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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기혜 Dec 09. 2022

소설로 길어 살았다

나는 소설을 붙들고 산다. 노상 붙들고 사는 것은 아니고, 마음으로 놓지 않고 산다는 말이다. 소설은 남이 사는 얘기인데 대개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 삶을 사는 남이 나온다. 그래서 종종 쓸데없이 여겨지기도 한다는 것을, 동네 독서모임에서 책 추천 차례가 왔을 때 소설을 내밀려면 살짝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느끼고서 깨달았다. 때마침 어느 장관이 “소설을 쓰시네.”라고 해서, 그 말이 내 얼굴에 엎어진 것 같았다. 세상에는 소설을 억지로 지어낸 쓸모없는 이야기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고 뉴스가 공식 발표를 해 버린 것 처럼. 소설을 좋아한다고 했다가 누군가 ‘그걸 왜?’라고 물을 걸 대비해서 어린 장금이를 떠올린다. 그저 소설만이 의미가 있어서 소설이 좋다고 말한 것인데 그렇게 물으시면, 글로 쓸게요.


시작은 엄마의 영향이었겠다. 엄마는 소설을 좋아해서 우리집 책꽂이는 소설과 동화로만 찼다. 네 살에 한글을 깨우쳤다는 언니와 달리, 나는 늦도록 글을 몰라서 테이프 동화 하나만 즐길 수 있었다. 낮잠을 자다가 세상의 색을 몽땅 잃어버린 천사들이 하느님에게 혼이 날까 봐 걱정하며 페인트통을 우당탕 쏟아부어 세상을 알록달록 되돌려 놓는 이야기였다. 나는 동네 언니 오빠들이 스쿨버스를 타고 떠나면, 혼자 아파트를 돌며 벌 꽁무니가 알사탕만하게 보이도록 다가가고, 풀 줄기를 하얀 속실로 갈래갈래 나누어 뿌리고, 하늘을 바탕삼아 발로 뿌연 흙먼지를 일으켜 지켜봤다. 눈으로만 세상을 즐길 수 있는 아이에게 빛깔이 사라졌다 돌아오는 이야기라니 신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야단을 맞을까 허둥대면서도 뭐라도 해보려고 애쓰는 천사들은, 언니보다 글자를 몰라서, 덤벙대서, 느려서, 구몬 수학을 많이 틀려서 한숨을 듣던 나에겐 온몸을 흔들어 응원하고 싶은 주인공들이었다. 어른이 돌보지 않는 아이의 마음은 이야기에 실려 매번 길어 올려졌다.


삼보를 쫓던 호랑이가 녹아 버터가 되는 마술 같은 이야기, 크로와상 그게 무슨 맛인지 꼭 먹고 싶어서 아주 부러운 꼬마 니콜라 이야기, 마음은 슬픈데도 벅차오를 수 있다는 걸 알려 준 제제와 라임오렌지 나무 이야기, 나도 이런 모험 해낼 수 있을 것 같던 비밀의 화원 메리 이야기, 6학년의 고민을 다 부질없게 만든 몽실언니 이야기. 세상엔 왜 이렇게 이야기가 많은가. 매일 집에 함께 오던 친구가 내일부터 너랑 못 논다고 했어도, 소중한 친구를 기분 나쁘게 만들고 돌아와서 나는 왜 이 모양인가 싶어도 이야기는 존재하고 별일이 다 있는 것이다. 언제나 있고 별일이 다 있는 것. 외롭고 서투른 사람에게 이보다 딱 맞는 위로가 있을까.


책은 다 소설인 줄만 알고 대학에 갔다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처음 보고 세상에는 못 읽는 책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10대 중반 추리소설에 빠진 나를 엄마가 세계문학전집으로 이끄는 와중에 펄벅의 「대지」에서 체해버린 이후였다. 엄마가 강권하던 고전과 박경리, 친구들이 열광하는 하루키와 은희경, 과목마다 닥쳐오는 참고도서들을 꾸역구역 읽어 갔지만 무얼 읽어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초라함만 커갔다.


