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기혱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기혜 Aug 19. 2022

미식의 문장

미각 여행기

 해외여행에서 목적지를 정할 때만큼, 비행기를 타러 갈 때만큼 설레는 순간이 있다. 바로 여행지 식당에 앉아 메뉴판을 읽을 때다. 먼저 다녀간 이의 손길에 모퉁이가 닳은 메뉴판을 읽기 시작하면 궁금증은 에피타이저가 된다. 뇌와 혓바닥이 촉촉이 젖다. 식재료와 관련된 어휘는 토익에도 토플에도 안 나온다. 지루함이 가리키는 관심을 따라 엄지손가락이 알고리즘의 바다를 헤엄치는 동안 하나씩 낚아 올리는 것이다.

Dijon mustard

Cayenne pepper

Kosher salt

아, 영어에다 또 다른 문명이 더해진 이 느낌! 디죵, 디죵 소리를 나만큼이나 힘주어 발음하고 있을 미국인을 그려본다. 서유럽의 요리사가 카이엔 바다의 후끈한 매운맛을 더하는 퓨전 음식을 상상한다. 코셔를 알맞게 읽으려고 애쓸수록 유대인 전통 복장을 한 턱수염 할아버지가 하얀 소금을 장엄하게 뿌려대는 장면이 떠오른다.

Until thickened

Bring to a simmer

책상에 앉아 thick을 외우던 시절에는 고작 책이 두껍거나, 몸이 두꺼운 상상을 했다. 그런데 ‘되직해질 때까지’, ‘되직해지도록’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의 단어일 줄이야. ‘ㄸ-씨ㅋ은’을 소리 내는 동안 되직해지는 것은 뭉근한 소스이어라. ‘씨-머’. 서서히 그러나 역동하며 오르는 김을 연상하는 데에 우리말보다 더 알맞은 소리다. 게다가 동사는 ‘bring’이라니. ‘김이 오르도록 시간을 끌고 오라.’는 주문으로 들린다. 미묘하고도 활기찬 변곡점을 향한 요리의 기다림을 이보다 더 주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시다.

about 2 tablespoons

다채로운 음식 말에 주눅이 드는 중에 ‘about’이 적절히 등장한다. 한소끔, 간간하게, 무르도록, 자박자박, 푹. 우리말 앞에 무력해지는 요리 초보는 태평양을 넘어 대서양을 건너 ‘about’에 멈칫할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는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겠지.

 

 사람 사는 데는  똑같으니까, 용감하게 타지의 메뉴판을 읽어 나간다. 그간 축적한 식재료 어휘가 문장으로 이어지면, 읽는 동안 기대는  커진다. ‘  단어   아는 거야!’ 감격도 하면서. 그런데 두어 줄의 문장을 읽고 심혈을 기울여 주문한 음식이 접시에는 마침표 하나처럼 달랑(혹은 덜렁) 놓일 때가 있다. ‘천연 바닐라와 메이플 , 부숴진 피스타치오 토핑의 디저트 주문했는데 “그냥 아이스크림이네?”싶은 음식이 나오고, ‘민트에 절인 pork sirloin 오븐에 구운 , 겨자와 구운 채소를 곁들인 메인 디쉬 시켰는데 “그냥 고기잖아.” 싶은 음식을 맞는다. 벨기에에서 돼지 목살을 앞니로 뜯고, 스웨덴에서 추어탕에 빵을 찍어 먹고, 크루즈 조식 뷔페에서 어묵을 나이프로 썰어 먹다 보면 그냥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요즘에는 우리나라에도 메뉴를 그렇게 써 둔 곳이 많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내 집에서 1km 떨어진 태국 음식점에서 똠얌꿍을 먹으려면 ‘태국 허브인 레몬그라스, 갈랑가, 라임을 넣어 매운맛, 단맛, 신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태국전통 스프이자 세계 3대 스프’를 읽은 후, 퓨전 스타일과 타이 스타일 중에 택하는 객관식 문제를 통과해야 한다. 3.7km 떨어진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는 ‘부드러운 매쉬드 포테이토, 각종 허브와 향신료가 들어간 아르헨티나식 소스를 올린 채끝 스테이크’를 읽고 나서 주문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식 소스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면 메뉴판 아래에 주석이 달릴 수 있으므로 호기심은 접어두는 쪽이 고픈 배에 유리하다.    

 

 시절이 이러하니, 길을 걷다 ‘할머니 왕만두’ 또는 ‘어머니 김밥’ 간판을 보고 가게에 들어갔다가 메뉴판에도 다짜고짜 ‘왕만두 3000원’, ‘어머니 김밥 2500원’이 적힌 것을 보면 여행의 호기심이 격렬히 인다.

“할머니, 대체 왕만두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지요?”

“어머니 김밥에는 뭘 넣으실 생각이세요?”

묻고 싶어진다. 대개 이런 집은 간판부터 메뉴판까지 거두절미한 주인의 성격답게 손님이 들어와도 어서 오시라 목청만 높일 뿐, 곁눈질 한 번 받지 못한다. 그러니 마음에 떠오른 문장을 쉬 내뱉지 못한다. 언어가 달라 말을 못 하는 외국인처럼. 말을 못 하고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노라면, “당신은 어머니이십니까?” 같은 것이 묻고 싶어지기도 한다.     


 나의 식탁을 차린다. 심심하니 내 밥상으로 여행을 해볼까. ‘21년 산 이천 쌀, 유기농 현미를 흐르는 물에 네 번 씻어 전용 쿠커로 익힌 후, 3일간 냉장 숙성한 밥’을 꺼낸다. ‘소고기 브로스에 전통방식의 조선 된장을 풀어 로컬 두부와 애호박을 넣고 끓인 후, 팽이버섯을 더한 홈스타일 된장찌개’를 옆에 둔다. 오늘의 사이드 디쉬는 ‘손으로 두드려 향을 살린 오이에 크러쉬드한 마늘과 발효 식초, 서해에서 적절하게 생산된 소금 한꼬집으로 맛을 낸 오이 탕탕이’이다. ‘오이 탕탕이’에는 참깨가 들어있으니 알러지가 있는 사람은 주의해야 한다. 낯설고 설레는 한 상 앞에 앉으니, 유학 온 아르바이트생처럼 보이는 앳된 웨이터가 다가와 말을 건다.

“저희 가게 처음이세요? 신발을 신고 드시면 더욱 외식하는 기분을 느끼실 수 있으세요. 보나뻬티, 마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