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 ‘파업’. 이런 단어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것 같다.
나에게도 그랬다. 택배가 늦게 오고, 길이 막히고, 먹고 싶은 것을 못 먹는 일은 소소한 일상에서 큰 불편으로 느껴진다.
‘왜 저래.’
‘꼭 이런 식으로 해야 하는 걸까?’
나의 일상과 그들의 이익이 충돌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어휴, 또 파업이야.’라고 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 달은 조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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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진행 중이던 몇 개의 현장에서 자재가 늦게 도착해 마감이 미뤄지는 일이 생겼다. 화물 연대 파업의 여파였다. 나도 클라이언트도 속이 탔다. 그러나 클라이언트에게 화물연대의 파업 ‘때문’이라는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휴, 또 파업이야’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와 오래된 사이인 화물 기사님이 있다. 일하던 목공소에서 내 사업을 분리 독립시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나에게는 늘 가구의 배송과 설치, 인테리어가 끝날 무렵 생기는 잔잔한 일들이 고민이었다. 혼자 하기에는 애매하고 직원이나 알바를 쓰기에도 시킬 일이 많지 않은 일들. 그런 때에 퀵서비스를 통해 알게 된 기사님이다.
내가 물건을 가져다드리면 언제나 바로 떠나지 않고 서성이면서 잘 되는지 구경하다 공구를 가져다주시기도 하고, 나사를 박아 주시기도 하며 친해졌다. 난 그렇게 도와주시는 것이 감사해서 1, 2만 원씩 더 챙겨드렸고, 기사님은 돈 때문이 아니라 젊은 사람이 뚝딱거리며 일하는 것이 신기하고 재밌어서 좋았다고 했다.
이후론 뭔가 배송하거나 설치할 때 기사님이 있다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 되었고, 무거운 가구를 만들 때도 기사님이 도와주실 것을 염두에 두고 설계하게 되었다.
그런 기사님이 일을 그만두셨다. 일손이 필요한 어느 날 전화를 했더니 작은 사고가 났는데, 더 이상 무서워서 운전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한참 연락이 안 되다가, 카카오톡에 생일이라는 알림이 떠서 전화를 드렸다. 기사님은 ‘부끄러워서 말을 못했는데, 그 후로 리어카를 끈다’고 했다. 사고는 졸음운전 때문이었다고 했다. 혼자 가는 건 괜찮은데, 길에 있는 사람들을 칠 수도 있었다는 것. 만성 졸음운전이라는 것.
기사님은 당신의 나이와 당신의 능력을 탓했다.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체력이 안 좋아서…….”
대형 화물만이 아니라 1톤 트럭에도 ‘안전 운임제*’가 적용되었다면 어땠을까? 컨테이너와 시멘트 화물차만이 아니라 모든 화물차에 그것이 적용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 안전 운임제: 시멘트, 레미콘, 컨테이너 등의 화물차주가 지급받는 최소한의 운임을 공표해 이들의 적정 임금을 보장하도록 하는 제도. 기사의 과로와 과적을 막기 위한다는 취지로 문재인 정부의 주도 하에 2020년 시행되었다. 당시 통과된 개정법은 2022년까지 한시적으로 이 제도를 운용하고, 이후 종료시키는 일몰제를 적용했다. 이에 따라 원래는 2023년 부터는 제도가 없어질 예정이지만, 화물 연대는 제도가 시행될 때부터 일몰제 폐지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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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여행비를 벌어 보겠다며 파리바게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당시 최저 임금으로 계산해 보니 참 순진한 생각이었다. 4,110원 곱하기 8시간 곱하기 20일을 해도 한 달에 70만 원이 안 되는 돈이었다.