책에서 빛줄기가 솟아나 마음에 다시 꽂힌 것은 미국에서였다. 위도가 만주벌판이라는 뉴저지 겨울에, 친구가 보내준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를 읽고 있었다. 내 마음을 얼음으로 만들어야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남편, 내가 지켜야 하는 아기, 날 결혼에다 갖다버린 것 같은 친정엄마가 수시로 겹쳐 들며 남 탓이 내 탓이 되어버린 때였다. 도끼처럼 날아든 구절은 작가 엄마가 했을 법한 ‘대파는 가랑이를 잘 씻어야 한다’는 잔소리였다. 자식이 집을 떠나 새 삶을 시작하는 장면이었다. 내 엄마가 ‘엄마는 씩씩해야 한다.’고 전화를 끊을 때 섭섭하던 마음도 대파 가랑이 흙처럼 씻겨 나갔다. 다른 엄마와 딸 사이에 오가는 말도 고작 이 정도라면, 책을 보내주는 친구, 같이 사는 남편, 전화하는 엄마, 옹알거리는 아이가 있는 나는, 작가가 데려온 책 속의 ‘나’와 친구가 되어 깔깔거릴 수 있을 것이다.


펄 벅을 다시 읽고, 박경리를 다시 읽고, 물이 차는 우물처럼 꿀꺽꿀꺽 삼켰다. 펄 벅의 에세이와 소설을 보며 이 언니가 SNS와 페미니즘을 비켜 간 시대에 인정받은 것을 안도했다. 여자이면서 엄마이면서 개인이었던 펄 벅 언니를 내 마음에 저장했다. 「김약국의 딸들」을 읽고 통영에 두 번을 갔다. 김춘수가 꽃 이름을 불러주고, 백석이 짝사랑을 그리고, 유치환이 깃발의 아우성마저 들어주던 통영에서 박경리는 다 알고 있으나 아무도 모르는 그 때의 「82년생 김지영」 을 보여준다. 바닷물이 차오르는 해저터널을 지나며 지옥이 이런 곳일까 생각하는 김약국 부인, 미륵도의 과부와 굶주린 아이, 바다 밑에 가라앉은 용옥이는, 어느 남자 문인이 ‘동양의 나폴리’라 찬미하는 통영에 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내 이름은 루시 바턴」과 「무엇이든 가능하다」를 읽고 나니, 내 인생의 초라함이 타인과 연결지어주는 출발점이라는 믿음이 자라난다. 아이를 수술대에 눕히고, 학교 일로 잠 못 드는 아이를 달래서 재우고, 먹여서 다시 등굣길에 손 흔들어 보내고, 두 어머니를 잃고 나자, 레이먼드 카버의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 노랫말처럼 읽힌다. 나도 앤과 빵집 주인 옆에서 갓 구운 롤빵을 먹는 마음이 되었다.  


다시 차오른 마음은 책을 읽을 때마다 조금씩 길어 올려졌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아니었으면 5·18 학생들의 영혼을 내 가족들처럼 떠올릴 수 있었을까. 마흔이 되어 다시 만난 「제인에어」에게는 ‘갇혀만 살다가 처음 만난 남자인데. 그 사람에게 멈추지 말고 네 길을 좀 더 가보지 않을래?’ 하며 집으로 초대해 차라도 따라주고 싶다.  「오만과 편견」을 읽던 20대엔 소설 속에 나쁜놈 한심한놈 찍기 바빴는데, 「올리브 키터리지」를 읽는 40대엔 같이 있어도 외로운 인물들 하나하나가 모두 가엽다. 소설은 나를 남의 인생 깊은 어둠 속으로 데려가 그와 나를 연민으로 묶는다. 차오른 연민은 소설 하나에 한 두레박만큼 길어 올려져서 내가 더욱 조심한 사람이 되어 현실로 돌아오게 해준다.


사는 동안 누군가는 제 인생의 고통과 기쁨을 잔뜩 짊어지고 내게 올 것이다. 그 어두움과 눈부신 기쁨을 고스란히 비추어 줄 수 있는 경험이 내 삶에 없다 해도 때마침 읽어놓은 소설이 있다면, 그 사람 옆에 조용히 머물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순간이 있다면, 나무 한 그루 보다, 새 한 마리보다 사람이라서 의미 있는 인생이었다 믿어볼 수 있지 않을까. 소설로 길어 올린 마음으로 사람처럼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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