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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만 May 04. 2024

벙거지를 쓴 남자 크로키 1 -10

1 데생  1 -10

이거는 누구에게 도움이 되거나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한데 이미 범준 편지를 고등학교 때 경화한테 갖다 준 뒤부터 서서히 나는 제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그에게 경화한테 질주하라는 걸 일러주었다. 내가 한 번 만나볼게. 막상 그녀를 만나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범준이 마음이 애절하니 받아주라고요.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바람은 그랬지만 실지로 내가 움직였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뉘앙스도 내비치지 않았다. 경화 얼굴 보고 난 뒤 무작정 그의 편지만을 전해주었다. 그게 다였다. 

 경화가 자꾸 범준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어 해서 마음이 기울었나 했더니만 그런 것도 아닌 거 같았다. 대체 여자의 속이 무척 궁금해졌다. 하긴 범준이 옆에 있었다면 상당히 곤혹스러운 자리였을 것이고 정말 그한테 미안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네가 그걸 왜 경화한테 물어보냐. 따지며 되레 그가 정색했을지 모를 일이다. 만약 범준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러한 의구심조차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내가 경화의 마음을 알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분위기가 묘했다. 수습할 방도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어디 담배를 사러 나간다거나 화장실이라도 가야겠다고 말을 해야 할 판이었다. 

 그때, 마침 먹음직스럽게 나물에다 달걀부침이 얹힌 비빔밥이 날라져 들어왔다. 그녀는 차려진 밥상을 멍하니 쳐다보다 심각해하던 좀 전과는 달리 확 밝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밥 먹어요.” 

그런 경화의 모습을 보면서 여자가 보여 줄 수 있는 표정은 대체 과연 몇 가지나 될까. 의아해했다. 남들 모르게 감춰진 속내같이 아마도 수백 가지도 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밥을 먹기 전에 바로 내 앞에서 냅킨으로 립스틱을 깨끗이 지워냈다. 밥을 먹기 위해 남자 앞에서 내숭을 떨면서 어렵게 먹는 것이 싫다는 의도로 비치었다. 그만큼 내가 편해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서 그런대로 좋긴 좋았다. 식욕이 돋아요. 매운 것이 맛있죠. 결국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하나 마나 할 말만 하는 것 같았다. 입 안 가득 밥알을 넣고 씹는 모습이 너무 정겨웠다. 정말 여기 비빔 밥맛은 끝내 줘. 그렇지 않나요?      

 

 인사동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화랑에서 나누어주는 팸플릿을 경화는 빠짐없이 챙겼다. 

 “인사동에 왔네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이런 팸플릿을 보면 근래에 작가들의 그림의 동향을 알 수 있거든요.” 

그런 모습은 예전 범준이 하던 것과 흡사했다. 

 -뭐든 모으는 것이 내 취미야. 소장하면 언제가 그 가치가 생기는 때가 있거든. 설령 가치가 없더라도 모으는 것이 재미있는 거 같아. 지금은 다 버렸지만, 어떨 때는 껌 종이도 수집한 적도 있었다니까. 

녀석. 그래 상점에 붙어 있는 제임스 딘 포스터만 보면 다른 사람 눈치 볼 것도 없이 떼어 내는 너였었지. 

 추상화들이 범람했다. 표현의 자유로움. 가치나 형식에 얽매임 없이 눈에 보이는 것들을 모두 표현하려는 욕구들이 보였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다리가 아프다며 경화가 전통 차 마시는 곳으로 안내했다. 전통찻집이라 헤이즐넛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경화가 마시는 것으로 같은 걸 주문했다. 재스민 차였다. 

 “재스민? 전통 차 같지는 않은데요?” 

 “전통 차 맞아요. 중국 전통 차래요. 항아리째로 줘요.” 

 “하하. 정말요, 그렇게나 많이?” 

차가 날라져 왔을 때 조그만 술 주전자 크기에 항아리에는 방금 끓인 뜨거운 물이 왔을 뿐이고 거기에다 잘게 부수어진 재스민 잎을 뿌렸다. 경화는 항아리에 찻물을 조그만 사기 주전자에 붓고 내 찻잔에 따라 주었다. 역시 자신의 찻잔에다도 재스민차를 쪼르륵 소리가 나게 부었다. 재스민의 독특한 향이 강하게 올라왔다. 마치 전통술 집에서 파전에다 막걸리 마시는 기분이 들어서 갑작스레 술 생각이 났다. 

 “갑자기 이거, 주전자를 보니 걸쭉한 막걸리 생각이 나네요.” 

경화가 빙그레 웃었다. 

 “여기 술은 안 팔아요.” 

