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겨워"
유경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책상 위에 던져지듯 놓인 책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친 후 현관문을 나섰다. 그와 동시에 앞집 문이 벌컥 열리면서 남자 대학생 서넛이 시끌벅적하게 쏟아져나왔다. 열린 문으로 보이는 원룸 안은 깨끗하다 못해 텅 빈듯한 유경의 방과는 다르게 먹다남은 쓰레기 봉지와 술병, 구겨진 옷가지들이 사방에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새벽까지도 잠에 들지 않고 정신없게 웃고 떠들던 무리는 그래도 아침 일찍 있는 1교시 수업에는 늦지 않게 출석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언니, 오늘은 다음 주에 있을 기말고사 대비 총 정리가 있는 날이래. 꼭 와야해. (오리 이모티콘)'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폰을 확인했을 때, 같이 수업을 듣는 지수에게 카톡이 와 있었다. 착하고 공부도 성실하게해서 항상 A학점을 받는 한 살 어린 동생이었다. 유경은 '지금 가고 있어'라는 글자를 입력하다가 갑자기 손가락을 멈추고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화살표 버튼을 눌러 글자들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폰을 쥔 오른손을 자켓 주머니 속에 깊숙히 넣었다.
9시가 되려면 아직 15분이 남아있었고 4층 강의실까지는 10분 거리였으니 속도를 조금 늦춰서 걸어갈 생각이었다. 대학 후문가엔 아침의 차갑고 산뜻한 공기와 근방에 있는 공장들이 내뿜는 매캐한 매연이 뒤섞여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묘한 기운이 골목마다 가라앉아 있었다. 길바닥에 무질서하게 흩뿌려진 전단지, 담배꽁초와 쓰레기들이 밤새 누군가 한바탕 휩쓸고 간 것처럼 보였다.
이번 수업에 결석을 하면 이제 마지막인 4번째 결석이 될 것이다. 4번까지의 결석은 허용되지만 그 다음부터는 F학점이었다. 같은 수업을 처음부터 다시 반복해서 듣는 끔찍한 일을 면하려면 아직 한 번의 기회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동생의 말대로 오늘은 기말고사 총 정리가 있는 중요한 날이었다.
유경은 건물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학생들이 모여있는 엘리베이터 앞을 지나쳐 실험실이 줄지어 있는 어두컴컴하고 기다란 1층 복도를 걸었다. 이 방향으로 가서 모퉁이의 계단으로 올라간다면 강의실까지 빙 돌아가는 것이라 도착까지 5분 정도의 시간이 더 걸렸다.
초중고 시절 학교에서 지각이나 결석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유경은 대학에 와서부턴 수업에 이유없이 4번씩 결석하곤 하는 이상한 습관이 생겼다. 하지만 이번 수업을 빠지기엔 아직 종강일이 멀어서 조금 이르다 싶었다. 복도를 서성이다가 같은 수업을 듣는 아는 얼굴을 만난다면 조금 어색해질 수도 있겠지만, 지수는 지금쯤 이미 교실에 도착해 있을 것이고 그밖에 수업에 아는 학생들이 없었다.
유경은 아침 해가 들지 않아 어둑한 서쪽의 계단에 서서 폰을 켜보았다. 뉴스 1면에 오늘 새벽 6시 경 서울에서 울산 방면으로 가던 기차가 탈선했다는 속보가 떠 있었다. 기사는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고 있었다. 처참한 사고 현장 사진 여러 장이 화면을 가득 메웠고 구조, 수색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사상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유경이 잠시 속보에 관심을 기울이던 사이 시간은 어느새 정각 9시가 되었다. 유경은 창 밖을 내다보았다. 수업 시간이 시작되면 캠퍼스 안에는 다시 텅 빈 고요가 찾아왔다. 유경은 건물을 나서 아무도 없는 캠퍼스 안을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지수에게 답장을 보냈다.
'나 오늘 수업에 못 갈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