러앉기에는 마땅지 않다. 초창기 그들은 거창한 뮤지컬을 기획하는 것이 아닌, 그저 지나가던 길에 심심풀이 삼아 잠시 들러 소소한 만담을 듣고픈 관객에게 좋을 막간의 재미를 나눠주려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약간의 익살스러움("July, July!", "A Cautionary Song")이나 서글픔("Cocoon", Clementine") 정도는 허용하지만 대체로 담담하다. 과장된 연기를 일삼는 배우보다는 지극히 이야기꾼으로서 업의 본분에만 충실하다. 달리 말해 제스처보다 입과 가락을 통한 포크로어로서의 구전에 충실한 것이다.
시리즈의 본론 중 절반을 내러티브, 즉 문자와 입을 통한 이야기의 전달에 대해 이해하는 데 할애했다면, 이제부터는 나머지 절반은 전달에 있어서 가락이 지니는 힘, 그리고 그 가락을 통한 힘이 구체적으로 포크 뮤직이어야 하는 당위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