 “한데, 이걸 언제 다 마셔요? 커피도 조그마한 잔에 마실 만큼만 주는데 이건 좀 너무 많네요. 술도 아니고.” 

 “저도 처음에 왔을 때 그랬는데, 재스민 향이 좀 강해서 오래가더군요. 차를 다 마시면 뜨거운 물을 달라는 대로 가져다줍니다. 물을 부으면 그 향이 처음처럼 살아나요. 미세한 차이가 있기는 한데 차이는 그렇게 많이 나는 것 같지는 않아요.” 

 “로열 살루트 같네요.” 

 “로열 살루트?”

속설같이 도는 이야기들을 경화에게 하려던 참이었다. 경화가 갑자기 웃었다. 경화가 아는 듯한 눈치였다. 여자가 알고 있는 이야기라면 이미 마니아들한테 통하는 말이었다. 군대에서 잠깐 복초를 섰었을 때 정 병장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를 그대로 할 찰나였다. 실지로 마신 적도 없고 심지어 어떤 병 모양인지 본 적 없는 고급 위스키를 그녀에게 떠든 셈이었다. 

 “아하. 그렇긴 하네요. 비슷하네요. 향으로 음미하는 점에서는 거의 같은 거죠. 재스민이나 로열 살루트나.”

 “와. 대단한 애주가이시다. 로열 살루트에 얽힌 것들을 아신다면 말입니다.”

 “병이 호리병 모양이죠. 향이 독특하고 강해, 거기다 다른 술을 부어서 며칠 놔두면 그 향이 배는 거요. 저도 회사 회식 때 잠깐 들은 이야기예요. 그 술이 주점에서 밸런타인 다음으로 많이 찾는 술이라면서요.”

 “괜한 말을 했네요. 애주가라는 말은 취소하겠습니다.”

 “괜찮아요. 애주가 맞아요. 알코올의 기운을 빌어 매일 살고 있는 건 맞으니까요. 언중 씨가 저더러 처음에 술 마시자고 했을 때가 실은 더 좋았어요.”

 알코올의 기운을 빌어 매일 살고 있다. 그 말이 와닿았다. 그녀가 버티고 지탱하는 어려운 무게가 훅 다가왔다. 향의 고배를 먼지 털끝 안 날리고 말하려고 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나는 이제 갓 군대를 다녀온 상태에서 기껏 대어봤자 한 두어줄 나올 경험치를 경화 앞에서 뽐내려 했던 풋내기 현학가 꼴이 되고 말았다.

 “그림들은 어떤가요?” 

그다음으로 바로 직장생활의 무수한 화려한 번짐과 향연으로 이어질 줄 알았는데 경화는 술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애환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직장에서의 경연은 더 이상 들려주지 않았다. 자연스레 말이 이어준다면 나도 물어보고 들어보고 싶은 그녀의 직장생활을 듣고 싶은 상태였다. 그랬지만 로열 살루트를 늘어놓은 말에 적절한 응대 수준밖에 되지 않았고 계속 이어지는 그림으로 이야기가 주안점으로 돌아갔다. 말을 하다 보면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자신의 화려한 경력도 이력도 조금은 자랑삼아 내세울 법한데 전혀 그러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나도 그녀 말에 시큰둥하게 답하는 말뿐이었다. 

 “글쎄요. 전 고등학생 때 데생이나, 수채화 같은 그림밖에 대하지 않아서 좀 광범위하네요. 사실은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별로 인상에 남는 것도 없고.” 

 “그래도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그림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물방울 그림 다음에 본 그림 있잖아요. 그거. 수채화도 크게 그릴 수 있구나 하고, 전지에다 그린 고목 풍경화가 참 맘에 들던 데…, 역시 전 아직 사실주의가 좋아요.” 

 “그렇군요.” 

 “경화 씨는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뭐라고 구체적으로 딱 잘라 말하기에는 무리죠. 단지 몰입이란 거를 이해하게 되죠.”

 “몰입?” 

 “네. 몰입이요. 어떤 작가들은 보면 한 가지 맘에 드는 것이 있으면 그림마다 이니셜같이 어떠한 부분에 가서는 꼭 자신의 독특한 기법이 들어가죠. 각자의 형식이 있어서 누구의 그림인지 금방 알게 되죠. 예를 들면 어떤 작가는 사람의 특이한 인상을 형상화해서 사물을 그리면 그 특이한 인상을 작품 속에 그림자가 겹치듯 꼭 넣고는 하죠. 어떤 분은 나무무늬 결만 수십 년씩 그리는 분이 있네요.” 

차를 마시던 터라 말이 중간에 끊겼다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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