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경기의 시작 - 탄생 誕生 [열한 번째 이야기]
나는 엄마같은 여자랑은 절대 결혼 안 해!
엄마와 하루를 온전히 보내게 된 것은 부모님께서 갈빗집을 정리하신 2005년도, 내가 여덟 살이 되는 해였다. 의도된 것 마냥 나는 3년을 주기로 양육자를 하나씩 들이게 되는데, 다행히 엄마는 아빠와 굉장히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 아빠와 할머니의 공존으로 혼란스러웠던 나의 자아 형성 과정에 또 다른 폭풍을 몰고 오지는 않았다. 다들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 짝지어 산다는데, 우리 부모님을 보면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 말이다.
엄마는 물론 나와 한 집에서 같이 살기는 했지만, 깊은 교감을 할 정도의 시간을 공유하지는 못했다. 다른 가정을 보면, 높은 확률로 아버지들께서 생계를 담당하시기 때문에 자식은 어머니와 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것이 일반적이지만 나는 반대였다. 엄마가 내 편이라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정작 엄마가 왜 나를 사랑하는지, 왜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 채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할머니가 나의 엄마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지라, 엄마를 받아들이는 것은 새로운 엄마 한 명을 더 받아들이는 것과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철딱서니 없고 무례하기 짝이 없지만, 그 때의 나는 엄마가 별로였다.
왜 별로였는가 하니, 나는 할머니의 맹목적인 사랑을 이미 경험해본 상태였는데, 엄마는 내 행동 하나하나에 트집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잘하던 못하던 격려와 칭찬만 받았던 과거가 좋았나보다.
밖에 나갔다 방바닥에 옷을 아무렇게 벗어던져 놓는다거나,
실내화 가방에 운동장 흙을 잔뜩 묻혀 집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다거나,
이유없이 동생을 괴롭혀 울린다거나, 어른에게 예의없는 행동을 한다거나,
숙제를 제 때 하지 않는다거나,
친구와 다투고 온다거나 하는 날이면 항상 나는 엄마의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저 여섯 행동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으니, 잔소리 역시 하루도 끊인 적이 없었다. 욕을 얻어먹어도 마땅한 짓이었지만 당시에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혼내는 엄마를 미워만 했던 것 같다. 나를 향한 엄마의 잔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지고 한바탕 소동이 일면,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할머니 방으로 피신했다. 그리고는 “할머니, 나는 엄마같은 여자랑은 절대 결혼 안 할 거야.” 라며 푸념했다. 그 때 당시 내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즈음으로 기억하는데, 아빠는 내가 강한 남자로 컸으면 좋겠다며 나와 친구 한 놈을 묶어 5박6일 짜리 실미도 해병대캠프에 보냈다. 온통 중/고등학생 뿐이었고, 그 캠프에 온 초등학생은 나와 내 친구 뿐이었다. ‘나이 무관’이라고 적힌 광고를 보고 아빠는 열살 짜리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영하 15도의 새벽 추위에 팬티만 입은 채 모래사장에 누워 물을 맞고, 여섯 명이서 80키로짜리 보트를 들고 행군하는 일은 초등학생에게 택도 없는 일이었다. 대충 짐작하건대, ‘철없이 부모 속썩이는 고등학생’을 위한 캠프로 보였는데, 아마 나와 내 친구의 등장은 캠프 운영자에게도 큰 과제로 다가왔을 것이다.
첫날 밤, 잠자리에 눕자마자 나는 ‘아마 내일 크게 다치거나 죽을 것이다.’라고 확신했지만 용케도 셋째 날이 왔다. 그날 오후에는 11m 절벽 위에서 뛰어내리는 레펠 훈련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달린 형아들 사이에 껴서 뛰어내릴 준비를 해야 했다. 온 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드디어 죽겠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앞에 서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비명 소리만 남긴 채 절벽 밑으로 없어지기를 반복하니 어느덧 내 차례가 왔다.
“최준혁 훈련병, 셋 세면 몸을 L자로 만든 후 하강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있습니까?”
나는 생각할 필요도 못 느낀 채 소리쳤다.
“네!”
“그러면 셋 세고 뛰어 내리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말하고 하강합니다.”
“셋,,, 둘,,, 하나!”
“할!머!니!”
