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형의 파우스트 4 -7
90이 넘은 아버지가 50대 나를 경찰에 신고했다. 1 -7
아버지가 있는 그대로 말했다면 나는 이렇게까지 비난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옆에서 나의 이야기를 들었던 분들이 아버지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대단한 분이다. 그리고 너도 잘하고 있다.
부질없다. 갑자기 아버지 군대 생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아버지 목을 졸랐을 때 아버지가 한 말 때문이다. 헌병대에 끌려간 새끼가.
나는 헌병대 근처도 가지 않았을뿐더러 거기가 어딘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버지 기억으로 왜 나를 헌병대에 끌려간 놈이라 말했을까.
보통은 군대 생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과장되게 포장해 말하는 것을 알면서도 들을 때가 많다. 특히 특전사 이야기가 심하다. 특전사는 어디서 근무하는 것조차 비밀에 속해 일반사람이 찾아보지 않으면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것도 잘못된 것이다. 특전사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특히 더 심하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다. 이 현실 때문에 말 한마디 잘못 꺼낸 경우가 과장되고 허풍이 심한 경우가 허다하다.
종종 들었다. 특전사 근무하는 형이 있는데 가족이 면회 오면 그대로 넘어 집에까지 온다. 그걸 그들 말로는 ‘점프’라 말한다.
아버지도 당시 다른 사람한테 들은 건지, 내가 아버지한테 군대 생활할 때 편지 보낸 것 때문에 말씀이 많았다.
전방에서 근무하면 면회도 안 되고 휴가도 없다며?
나는 철책사단에서 근무했다. 중부 전선에서. 몇 번이나 중대장이 내가 근무하는 근무처도 북한에 알려지면 문제가 되니 함구에 부치라. 이야기했다. 가족에게도 알려지면 안 돼.
당시에는 그런 줄만 알았다. 1993년도였으니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절이었다. 철책사단은 일 년에 한 번씩 부대 교체가 있었다. 나는 그때 상병이었고 밖에 한 번이라도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한테 편지를 줄기차게 썼다. 면회를 오면 바깥 향기를 마실 수 있으니 빨리 오시라. 군 통신 편지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외박을 일주일마다 나가는 소대장한테 부탁했다. 내 편지를 집에다 부치라. 한 다섯 통 넘게 편지를 부치니, 부대 교체를 즈음하여 부모님이 오시는 걸로 알았다. 답장은 받을 수 없었다.
부대 대대장이 ‘이상하다.’ 어떻게 부대가 교체되자마자, 부모가 면회를 오냐는 말이다. 나는 여러 말을 들었다. 그 예하 휘하에 있는 분들한테 똑같은 이야기를 수십 번 들었다.
아버지 어머니 표정도 별로 좋지 않았다. 부대가 교체하여 훼바에 안착했는데 바로 면회라니. 행군해 와 씻지도 못한 상태였다.
‘일단 부모님이 오셨으니, 외출은 허락한다.’ ‘나갔다 와라.’
전곡까지 오면서 두 분이 수십 번 말다툼했나 보다. 머저리 같은 나를 두고. 아버지가 첫마디가 그랬다. 네가 좀 별나도 보통 별나야지. 고등학생 때도 그러더니 군대에서도 마찬가지구나. 형들은 안 그랬는데 너는 왜 그러냐. 아직 멀었구나. 너는.
어머니는 아버지를 쏘아붙이느라 내게 얼굴 한번 비췄을 뿐이었다.
뭐라카노? 야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렇게까지 했노. 그만 하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