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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만 Jun 13. 2024

벙거지를 쓴 남자크로키 1 -15 2화의 시작.

2화 면도날 -십 삼년이 지났다.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 막 치밀어 온다. 흩어진 욕실 바닥의 타일. 거기서 빚어진 자국들. 흔들릴 수밖에 없는 촘촘한 머리카락. 머리카락을 손으로 수없이 다듬어 넘기고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귀가와의 전쟁을 치르던 생각이 아찔하다.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안 갔다. 어제 분명 4호선을 탔던 것 같았는데. 사당역인가. 아니면 오이도. 당고개역. 그런데 지금은 역을 나와 건물의 형세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서울이 아니었다. 홈플러스와 시지브이 극장이 보이는 것 보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건물형세인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역을 나올 때 표지판이라도 잘 살필걸. 걷다 보니 차병원이 보이고 시외버스터미널이 보인다. 야탑역이다. 

 어제 술을 또 마셨다. 그토록 힘들다고 하면서 계속 먹게 되는 이유는 뭘까. 사람들과의 상충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혹은 영업을 위해. 어디를 가나 그에게 떨어지는 전략보고서는 감당하기 벅찬 것들이었다. 고요를 깨는 전화벨 소리. 음울한 고착이 거들먹거린다. 

 네에. 그런데. 그게 밀도가 가벼워요. 용량을 주니까, 가벼워지는 거고……. 영업의 제일 법칙. 엠 앤 에이. 영업은 상대가 원하는 바의 120%를 해줘야 성공하는 거야. 100%는 상대가 원하는 만큼만이야. 상대는 그 정도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지. 상대가 기대하는 그만큼보다 20% 많게. 120%를 해야 만족한다고. 이른바 영업의 법칙이야. 살면서 이 영업의 법칙을 기억해야 할 순간이 생각보다 많을 것 같다. 내가 100%를 하고도 상대를 만족시키지 못했을 경우 나는? 120% 더 열심히 해서 인정받고 싶어 한다. 어차피 100% 해도 만족 못 시키는데 그냥 80%만 하고 에너지 아낀다? 

 “형! 복장은 이게 뭐예요. 휴가 받아서 놀러 가는 사람 맞아요?”

수현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언중을 바라봤다. 그리고 옆에만 가도 술 냄새가 풀풀 풍겼다. 그것도 그렇지만 언중은 새벽 다섯 시까지 버티느라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눈이 벌겋게 충혈이 되었고 머리모양도 엉망이었다. 거기다가 상갓집에 다녀온 것도 아니건만 여름에 긴소매의 검정 양복 차림이었다. 넥타이는 아무렇게나 위 양복 호주머니에 꽂혀 있었고 흰 와이셔츠마저 거무튀튀하게 바라졌다. 초췌한 모습의 초절정이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저녁때 술 마시러 간다고 했었을 때부터 말렸어야 했는데. 이제 어쩔 거예요. 이리해서. 정장은 그렇다 치고 구두 신고 지리산 돌 수 있겠어요?”

 “그만 좀 해. 자식아. 난들 이렇게 될 줄 알았냐? 차장이 놓칠 수 없는 거래처라고 나더러 나가라는 데 어째? 차 시간 좀 남았냐? 어디 가서 옷이라도 바꿔 입게.”

 “그러게. 휴대전화는 왜 안 받았던 거예요? 형이 이럴까 봐, 한 시간 전부터 계속 몇 번씩 걸어도 받지도 않고. 내 참. 지금 차 출발하려면 이십 분도 안 남았어요. 빨리 옷 사서……, 아니지. 옷을 지금 어디 가서 사요? 아침이라서 문 연 곳도 없고. 신발이나 운동화로 갈아 신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니면 지리산 근처 가게에서 사요. 지금 차 시간 없어요. 시간 빡빡하다고요.”

그 자식 타박이 장난이 아닐세. 언중은 수현에게 한마디 쏘아붙이려다 참았다. 어차피 자신 때문에 수현이도 애태운 걸 가만 한다면 그에게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한참 아래뻘인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타박이 아닌 욕을 들어도 아무 군소리도 못 할 처지였다. 

 “밥은 먹었어요?”

 “밥은 무슨 밥이야? 지금 졸려서 눈꺼풀이 내려앉아 한참 벗겨질 판인데.”

그래도 형이니까 배고플까 걱정해 주었다. 김밥을 수현이 언중에게 내밀었다. 버스 타서 먹자고. 지금은 생각이 없어. 언중은 오로지 잠잘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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