외마디 비명과 같았던 이 세 글자는 이내 구름 잔뜩 낀 섬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내가 느끼기에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던 이 비명은 문제가 되고야 말았다.
6일째 되던 날 엄마와 아빠는 나를 데리러 배가 도착하는 곳에 나와있었다. 엄마는 눈가가 시뻘개진 채 나를 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조그만 놈을 그 험한 늪에 던져 놓은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아니면 시간이 지나 나를 진짜 군대에 보내는 상상을 했는지 모르지만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런데 그 눈치 없는 교관이라는 사람은 엄마의 마음에 비수를 꽂았다.
“아드님은 할머니를 참 좋아하나 봅니다, 허허.”
“왜요?” 엄마가 물었다.
“레펠 강하 훈련하다가 뛰어내리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 말하라니까, 다른 학생들은 엄마 아니면 여자친구 이름을 외치고 떨어지는데, 이 친구만 할머니를 외치고 뛰어내립디다.”
엄마의 표정에는 섭섭함과 허탈함이 묻어났다.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나를 싫어할 때 내가 짓던 표정과 놀랍게도 비슷했다. 그 표정을 보고 나서야 나는 왜 엄마가 나의 엄마인지 아주 조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전까지 우리의 모자관계는 짝사랑이었다는 것을 나는 그 때 알았다.
많이 속상하셨는지, 엄마는 다음 날 아침에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아침밥을 차려주었다. 눈치는 있어서 왜 엄마가 울음을 보였는지 다 알고 있었지만, 함부로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미안하다고 할까 말까 머뭇거리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건넨다면, ‘내가 엄마보다 할머니를 더 좋아해서 미안해.’라는 의미로 전해질 수도 있고, 만약 엄마가 ‘뭐가 미안한데?’라고 되묻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엄마와 나 모두 심각히 곤란해질 것만 같아 결국 입을 꾹 다물고 학원에 갔다.
이렇게 엄마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는 몹시 잦은 빈도로 찾아와 우리를 괴롭혔다. 불과 몇 년 전 아빠를 받아들이면서 힘들었던 시간들이 혹여 되풀이될까 두려워 나도 모르게 엄마를 밀어내려는 것이었는지, 마냥 잔소리만 하는 엄마가 싫었는지, 그 이유를 확실히 단정짓기 어렵다. 하지만 당시 엄마라는 존재가 내게 참 난해했던 것은 사실이다.
대체 왜 엄마라는 존재가 그토록 난해했을까. 왜 엄마를 나의 사람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걸까. 왜 할머니에게 엄마의 흉을 보았을까. 왜 나는 세 양육자들 사이에서 혼란을 겪었던 걸까. 아빠와 엄마, 그리고 할머니 모두를 마음 다해 사랑했으면 될 것을, 왜 그러지 못했을까.
유년기에 양육자의 양립으로 혼란을 겪는 아이, 양육자를 편애하는 아이는 분명 지금도 존재할 것이다. 그 아이들의 혼란과 편애를 해소하려면, 양육자들의 어떠한 접근이 필요한가에 대해 고민해보게 된다. 어렸을 적 나의 마음을 복기하면서 내린 나만의 결론은 이렇다.
[1]. 가능하다면 아이가 아주 어릴 때, 양육 주체가 동시에 개입하는 것이 좋다.
[2]. [1]이 힘들다면, 부드러운 양육자가 교육에 먼저 개입하는 것이 좋고, 부드러움에 익숙해진 나머지 쉬워질 때쯤 비교적 강한 주체가 등장하는 것이 좋다. 부드러움 속 갑자기 강함을 마주하게 될 때, 반발이 생기고 그 양육 주체에 대한 적대심이 아이에게 내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양육자 개인은 한결같이 부드럽거나 한결같이 강한 것보다는, 부드러움으로 시작하여 이 기조가 아이에게 쉽다고 느껴질 때쯤 서서히 냉정함과 강함을 점차 가미해나가야 한다.
나에게는 부드러운 하양과 굳센 검정이 있었을 뿐, 그 둘이 섞인 부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하양으로 살지, 검정으로 살지를 두고 고민해야 했다. 선택지는 두 개 뿐이었다. 흰색에서 연회색, 연회색에서 진회색, 진회색에서 검정으로 이어지는 선택지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