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혈통 관계이지만 리좀은 결연 관계이며 오직 결연 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다(etre)”라는 동사를 부여하지만 리좀은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이 접속사 안에는 “~이다”라는 동사를 뒤흔들고 뿌리 뽑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
어디로 가는가? 어디서 출발하는가? 어디를 향해 가려 하는가?
이런 물음은 정말 쓸데없는 물음이다."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서론: 리좀
지난 달 4월 22일은 ‘지구의 날’이었다. 1970년대 미국의 원유 유출 사고를 계기로 지구의 환경 오염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세계의 환경 운동가들이 제정한 지구 환경 보호의 날이다.
최근엔 스마트폰이나 소셜 미디어를 통해 챌린지 형태로 많은 이벤트가 열린다. 소등 행사라거나, 환경 단체에 대한 기부금 챌린지와 같은 것들 말이다. 난 사실 이런 이벤트와 떠들썩한 하루짜리 행사에 좀 냉소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게 정말 도움이 될까?”라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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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간을 디자인하고, 인테리어 현장을 관리하는 일을 한다.
인테리어의 시작은 보통 철거이다. 이전에 공간을 사용하던 사람이 남겨 놓고 간 물건들, 몇 겹이고 덧붙여져 있는 천장, 벽채와 벽지, 때로는 바닥을 파기도 하고 필요에 따라 벽을 부수기도 한다.
그렇게 털어 낸 부분들은 모두 폐기물 처리장으로 보내야 할 쓰레기들이다. 분리수거는 거의 하지 않는다. 털어 낸 것들을 분리하여 배출하는 일은 현장에선 모두 인건비이기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일을 하는 한 친구는 녹색당의 활동가이기도 하다. 며칠 전 오랜만의 술자리에서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철거할 때마다 내가 하는 녹색당 활동이 무슨 의미인가 싶어.”
나도 그렇다. 텀블러를 들고 다니려고 노력하고, 플라스틱 용기를 깨끗이 씻으려고 노력하지만, 내가 하는 일은 몇몇 개인의 노력을 완전히 의미 없게 만들 수 있을 만큼의 쓰레기를 만든다.
비교적 작은 현장을 주로 하는 나는 길을 가다 큰 인테리어 현장이나 아파트 현장을 보며 생각한다.
‘저기서 나오는 쓰레기는…….’
그러니까 나의 냉소적인 태도는 이 문제를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로 규정하면서 만들어진다.
너희가 아무리 해 봐야 나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혹은 내가 아무리 해 봐야 저런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는 자주 이런 생각에 빠진다. 비단 환경 문제만이 아니라 정치나 사회, 문화에 있어서도 그렇다. 심지어 환경 운동에 적극적일 때마저도 그렇다. 작은 실천이 큰 변화를 가져온다는 말에도 그런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개인의 작은 실천과 지구의 큰 변화라는 그 이미지. 그로부터 비롯되는 무력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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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고 말하는 철학자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이다’라고 단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은 언제나 그렇지 않은 면들을 배제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이족 보행하는 동물이다.”라는 앎에는 휠체어를 다리로 가지는 인간이 배제되어 있다. 들뢰즈는 이런 이항 대립적이고 계통화된 앎을 가리켜 ‘수목(樹木)적’이라고 부른다. (뿌리-줄기-가지로 뻗어나가는 나무를 상상해 보자.)
인간의 본질이 있고, 그것에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 더 큰 것과 더 작은 것으로 분류하는 사유의 형식. 이것은 다른 말로 동일성의 체계이다. 다양한 인간을 특정한 인간 모델의 동일한 본질로 수렴하도록 하는 앎의 체계이다.
이와 다른 앎의 형식으로 들뢰즈는 ‘리좀*’을 제시한다. 리좀은 우리말로 하면 잔디나 대나무와 같은 뿌리줄기 식물이다. 그것은 중심이 없이 뻗어나가고, 시작과 끝이 없으며, 인과나 계열화에 갇히지 않는다.
그럼 이때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은 이족 보행한다. 그리고 인간은 휠체어를 탄다. 그리고 인간은 물구나무 서서 걷는다…….”
이와 같이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다’라는 동사로 형성된 앎은 매순간 파괴되고 또 새로이 만들어진다. 리좀적인 앎은 이처럼 반복해서 파괴되는 과정, 옮겨 가는 과정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들뢰즈는 오직 “리좀적인 것만이 생성적”이라고 말한다.
