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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만 May 01. 2024

벙거지를 쓴 남자크로키 1 -8

1 데생 1 -8

냉장고를 열어보니, 마땅히 대접할 것이 없더군요. 커피는 교회 행사 때 이미 두어 잔씩 마셨고, 뭘 꺼내놓지. 뒤지다 보니 포도가 있었습니다. 제철 과일은 아니라서 상당히 비쌌을 겁니다. 없어진 것을 확인하면 어머니가 생난리를 피웠겠죠. 포도를 얼른 물에 씻어 내놓았습니다. 

 소파에 앉은 소치나 성국은 상당히 어색하고 얼떨떨한 표정이었습니다. 분위기가 어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제가 그때 매너가 있었더라면 무릎담요나 옷 같은 것을 내놓았을 텐데 말입니다. 미처 생각이 짧았습니다. 거실에 소파가 있어 거기에 앉게 되면 괜찮겠지. -소파에 앉은 소치는 희게 드러난 다리를 상당히 신경을 쓰는 것 같았어요. 청치마를 자꾸 당기고 매무새를 고쳐 앉았습니다. 포도는 포도대로 먹어야 하고 액즙은 손에 묻어나고 포도 씨나 껍질을 탁자에 올려놔야 하고. 그 모습이 한층 더 예뻐 보였습니다. 소치가 다리를 의식한 시선을 저에게 보내는 것 같았어요. 시선을 회피하려 해도 그쪽으로 여러 번 쏠리더군요. 손이 끈적거려 불편했나 봅니다. 결국 본인이 화장실을 찾아 화장지를 길게 뜯어 와 무릎에 올리더군요. 그것도 모자랐는지 어머니 화장대에서 갑 티슈까지 몇 장 뜯어 와 무릎을 가리더군요. 그제야 소치는 안도한 표정이었습니다. 

 대화의 화두는 자연스레 학교로 넘어갔습니다. 아직 일 학년이니 시간이 여유롭지 않나. 대학 가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지.

 줄곧 학교 이야기만 했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서로 느꼈었는지 집으로 돌아가기 바빴습니다. 소치를 교회 부근 집 근처까지만 바래다주려 했으나 그것도 부담이었나 봐요. 손사래를 치며 그냥 간다는 겁니다. 저는 집 베란다에 남아 소치가 상대원 언덕 구릉지대를 올라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성국이는 성국대로 소치와는 정 반대로 단대동 쪽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처음으로 교회가 아닌 외 다른 곳에서 본 소치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소치를 멀찍이서 지켜볼 따름이었죠. 토요일 고등부 예배나 주일날 예배도 가끔 눈길만 오고 갈 뿐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소치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으나 어찌할 방법을 몰랐습니다. 

 교회 다닐 적 성국이와 붙어 다녔던 것처럼 소치 곁에는 항상 이련이 붙어 다녔어요. 수작을 부렸습니다. 

 편지를 썼어요. 소치한테 써야 하는데 이련한테 썼죠. 그리고 그 편지를 소치한테 주면서 전해주라 했죠. 별 내용 없었던 것 같아요. 마음은 소치한테 있는데 고백 형식으로 이련한테 한 것 같아요. 조금 쑥스럽기는 하네요. 단발머리에다 안경을 낀 이련이 다소곳하다. 말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너의 안경 벗은 모습을 한번 보고 싶다. 그렇게 쓴 것이 기억나네요. 

 뻔한 레퍼토리가 펼쳐졌습니다. 이련도 내 편지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바로 노트를 끼워놓고 정리할 수 있는 비싼 책 꺼풀을 사서 건네주더군요. 단남초등학교에서 말입니다. 처음에는 무턱대고 그걸 받아들였지만 그 주 토요일 예배가 끝나고 다시 이련을 불러냈죠. 아무도 없는 어두컴컴한 단남초등학교 운동장 스탠드에서 건네줄 때 괜한 짜증을 부렸습니다. 내가 이런 걸 받기 위해 너한테 편지를 쓴 건 아니다. 곧바로 이련도 화가 난 것 같았습니다. 그럼 버려. 버리면 될 것 아냐. 이련이 자신이 줬던 책꺼플을 들고 돌아가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자니 저 자신이 너무 답답했습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두 사람 모두에게. 부질없는 짓을 저질렀구나. 감정표현을 한 사람에게 해야 했는데. -왜 이련에게 편지를 써서 갈팡질팡했는지.

그 뒤로 저는 교회를 가지 않았어요. 학교에서 미술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였고 입시 중압감이 대단히 무겁게 눌러오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더 교회가 멀어졌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래도 이련 씨한테 언중 씨가 솔직히 말했으면 좋을 걸 그랬어요. 편지를 네게 썼던 건 실수다. 미안하다. 하면 됐었을걸. 말하지 못한 거는 아쉽네요. 그래서 소치 씨하고는 더 이상 진전은 없었던 거예요?”

“고등학생 때 잠깐 오갔던 썸(some)이라 해두면 딱 적당하겠네요. 두 사람 모두에게 왔다 갔다 한 것도 아니고. 그 뒤로 2학년이 되고 교회도 뜸하게 얼굴만 비치는 정도일 뿐이었어요.” 

“뭔가 굉장한 이야기가 뒤에 또 숨어있을 줄 알았는데. 첨 만남은 디테일하다, 뒷이야기는 흐지부지하네요. 그래도 재밌게 잘 들었어요.” 

내게 비밀을 캐려는데 자신이 얻어가야 할 이야깃거리를 놓친 아쉬운 표정이었다. 

 줄곧 경화에게 소치와 이련을 말하는데 벌써 두 시간이 훌쩍 흐른 뒤였다. 

 “인사동 한 번 가보지 않을래요?” 

 “인사동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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