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by 소로


휴일인데도 아침 일찍 일어났다. 어젯밤 잠들기 전 알람을 꺼두었는데도 저절로 눈이 떠진 것이다. 별다른 일정을 세워두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하루는 모처럼 만의 자유를 느껴볼 셈이다. 그저 시간이 흘러 가는대로 하고 싶은 것들을 할 것이다.

아침 식사로 사과 주스를 한 잔 마신 후 창 밖을 내다보았다. 평소라면 지금쯤 사람들로 발디딜 틈 없는 지하철에 겨우 몸을 밀어 넣고는 인상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창가의 햇살을 받으며 여유롭고 평온한 아침을 보내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니 어쩐지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지고 콧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옷장 안에 널브러진 옷가지들 몇 벌을 정리하며 입을만한 것들을 꺼내 보았다. 가장 먼저 손 닿는 곳엔 출근할 때 걸쳐입는 것들이 있었고 다른 옷가지들은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차려입고 나가느라 옷장 안을 손으로 헤집고 다닌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평소 입지 않았던 옷을 여러 벌 꺼내보고 가장 근사해 보이는 것들을 골랐다.

한껏 차려입고 나와 차에 시동을 걸고 운전석에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목적지는 아직 정해진 바가 없었다. 4월의 봄이었지만 아직 일교차가 있어 쌀쌀한 공기가 차 안에 맴돌았다. 나는 정말이지 오늘 계획 하나 없는 자유로운 휴일을 보낼 것이다. 어느 방향으로 떠나도, 어느 곳에 목적지를 세워도 상관이 없다. 나는 잠시 일상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그것을 항상 꿈꿔왔던 것이 틀림없다.

차창 밖을 구경하며 도로 위를 30분쯤 달리다가 문득 이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보이는 아무 카페에다 차를 세웠다. 아직 오픈한지 얼마 안된 시간이어서 그런지 손님이 두세 사람 밖에 없었다. 나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여유롭게 책을 읽다가 갈 생각이었다.

건너편엔 까만 모자를 푹 눌러쓰고 하얀 티셔츠를 입은 청년이 노트북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테이블 위엔 대학 전공 서적처럼 보이는 두꺼운 책, 형광펜으로 밑줄이 그어진 인쇄물들, 얼음 몇개만 남은 빈 컵이 어수선하게 놓여있었다. 카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그는 외딴 섬처럼 보였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하고 아름다운 음악은 그를 에워싼 공기와는 좀처럼 어울리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에겐 소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대학 시절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마음의 여유를 느낄 새가 없을 것이다. 그 시절도 벌써 몇 해전이라는 것이 새삼스럽게만 느껴졌다.

나는 책 읽는 것을 멈추고 이파리가 나지 않아 아직 휑한 나뭇가지 위에 새 한마리가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붉은빛과 잿빛이 오묘하게 뒤섞인 작고 귀여운 새였다. 마치 불씨가 사그라 들어가는 잿더미의 모습을 닮아있었다. 가만히 새를 들여다보니 새롭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작은 새는 순진하고 바보같기만 했다. 새는 나뭇가지 위에서 몸을 흔들더니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사라졌다. 문득 시계를 보니 벌써 두어 시간이 흐른터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를 타고 또다시 달리다가 커다란 쇼핑몰 안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걸어가면서 일렬로 쭉 이어져있는 이름만대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본 브랜드 매장들을 구경했다. 평소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만 계획있게 사는 편이지만 오늘은 왠지 좋을대로 하고 싶었다.

그러한 생각으로 이끌린 곳은 1층의 향수 매장이었다. 매장 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향수들이 원목 선반 위에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직원이 건네주는 시향지 서너장을 들고 향을 번갈아 맡아보았다. 짙은 향이 차례대로 코끝을 스쳐지나가다 마지막엔 모두 공중에 뒤섞여버리고 말았다. 손에 쥔 하얀 시향지들이 제각기 어떤 향을 지녔는지 뚜렷하게 구분할 수 없었으나, 나는 세 번째 것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고 망설임 없이 카드를 내밀었다. 예전에 전여자친구에게 선물로 받았던 것을 제외하고는 써본 것들 중 제일 좋은 것이었다. 예쁜 쇼핑백에 정성스럽게 담긴 작은 향수병을 보니 무계획적이고 충동적인 소비에 대한 죄책감이 사라지고 가벼운 쾌감이 들었다.

쇼핑백을 손에 들고 걸으면서 나는 잠시 갖가지 공상에 잠겼다. 시도때도 없이 공상을 하는 것은 나의 오래된 습관이다. 대부분은 살아가는데 쓰잘데기 하나 없는 내용들이다. 기억나는 최초의 어린 시절도 5살 때 여행을 가는 차 안에서 동생에게 상상 속의 이야기를 지어내 쉴 새없이 떠드는 것이었다. 어른들은 늘 내게 집중하지 못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며 나무랐다. 그렇게 다른 생각에 빠져있으면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후회를 하게 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공상하는 걸 의식적으로 멈추면서 걸어보았다. 머릿 속에 뒤죽박죽 떠오르는 생각들을 억누르고자 일부러 주위의 풍경에 시선을 두고 사지도 않을 물건들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그렇게 뚜렷한 목적지 없이 볼거리가 가득한 쇼핑몰 안을 한동안 맴돌았다. 그러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5층짜리 쇼핑몰을 전부 돌아보았다고 생각했다. 의미없는 공상도 관찰도 멈추었을 때쯤 나는 지하주차장에 와 있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신발을 벗고 불도 켜지 않은 채 잠시 서 있었다. 천장의 센서등이 꺼지자 거실을 메우고 있던 해질녘의 땅거미가 내 발 밑까지 번져들어왔다. 침대 위에 반쯤 몸을 누였다. 열린 방문의 가는다란 틈 사이로 거실의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들어 오고 있었다.

나는 두 눈을 감고 오늘 하루를 천천히 되새겨 보았다. 아침에 잠시 느꼈던 가볍고 상쾌한 기분, 텅 빈 도로를 달렸던 것, 조용한 카페, 향수...... 그리고 조금 더 기억을 되짚어 보아 스쳐지나갔던 풍경과 말소리들까지 세세하게 떠올렸다. 짧은 기억의 조각들은 머릿 속에서 퍼즐처럼 맞춰지다 서로 뒤섞이며 조금씩 흔들렸다. 균열일까 화음일까.

갑자기 창밖에서 무언가 깨지는듯한 강한 소음이 들렸다. 나도 모르게 눈이 번쩍 떠졌다. 집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황급히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보았다. 건물 앞에 주차해두었던 자동차의 창문이 파손되어 있었고 그 아래 향수병의 유리 조각들이 날카롭게 흩어져 있었다. 잠들기 전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새로 산 향수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던져버린 것일까? 집 안에는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가 하여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파열음이 들린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범인이 있다면 아직 이 근처에 있을 것이었다. 횡단보도를 향해 달려가는 까만 모자를 쓰고 하얀 티셔츠를 입은 청년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급히 골목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그 순간 내 몸이 크게 한 번 휘청이더니 그대로 창밖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사방이 온통 깜깜했고 나는 침대에 그대로 누워있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있었다. 불을 켜고 집 안을 둘러보니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악몽을 꾼 것이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다행인지 뭔지 모를 안도감과 함께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인 채 나는 다시 침대 위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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