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문제는 <하나>와 <여럿>의 이원론보다 나을 게 없는 이러한 이원론에 따라 두 유형의 다양체를 (중략) 대립시키는 일이 아니다. 동일한 배치물을 형성하는, 동일한 배치물 속에서 작동하는 다양체들의 다양체만이 있을 뿐이다. 즉 군중 속에 있는 무리와 무리 속에 있는 군중……."
- 질 들뢰즈, 《천 개의 고원》,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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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만에 열린 퀴어 퍼레이드에 참여했다.
사람들로 가득 찬 시청역사 안에선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집회로 인해 역사가 혼잡하오니……. 유인물을 나눠 주는 행위는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광장에 가장 가까운 3번 출구 밑에서부터 사람들은 줄을 지어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나도 그 속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후덥지근한 공기와 함께 찬송가와 구호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나님 아버지! 동성애…… 차별 금지법…… 지옥…… 할렐루야!”
광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나오는 출구가 프라자 호텔 사거리 한 곳이었던 탓에 병목 현상이 생겼다. 반대 집회의 무리는 그 길목에 대고 구호를 외쳤다. 그 덕에 더운 날씨에도 땀 흘리며 반대 집회에 나온 얼굴들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았다. 지난 퍼레이드 때보다 반대 집회 쪽에도 젊은 사람들이 아주 많아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더 많은 젊은 사람들이 광장에 있었다. 잔디밭을 가득 채운 형형색색의 사람들과 깃발들. 조금 울컥했다. 3년은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니고, 이들에겐 더욱 그랬을 것 같아서이다.
응원의 마음과, ‘그래도 이렇게 나왔으니!’라는 기쁜 마음으로 부스를 둘러보았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세심히 살피진 못했지만 정말 많은 팀이 참여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조계종 부스에서 ‘차별없는 세상 우리가 부처님’이라 적힌 연꽃 부채를 받아들고 공연과 연대 발언을 구경했다.
공연과 연대 발언이 끝날 즈음엔 더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있었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기 위해 나간 친구가 광장으로 다시 들어오지 못할 정도였다. 무대 행사가 끝나고 시작되는 행렬에 참가하기 위해 사람들은 서서 차량 소개를 듣고 있었다.
그때 비가 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우산을 펼치고 주변의 우산이 없는 사람들을 씌워 주었다. 나도 개중 하나였다. 우산이 없었고, 밀려드는 인파 속에서 우산을 가진 친구와 멀어졌지만, 사람들은 계속해서 내 머리 위에 우산을 덮어 줬다. 우산이란 물건은 아무래도 한 사람이 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여러 사람이 비 맞는 것을 막아 주기엔 역부족이다. 심지어 우산의 끝이 다른 우산의 밑으로 들어와 오히려 서로 젖도록 했다. 다들 젖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차량이 소개될 때마다 환호를 보냈다. 그 사이에서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연대가 이런 거야! 같이 우산을 쓰는 게 아니라, 같이 비를 맞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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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너무 많이 온 탓에 함께 간 친구들과 퍼레이드 행렬에서 빠져나왔다. 아쉬운 맘에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젖은 옷을 갈아입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며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 중에 퀴어 퍼레이드가 처음이라는 한 친구가 많은 생각이 들었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이렇게 많은 종류의 정체성이 있는지 몰랐고, 젠더나 섹슈얼리티의 차이도 처음 알게 되어서 신기했어. 그런데 좀 고민이었던 것이…….”
친구가 이야기 꺼내길 망설여 다들 편하게 이야기하라고 했다.
“연대 발언이나 행사장 곳곳에서 바깥의 반대 집회를 ‘혐오 세력’이라고 표현하면서, 그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일부는 욕하는 것이 어쩌면 또 다른 혐오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퍼레이드에서 본 ‘사랑이 이긴다’는 문구가 좋았는데, 그럼 이때 사랑이라는 건 뭘까?”
‘사랑이 뭘까?’라는, 간지러운 질문은 잠시 모두를 웃게 했지만, 그 질문이 결코 우리가 사춘기 시절에 던지던 종류의 그것과 같지 않다는 걸 알아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들뢰즈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는 것을 떠올린 건 다음 날 느즈막히 일어나 아직 숙취가 가시기 전이었다. 책을 펴 보았다. 들뢰즈는 개인과 무리, 군중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문득 사랑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는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언제나 군중 속에 있는 한 사람을 포착해 내고 그가 속해 있는 집단에서 그를 가려낸다는 것. 그것이 아무리 작은 집단이더라도, 가족이든 다른 뭐든 간에. 나아가 그 사람에게 고유한 무리들을 찾아내고 그가 자기 안에 가두어 놓고 있는, 아마 완전히 다른 본성을 가졌을 그의 다양체들을 찾아낸다는 것. 그것들을 내 것에 결합시키고 내 것들 속으로 그것들을 관통하게 만들고 또한 그 사람의 것을 관통해 간다는 것.