모든 고정된 것들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태도는 때로 냉소적인 것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세상에는 어떤 법이나 규칙도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 그는 진정으로 긍정인 것을 찾기 위해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앎들을 파괴하려는 것이지, 모든 앎을 조각 내고 분산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앎이 늘 허술하게 조각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연결들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리좀은 그렇게 동일화하지 않으면서도 연결하고 접속한다.
* 리좀(rhizome): 리좀은 원래 식물학에서 온 개념으로, 줄기가 뿌리와 비슷하게 땅속으로 뻗어 나가는 뿌리줄기 식물을 포함한 땅속줄기 식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Pierre-Félix Guattari, 1930~1992)는 관계 맺기의 모델로 리좀을 제안했다. 수목이 계통화와 위계화를 통한 이분법적인 대립의 서열적 구조라면, 리좀은 이에 대비되는 내재적·비배척적 관계 구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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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이야기를 주고받은 며칠 뒤 새로운 현장이 시작되었다.
철거가 있는 날은 마음이 무거웠다. 아무리 마음이 무거워도 넉넉하지 않은 예산에 내 돈을 써 가며 분리수거를 챙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불편한 마음에 철거업체 홈페이지에 들어가 쓰레기가 제대로 처리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다였다. 철저히 분리하여 소각한다는 홈페이지 설명보다는 처리장에 가 본 내 경험이 더 크게 다가왔다.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와 그것을 통째로 들어 올리는 크레인의 모습.
철거는 끝났지만 현장에 재활용 비닐 봉지를 가져다 놓았다. 철거가 아니더라도 현장에선 늘 공사를 하며 크고 작은 쓰레기들이 나온다.
현장에서의 분리수거에 익숙지 않은 반장님들께 “이번 현장에선 공사하며 나오는 쓰레기를 분리수거 해 보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처음엔 다들 시큰둥하더니, 일반쓰레기에 섞이는 플라스틱 용기를 꺼내는 내 모습을 보곤 미안했는지, 하나둘 분리수거를 하기 시작했다.
문득 들이닥치는 냉소를 잠시 미루어 본다. 어떤 더 좋은 실천이 있음에도 ‘그나마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본다.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 더 큰 것과 더 작은 것이,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이, 본질적인 것이 없다고 생각해 본다.
먼저 실천하면 뒤이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 행위와 전체의 변화가 동시적으로 일어난다고 상상해 본다.
무력함을 밀어내고, 잠재성을 생각해 본다.
냉소적인 태도로 지구의 날에 소등도, 기부도 하지 않은 내가 한 달이 지나 현장에서 분리수거를 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이게 정말 도움이 될까?”라는 물음은 ―그것이 어떤 일도 하지 않도록 하는 데 기여한다면― 어쩌면 “정말 쓸데없는 물음”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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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론이가 짧은 가출을 했다. 지어진지 오래된 우리집 문은 잘 잠기지 않는다.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그걸 몰랐던 내가 한눈을 파는 새, 어설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열었을까?―.
감사하게도 이웃이 당근마켓 동네 소식란에 메론이 사진을 올리고 잠시 맡아 주어 무사히 데려올 수 있었다. 정말 철렁한 순간이었다.
우린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마다 “메론이는 유기견이라서”, “메론이는 (이른바 3대 지랄견’인) 코카스파니엘이라서”하고 말한다. 그런 분류들은 우리의 편의에 따라 적용된다.
그러나 메론이를 가만 보고 있으면, 사실은 ‘알 수 없음’이다. 메론이는 오직 우리가 맺는 관계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하루에 산책을 세 번씩 나가도, 어떨 때는 방 안에 오줌을 갈긴다. 내 예측은 빗나간다.
그럼에도 수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앎에 기댄 예측과 예상이 우리를 어떤 방식의 실천으로 이끄는 측면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물론 그럴 때마저 중요한 것은 예측대로 되었느냐 되지 않았느냐가 아니다. 그 관계가 항상 변화하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문제 상황들에 직면해 알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그것을 지속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이지 않을까.
글쓴이 김지원(석운동)
‘석운동’이라는 이름의 작업자로, 가구와 공간을 디자인하고 제작합니다. ‘아젠다 2.0’의 공동 편집자를 맡고 있으며, 올해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읽으면서 내 삶과 주변, 세상을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