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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기혜 Oct 12. 2022

'올드 걸'의 여행

며느리라서

  그녀와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처음이기도 했다. 며느리 김기혜는 두 아이, 시어머니 김경옥과 통영으로 2박 3일 여행을 갔다. 김기혜는 며느리이자 드라이버이자 그녀의 손주들을 돌보는 역할이었지만, 김경옥은 삶터와 의무를 벗어났다. 그러니 내 아이들처럼 김경옥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가족 시중을 드는 노동의 옷을 입어 엄마가 되는 사람이었다. 뭘 드시고 싶냐 물으면 아무래도 상관이 없고 애들 먹고 싶은 걸 먹겠다 했다. 가고 싶은 데가 있으시냐 물어도 애들 가는 데만 따라가겠다 했다. 내 마음처럼 당신의 마음이 궁금한데도 “응.”, “그래.” 그 뿐이었다.      


  의견은 존재의 부록이다. 타인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그녀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고 그저 따라만 다니’겠다고 결심한 대상을 쫓을 때만 의견이 활발해졌다. 길에 파는 물건을 조르는 아이들을 나무라면 그녀는 “좀 사주지 그렇냐.” 의견을 냈다. 해변에서 파라솔 대여료를 내면 그녀는 “짐을 내가 지키면 되는데 헛돈 썼다.” 의견을 냈다. 횟집에서 저녁을 먹으면 “쌀이랑 냄비만 챙겨 왔어도 싸게 먹을 수 있었다.” 의견을 냈다. 종국엔 “며느리 너는 왜 이렇게 사냐.”고 경계를 넘었다. 화가 났다. 남의 삶에 넘어와 주체를 조종하는 것, 며느리에게는 그래도 된다 여기는 것에. ‘내가 지금 쓰는 돈은 어머니와 내 아이가 함께 여행하는 데 필요한 비용이다, 어머니가 밥해주고 빨래해주지 않아도 나는 잘 살아왔다, 어머니 여행을 위해서 원하는 걸 말씀하시라, 나는 내 역할을 할 거다, 필요 없는 도움을 주며 제 시비를 결정하지 마시라.’는 말을 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의자에 걸터앉아 눈을 끔뻑끔뻑하시더니 느릿하게 입을 떼셨다.

“서로 얘기를 했으니 맞춰보자.”     


 둘째 날, 질문은 다시 이어졌다. “TV에서 봤는데요, 거기엔 꼭 가보고 싶어요. 어머니는요? 통영에서 하고 싶은 것 있으세요?” 어머니는 기억을 더듬다가 통영 출신이셨던 여고 교장 선생님, 통영 갔던 지인이 알려준 꿀빵집 가물가물한 이름, 동창들과 장난삼아 남긴 기념사진, 친정 언니 오빠랑 바닷가에 민박을 잡고 놀던 때를 들려주셨다. 나는 어머니 이야기에서 검색어를 추려 계획으로 삼기 바빴다.     


 추억에 젖은 어머니는 해안산책로 옆 백사장을 보고 차를 세워 놀다 가자 했다. 더위에 그늘 한 점 없고 생수를 파는 가게조차 없었다. 관광지가 되지 못한 바닷가는 쓰레기와 패각 투성이였다. 혈전 용해제를 드시는 어머니와 살갗이 여린 두 아이에게 위험한 장소였다. 어머니는 석굴이 뒤덮인 바위에 두어 번 기우뚱하시고는 물놀이를 포기하고 차에 올랐다. 쓸쓸하고 무안해 보였다.

“옛날엔 이래 가다 놀고 그랬는데.”

“언제였어요?”

“30년 전?”

그녀의 추억을 경청해도, 30년 전 통영을 내가 가늠할 길이 없다.      


 통영 곳곳에 문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어머니는 박경리 소설을 사보던 순간을 들려주었다. ‘김약국의 딸들’에 나온 해저터널에 가보시겠냐 물었다. 좋다 하셨다. 아홉 시 가까운 시간이라 두 아이는 지쳐있었지만, 할머니한테 중요한 장소가 있으니 조금만 힘을 내자며 둘째를 업고 어르며 해저터널에 도착했다. “어머니, 여기요! 김약국 부인이 미륵도 가면서 지옥이 이런 델까 하던 그 길요!” 어머니 반응은 어리둥절하다. 어디로 데려왔냐는 표정이다. 눈길은 터널에 가질 않고, 짐보따리와 손주를 지고 기우뚱거리는 내 어깨에만 머문다. 여기가 어디든 그녀는 이미 흐뭇하다.

“난 기억이 안 난다.”

“언제 읽으셨는데요?”

“50년 전?”

어머니는 바람이 아닌 과거를 말한 걸까. 눈앞의 그녀가 가고 싶은 곳을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마지막 날, 한 번이라도 그녀의 여행을 성공할까 싶어 통영 시내를 통과하던 차였다. 성수기 교통체증과 폭염에 짓눌려 강구안 앞 도로에 두 시간을 갇혀버렸다. 뒷자리 아이들은 들이키던 냉수까지 토해내는데 어머니는 차를 세우자고도, 집으로 가자고도 하지 않았다. 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나 어디론가 가고 싶다는 마음을 내어놓고. 벌거벗은 갓난아기처럼. 그녀가 행복할 어디론가 데려가 주어야 했다.

“저기 샌드위치 가게인데 패스트푸드점이라 2층에 가면 쉴 수 있을 거예요. 햇볕이 줄고 길도 풀리면 그때 어머니 가고 싶은 곳으로 움직여 봐요.”

관광객들은 모두 해물 요리를 먹으러 갔는지 가게가 한산했다. 여행 마지막 날 고작 샌드위치와 감자칩을 드시게 하니 안타까웠다.

“어머니, 입에 안 맞으시면 다른 메뉴로 시켜볼까요?”

“괜찮다.”

어머니는 천천히 샌드위치를 베어 물고, 고요히 감자칩 하나를 집고, 사이다를 빨았다.

“나, 이거 더 받아줄래?”

“사이다요?”

“응, 속이 시원하고 아주 입에 맞는다.”

“다른 음식 안 드셔도 괜찮겠어요?”

“이런 거 TV에 나올 때 꼭 먹고 싶었다. 혼자 시켰다가 남은 거 먹기는 싫고. 애들 먹을 때 먹어 보고 싶은데 애들 없으면 먹을 일이 없다.”     


부인, 엄마, 할머니, 시어머니의 이름표는 욕망을 실어 나르는 그녀의 혈관을 틀어막았나. 매일 삼키는 혈전용해제는 원하는 것을 떠올리는 법을 잊게 만드나. “어디 가고 싶으세요?”, “무얼 하고 싶으세요?”, “드시고 싶은 음식은 어떤 거예요?”에 어머니는 도통 답을 해내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처럼 다가온 욕망의 장소에서 눈앞의 것을 말하는 방법을 기억한 걸까. 50년을 거슬러 ‘올드걸’이 찾아낸 말은 어린아이의 문장이다.

“나 여기 좋다. 우리 여기 더 있자.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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