- 질 들뢰즈, 《천 개의 고원》,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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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것은 다양체로 구성되었다고 말한 들뢰즈는, 다양체를 ‘군중의 다양체’와 ‘무리의 다양체’로 구분하는 듯하다. 군중이란 보다 큰 집단, 다시 말해 단일한 목소리를 내면서 중앙 집권화 및 위계화되어 특정한 목적을 위해 복무하는 집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무리는 작은 집단, 무리 지으면서도 언제나 개별적이고 통일되지 않는, 그럼에도 이 관계성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개별자들의 집단을 말한다. 들뢰즈는 생성과 변화는 언제나 후자에서 벌어지는 운동이며, 전자는 이를 포획해 위계화하고 획일화하려는 운동이라 말한다.
전자에 반대 집회를, 후자에 퀴어 퍼레이드를 대입하던 나는 곧 들뢰즈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는 이내 이것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언제나 임시적인, 잠정적인 구분일 뿐이다. 그것은 언제나 ‘동일한 배치물을 형성’하고, ‘동일한 배치물 속에서 작동’한다고 말이다.
퀴어 퍼레이드 연대 발언 중 ‘한국교회를향한퀴어한질문(Q&A)’ 김유미 활동가는 무대 뒤편에서 들리는 반대 집회 목사님들의 목소리보다 크게 말하기 위해 배에 단단히 힘을 준 채로 연단에 꼿꼿하게 서서 외쳤다.
“개신교인으로서 제가 여러분께 빚진 게 많습니다! 한국 교회가 퀴어 커뮤니티에 저질렀고, 저지르고, 지금도 이 시각 저렇게 북치고, 장구치고, 생난리를 치는데 제가 교회 이름을 달고 나와 무슨 낯짝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싶습니다!”
젊은 교인의 뜻밖의 반성에 많은 이들이 박수를 보냈다.
“저들의 믿음대로라면 가정을 망치고 교회를 망치고 나라를 망하게 할 ‘동성애 쓰나미’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예수는 아마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아멘!”
모두가 환호했다. ‘동성애 쓰나미’! 멋진 표현이다. 기독교인들의 표현처럼 하나님이 우리들 아버지라면, 내가 아는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을 거라는 듯 외치는 그의 모습, 내 믿음은 그런 것이라는 외침이 정말 멋졌다.
그러나 내게 더 감동적이었던 것은 반대 집회의 개신교인들에 그가 느끼는 일종의 책임이었다. 그가 그곳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어느 편’인지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스스로 느끼는 마음의 빚, 그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운 낯짝으로 만드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네 편, 내 편’의 단순해 보이는 경계를 흐트러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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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말처럼 모든 것이 다양체라면, 또 모든 다양체가 그 종류에 상관없이 동일한 배치물을 형성하고 그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라면, 그 자체로 옳거나 그른 어떤 다양체·무리·집단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는 것이, 잠정적 구분 ―큰 것과 작은 것, 위계적인 것과 위계적이지 않은 것, 획일화와 다양화, 반대 집회와 퀴어 퍼레이드― 을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 집회는 군중을 형성하고, 퀴어 퍼레이드는 무리를 이룬다.
물론 이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 역전되기도 하고, 새로운 국면을 맞기도 한다. 네덜란드에선 2001년 이래 동성 결혼 합법화가 당연한 사실이 되었고, 2022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이미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낙태권을 다시 논쟁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군중은 무리를 복속시키고 그 아래로 들어오기를 강요하고, 무리는 그것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친다. 이 도망은 군중에, 그리고 무리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이성애가 정말 자연스러운 것이 맞아?”
“LGBT는 충분히 많은 이름들을 포함하고 있는 걸까? 우리가 혐오 세력이라 부르는 이들을 우리가 혐오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럼으로써 새로운 전술, 새로운 깃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고 탈바꿈과 생성을 이어 가는 것이다.
이 구분이 더 이상 중요해지지 않는 것은, 이 구분에 앞서 우리 모두가 서로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일 것이다. 동일한 배치물이란 그러니까 이 구분들에 앞서 우리 모두가 서로에 연루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비를 맞고 있는 것은 우리만이 아님을 아는 것, 내가 일정 부분 그들임을 인정하는 것, 그들을 관통하게 만들고 또한 그들을 관통해 가고자 하는 것.
아마도 사랑이란 이 거대한 연루의 체계가 변화하고 순환하도록 추동하는 힘일 것이다. 우리 서로가, 또 내가 고정된 나로 머물지 못하도록 하는 힘일 것이다. 써 놓고 보니, 사춘기 시절 내가 찾던 답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사랑 앞에서 아이를 낳는 것만이 생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랑이란 얼마나 편협한가!
글쓴이 김지원(석운동)
‘석운동’이라는 이름의 작업자로, 가구와 공간을 디자인하고 제작합니다. ‘아젠다 2.0’의 공동 편집자를 맡고 있으며, 올해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읽으면서 내 삶과 주변, 세상을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