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잠언 -4

강원도 정선에서 집을 떠나기 전까지 -회상

by 이규만

몇 번을 지켜봐도 그랬다. 마담, 밥 쟁반을 안겨줬던 아줌마, 웨이터까지 계속 숨기려 하는 표정이었다.

이 시대를 아우르는 거물급의 두 번째 여자로 사는 거지. 마담이 말해도 나는 보통 여자로 살기를 원했다. 마담은 일주일 동안을 날 설득했지만 거부했다. 돈이 필요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저녁에 마담이 조용히 불렀다. 십만 원짜리 수표를 내주었다.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한숨처럼 긴 연기를 뿜어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거 같은데, 차비로 써. 이런 곳에 발 들일 생각 말고.”

왜 내가 여자로 태어났을까. 이런 엉뚱한 곳에 있다 어처구니없어하다 풀려놨는지 하도 기가 막혀서 또 울었다. 나는 그 길로 버스를 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잠깐 졸았다가 어딘가에 내렸는데 큰 흰색 빌딩 앞에 ‘롯데월드’ 큰 메인 간판이 보였다. 막막해졌다. 어디로 가야 하나. 사거리 표지판에 잠실이라고 씌어 있는 것이 보였다. 곳곳에 큰 버스에 달린 안내 문구도 선명하게 ‘잠실’로 출렁거렸다. ‘메이드 인’을 붙여주고 싶을 정도로 여기저기 ‘잠실’ 표지판이 넘쳐났다. 마치 안내표지가 아니라 상품 문구같이 보였다.

멍하게 걷다가 가판대에 광고지 신문이 보였는데 그걸 한 부 들었다가 크게 지면을 차지한 광고란에 ‘P 크루아상’ 구인 광고를 보았다.



어둡지만, 내가 본질적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미천하고도 극히 단순한 사회의 영향력을 충분히 발휘한다, 착각한 것은 아닌가. 그 불안정성은 거꾸로 탈피하지 못한 세상으로부터의 거절 따위로 이리저리 휩쓸려 떠돌더니 냉대한 마음으로부터 존망이 쓰디쓰게 다가왔다. 언제나 헤매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정신없이 혼란에 빠뜨렸다. 단 일주일. 몇 시간이었지만 나는 거기서 십 년, 한 이십 년도 더 산 것 같았다. 갑자기 늙어버린 느낌이었다. 어두웠다. 홀은 골짜기이었고 어디로 갈지 몰라 갈팡질팡 헤맸다. 아무리 고개를 돌리고 흔들어도 지울 수가 없었다. 배려일까. 나의 모습이 처량하고 불쌍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벗어날 수 없을 거라 체념한 뒤라 마담이 쉽게 놓아주는 것이 외려 꺼림칙할 정도였다.

닥쳐오는 훗날을 고민한다면 그래도 남자보다는 여자가 유리하지. 여자는 결혼 적령기에 들어서면 능력 있고 남자를 만나면 되니까. 자네들이 공부하는 이유는 적어도 경제적 기반이 탄탄하고 집안 좋고 학벌 좋은 남자들에게 인정받고 선택 지어지기 위해 공부하는 거야. 성적이 월등히 뛰어나고 우수할수록 부여되는 혜택은 경제력 있고 정말 이상형으로 바라는 남자에게 시집을 갈 수 있는 든든한 배후라는 사실을 잊지 마.

선생님의 가르침은 소용이 없었다. 이곳에서 좋은 남자를 만난다면 선생님이 말한 결혼에 가까이 근접하는 셈이었다. 어차피 여자의 일생이 남자 직업으로부터 신분과 위치가 정해지고 상승할 수만 있다면 그것도 썩 나쁘지 않으며 오히려 괜찮은 방법의 하나였다. 하지만 여긴 어차피 떳떳하게 여자가 직업으로 누릴 수 있는 형태가 아니다. 수없는 비밀들이 오가고 제멋대로의 규칙이 난무하는 곳이었다. 나중에 그 좋은 남자를 만나 아내로 살고자 했을 때 사회로부터의 어림없는 비난이 쇄도하여 힘들게 할 것이다. 아무래도 그 남자의 지위나 사회적 체면을 고려해 양가 부모들이나 아니면 그와 관련된 비즈니스로 얽힌 사람들에게 나를 어떻게 만났나를 한동안은 계속 말해야 하는데 술집에서 만났다, 말은 도저히 못 할 것이다. 계속 꾸미거나 거짓을 말해야 한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술집에서 일했던 여자가 잘 산다, 남자를 잘 만나서 행복하다는 수식어를 들어본 바가 없다. 남자 또한 스쳐 간다. 술집에서 만났는데 내 아내는 호스티스 출신이다, 술도 잘 마시고 노래도 잘 부르는 그야말로 밤의 여신이다. 그래서 지금 내조를 엄청나게 잘하고 있는 여자가 바로 그 여자다. 그렇게 자랑스럽게 떠드는 남자는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곳은 남자의 로망이다. 놀이터이기도 하다. 엄청난 돈이 왔다 갔다 가면서 대한민국을 한꺼번에 들썩 들었다, 놨다 하는 인사들의 로비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때론 더럽고 악취가 풍겨서 감히 들이대고 맡을 수 없는 냄새들이 방바닥마다 가득히 진동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녀는 나를 무지막지하게 다루는 곳으로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나를 곱게 내보내 주었다. 돌이켜 보건대 그곳에서 나온 거는 천 번, 만 번 생각해도 잘한 일이었다.

날 데리고 나가려던 남자는 사회로부터 얻은 막강한 지위로 골고다의 로마 군사와 같은 권력을 휘둘렀다. 마담에게 기막힌 제안을 하며 꼼짝달싹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에게 동조하지 않았다.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그에 상응하는 엄청난 파장을 어떠한 이유로써 여하 막론하고 피해 갔다. 남자는 대체 어디에 살고 있으며 이 못난 사회로부터 어떤 지위를 인정받고 있는지, 또한 그의 부는 어느 정도인지도 자못 궁금하다. 그리고 마담이 그 남자가 했던 솔깃한 제안을 엎치고 나를 보호하고 세상 밖으로 밀어낸 이유를 수천 번 수만 번을 곱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 모든 일이 이어짐에 있어 에누리 없이 착착 맞아서 떨어졌다면 부조리는 행해지지도 않았다. 그랬다면 남자가 행하려던 일조차 부조리하다. 또 한 그것들이 넘쳐나는 공간이나 로비 같은 것도 존재할 수도 없었다. 계속 속이고 감추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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