그래도 재밌었다. 친절한 사장님을 만났고 재밌는 친구들을 사귀었으며, 학교를 벗어나 사회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당시 사회인이 된 것 같다고 느끼게 한 요소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한 가지가 ‘뒷담화’였는데, 이는 다름 아닌 ‘제빵 기사’에 대한 뒷담화였다. 모두가 유쾌하고 즐거운 파리바게트에서 유일하게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 제빵실이었다. 열악한 근무 환경에서도 친절하고 상냥한 분들도 있었지만, 새벽부터 점심나절까지 빵을 만들고 유유히 퇴근하는 제빵 기사들은 대부분 언제나 좀 지쳐 있고, 짜증이 나 있었다.
가끔 이상하게 밝은 날도 있었는데, ‘본사 실장’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온 날에는 유독 친절한 모습이었다. 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듣기론 점장님이 고용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본사에서 고용하지도 않으면서 어딘가에 고용이 되어 있는데, 관리와 평가는 본사에서 한다는 복잡한 내용이었다.
그 제빵 기사는 ‘본사만 가면……’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불법 파견’이라는 형태의 고용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7년이 지난 2017년이었고, 임종린 지회장을 통해서였다. 어쩌면 짜증 많던 기사님 개인의 문제는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5년이 지나, 그때 그 임종린 지회장이 당시 해결된 줄 알았던 것과 같은 문제를 가지고 또 53일씩 단식을 하고 있다.
12년이 지난 지금, 짜증 많던 기사님은 본사에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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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다양체’라는 개념을 다루는 《천 개의 고원》 2장의 제목이다. 들뢰즈는 이 장에서 프로이트의 환자 중 ‘늑대인간’이라 불려진 한 환자에 대한 꿈의 해석을 환원주의라 비판하고 있다. 다양한 의미, 무수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표상을 하나의 상징으로 축소해 버린다고 말이다. 프로이트는 늑대 인간의 꿈에 등장한 나무 위 일곱 마리 하얀 늑대를 하나의 늑대, 곧 '아버지'라 해석했다.
그러나 들뢰즈는 늑대가 언제나 무리를 이룬다는 점에 주목한다.
"정말이지 늑대가 무리지어 다닌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프로이트만 모를 뿐이다. 삼척동자도 아는 것을 프로이트는 모르고 있다."
- 질 들뢰즈, 《천 개의 고원》, 2장.
들뢰즈에게 모든 것들은 하나가 아닌 다양체다. 어떤 사물 혹은 사건이 단 하나의 이름으로 불릴 때조차 그것이 다양한 사건들과 함께 있고, 수많은 목소리로 우글거린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 들뢰즈에게 해석이란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런 목소리들에 주목하는 것이다.
우린 어떤 때 하나의 이름을 사건들의 우글거림으로 파악하는가? '파업', 혹은 '단식'이라 이름 붙여진 이 사태에서 다른 목소리를 끌어내는가? 그것은 어떤 연상을 필요로 한다. 화물 연대라는 이름에 내가 아는 기사님을, 임종린이라는 이름에 짜증 많던 기사님을 겹쳐 놓는 것이다. 그들이 사는 세상을 내 뒷마당 이야기로 만드는 일.
누군가 나 자신과 관계없는 모든 사건들에 대해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또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부당한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모든 표면적인 현상 뒤에 우글거림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수는 있다. 그런 점에서 늑대가 언제나 무리라는 점에 주목하는 일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사건을 보다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것, 그리고 내가 언제나 어떤 무리라는 것.
‘극적 타결’이라는 속보 이후에도 지난한 과정들은 펼쳐질 것이다. 때론 그러한 극적인 사건 뒤 5년이 지나도 여전히 크고작은 문제들이 잔존할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그 전보다 못한 상황에서, 그 전보다 격렬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 ‘어휴, 또?’라며 우리의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조그만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그들의 졸음운전과 짜증을 일축하는 나날들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이 우글거림을 고작 하나의 이름으로 축소하는 일일 것이다.
글쓴이 김지원(석운동)
‘석운동’이라는 이름의 작업자로, 가구와 공간을 디자인하고 제작합니다. ‘아젠다 2.0’의 공동 편집자를 맡고 있으며, 올해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읽으면서 내 삶과 주변, 세상을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