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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준혁 Jun 09. 2021

두 개의 구멍 속으로 들어가 버린 첫 단추

Chapter 1. 경기의 시작 - 탄생 誕生 [일곱 번째 이야기]

- 두 개의 구멍 속으로 들어가 버린 첫 단추


 할머니와의 시간 동안 나는 공부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공부를 못하면 혼난다는 생각은 더더욱 해보지 않았다. 정과 사랑으로만 키워져 온 온실 속의 화초였다. 그러다가 아빠가 내 삶 속에 들어온 후부터, 나는 공부가 어렵고 힘든 것이라는 고정 관념을 가지게 되었고 아빠의 강한 훈육에 의해 세상은 철저한 성과 주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순한 성격으로 인격이 굳어가려던 찰나에 강함과 남자다움으로 무장한 한 사람이 들어와 미처 자아를 갖추지 못한 어린 아이에게 혼란을 주는 상황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가지 정체성은 서로를 밀어내려다 승자를 가리지 못한 채 지금도 이따금씩 다툼을 벌인다. 요즘도 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어떤 때는 한없이 감정적이며 여린 사람이 되고, 또 어떤 때는 한없이 이성적이고 냉정한 사람이 된다. 요즘도 일관적인 성격을 가지지 못한 스스로를 발견할 때면 가끔 무섭다.


 교육 전문가들은 흔히 유아기의 인격형성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여러분의 자녀는 그 시기에 모나지 않은 하나의 성향만을 접했으면 좋겠다. 나는 집안의 교육자가 한 명이든 여러 명이든, 어른들끼리 분명한 합의를 거친 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없이 사랑만 주다 갑자기 엄해진다거나 혹은 그 반대의 케이스는 자식을 혼란에 빠뜨리기 쉽다. 나 같은 경우는 순하게 자라다 중간에 강한 남성성을 주입받은 케이스라, 요즘도 가끔 여리다가 갑자기 무섭도록 돌변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나를 마주할 때면 ‘왜 이런 성격을 가지게 되었는가.’에 대해 곱씹으며 때때로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그리고 공부에 대한 이야기는 뒷장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어린아이에게 너무 심화된 내용을 가르치거나 지나치도록 공부를 강조하는 교육법은 장점보다 단점이 많을 수 있다는 점을 여기에서 먼저 언급해 두고 싶다. 선행학습의 장점이라고 하면 앞으로 배워야 할 내용을 미리 한 번 배움으로써 학교에서 배울 때 그 내용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선행학습이 배움에 대한 호기심 및 동기를 하락시키는 기제로 작용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선행 학습 이후 정작 배워야 할 때, 반복되는 학습 내용에 대한 싫증 혹은 기존에 학습하여 익힌 지식에 시시함을 느끼는 태도는 학생이 학업에 건성으로 임할 확률을 높인다. 이는 고스란히 배움에 대한 거만함을 갖게 하고 학습에 대한 호기심 하락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선행 학습을 멈추는 때가 올 때 학생이 느끼는 무력감에 있다. 우리가 무빙워크를 사용할 때를 예로 들어보자. 땅에서 걷다 무빙워크 위를 올라가면 걷는 속도에 무빙워크가 움직이는 속도까지 더해져 굉장히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가게 되고, 사람은 이내 그 속도에 적응해 버린다. 이후 무빙워크의 끝에서 다시 땅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그 속도에 적응한 나머지 본인이 이전보다 느려진 것처럼 느끼게 된다. 선행학습은 무빙워크와 같아서 그것을 멈추는 시점이 올 때, 정작 본인은 제 속도로 가고 있는데도 무언가 모르게 도태되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국가가 마련해 준 교육과정대로 물 흐르듯 맞추어 가면 될 것을 너무 성급히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이에 맞게 차근차근 하나씩 배워가도 늦지 않다. 교육과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교육에 있어 우리보다는 조금 더 똑똑한 사람들일 테고, 다들 고된 연구 끝에 체계적으로 만들어놓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교육과정을 믿고 부모의 욕심에 자식이 힘들어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공부를 더 가르치려다 성격도 그르치기 십상이다. 부모의 기대치에 자녀가 설사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학습에 있어 아이들이 여유를 느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모의 강요로 꾸역꾸역 배우는 것보다 본인이 공부의 필요성을 깨달은 후에 배우는 것이 몇십 갑절은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아빠를 자주 원망하곤 했다. 혼자 방에 들어가 울면서 아빠를 원망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빠를 이해한다. 앞서 말했듯 내가 세상에 나온 지 예닐곱 해밖에 되지 않았던 것처럼, 나의 아빠도 아빠가 된 지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혹자는 이 내용을 읽고 ‘거 참 그 아버지 너무했네... ...’, ‘어린 애한테 너무 심한 거 아니냐.’ 라며 흉을 볼 수도 있다. 흉보는 것도 하나의 감상이니 좋다. 다만 여러분의 자녀가 성인이 되어 이와 같은 주제로 글을 쓰게 될 때, 과연 ‘우리 부모는 완벽에 가까웠다.’라고 자신있게 쓸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것이 우선이고, 이를 바탕으로 후에 자녀가 부모에 대한 반감을 갖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가정에는 고객센터가 없는 관계로 자식과 부모 사이는 A/S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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