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된 이후 상담 장면에서 다른 부모를 만나다.
제가 처음으로 놀이치료와 함께 부모상담을 시작한 건, 임상심리전문가 수련 2년차 때부터였습니다. 당시, 발달심리에 대한 지식도 있었고 발달정신병리도에 대한 지식도 있었고, 심리검사는 익숙한 편이었지만, 상담은 초심자라 미숙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아동 내담자와 놀이치료를 진행하면서 부모상담을 함께 진행하는 건 큰 부담이었습니다.
부모상담이 무엇인지, 잠깐 소개를 해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동과 청소년이 학교적응에 문제를 겪거나 또래 관계가 나쁠 때, 노력에 비해 좀처럼 성적이 오르지 않을 때 또는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을 때, 상담소나 병원으로 ‘심리’ 전문가를 찾아 오는 경우가 예전에 비해 많아졌습니다. 아동과 청소년이 심리검사를 진행하고 심리상담을 받을 때, 부모님도 함께 검사를 받고 상담 과정에서 ‘부모상담’을 진행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이렇게, 아동과 청소년이 상담을 받을 때, 부모상담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녀의 회복 또는 성장을 촉진하는 것입니다. ‘부모상담’에서 상담을 받는 분은 ‘부모’이지만, 부모상담의 주인공은 ‘자녀’입니다.
부모상담은, 크게 두 가지의 방식으로 구분되기도 합니다.
부모 교육은 부모로서 부족하거나 문제가 되는 점을 발견하고 교정하고, 더 나은 지식을 전달해드리는 시간으로 채워집니다. 부모 상담은, 부모 교육을 해도 부모님에게서 뚜렷한 진전이 없거나 뚜렷한 개선을 기대하기 어려울 때, 부모님의 힘든 마음을 풀어내서 부모 교육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진행합니다. 다르게 표현해보면, 부모 교육은 ‘부모로서 필요한 지식으로 머리를 채우는 과정’이고, 부모 상담은 ‘부모로 지내기 힘든 마음을 여유 있는 상태로 비워주는 과정’ 정도로 말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교육과 상담의 주체가 되지만, 이 교육과 상담의 직접적인 수혜자는 ‘자녀’가 되는 게 부모 교육, 부모 상담입니다. 이런 이유로, 부모 교육과 부모 상담을 진행하는 상담자는 ‘자녀를 중심으로’ 부모-자녀 관계를 탐색하고, ‘자녀의 입장에서’ 부모님의 문제를 분석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은 부모상담에 참여를 할 때, 자신의 이야기를 하실 수 없습니다.
놀이치료도 처음이고 부모상담도 처음이라, 매 회기 슈퍼비전을 받았고 축어록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슈퍼비전 받는 거 하나 믿고, 매주 더듬더듬 상담을 진행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동과 함께 하는 놀이치료 시간은 점점 편해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모상담은 어려웠습니다. 알고 있는 이론과 심리치료 기법, 슈퍼비전으로 도움을 받아 가며 교육과 상담을 진행해도 변함없이 꼿꼿한 그 어머니가 밉고 답답했습니다. 속으로 ‘아유, 그러니 애가 저렇게 됐지.’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일 년을 지속하고 나니, 부모상담 시간에 썩 좋은 이야기 나누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애 키우는 게 뭔지도 잘 모르는 어린 상담자가 고압적이고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까지 하는데, 부모상담에 꼬박꼬박 참여하려면, 자녀를 생각하고 애쓰는 마음과 노력은 진심이고, 인내심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게 됐습니다. 자녀의 건강과 안녕을 바라는 마음 하나로, 부적절감과 때로는 수모를 견디면서까지 매주, 일 년 넘게 상담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훌륭한 부모라는 걸, 부모상담을 시작하고 일 년이 지나서야 깨닫게 됐습니다. 아이를 위해 나와 아이만 노력하는 게 아니라, 어머님도 열심히 노력하고 계신 거였고, 그걸 제가 몰라봤던 거라 생각하니, 그간 어머니를 답답하고 밉게 여기던 게 참 죄송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이런 저와 불편한 시간을 견뎌주신 어머니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시간 이후로 부모상담에 참여할 때 부담은 줄었고, 어머님을 비로소 존중하면서 더 편한 마음으로 상담에 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름 성장을 이뤘다고 뿌듯해하기도 했고요.
시간이 지나 어느덧 저도 ‘엄마’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현장에서 10년 가까이 공부하면서 이런저런 경험을 쌓아온 터라, 일단 아이를 낳기만 하면 ‘그래도 나 정도면 잘 키우겠지?’, ‘남들도 다 하는데, 뭐.’, ‘그래도 배운 것도 있고 하니까 남들보다 좀 쉬운 면이 있지 않을까?’ 싶은 막연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키우는 건 힘들어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출산을 하고 아이들을 직접 키워보니, 상상 이상으로 육아는 힘들었습니다. 갓난아이 때부터 서너 살 정도 될 때까지는 먹이는 거, 씻기는 거, 입히는 거, 재우는 거, 가르치는 거, 마음 알아주는 거, 혼내는 거 뭐 하나 쉬운 게 없었습니다. 당시는 평생을 살면서 가족들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았던 시절이었지만, 출산 직후부터 아이들 서너 살 될 때까지, 쉬운 날이, 정말 하루도 없었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직접 엄마로 생활을 해보니, 상담을 받으러 왔던 어머니들이 동료로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분들의 결점과 약점, 미숙함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이 유아 시기를 지나니, 아이들과 완전히 밀착해 있어야 하는 시간이 줄긴 줄었습니다. 아이들이 너무 어릴 때는 시간이 없어서 육아서나 육아 관련 방송을 거의 못 봤는데, 여유 시간이 생기니 이전에 배웠던 심리학 이론을 비롯해서 방송이나 여러 미디어, 육아서 같은 데서 제시하는 내용과 엄마로서의 저를 비교해보는 시간이 생겼습니다. 이런 비교 과정에서, 엄마라는 역할 면에서 제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새삼스럽게 느끼게 됐습니다. 저는 엄마로는 정말 별로였던 것 같았습니다.
지치고 지겨워서 다 그만두고 훌쩍 떠나고 싶었던 날에도 애들 밥은 챙겨줬는데, 이런 제가 문제가 있는 엄마로 느껴졌었습니다. 원래 아침이면 세수를 하고 외출할 때는 샤워를 하고, 잠들기 전에는 당연히 양치를 하던 저였는데, 언제인지 기억도 안 때부터 저는 나갈 일이 있으면 야구 모자를 눌러썼고, 양치를 안 하고 그냥 잠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때에도 아이들을 밤낮으로 꼬박꼬박 씻겼고, 로션도 발라줬습니다. 그러고도 아이의 어금니를 덜 닦아 줬던 게, 아이의 종아리 뒤쪽에 로션을 덜 꼼꼼하게 발랐던 게 잠들기 전까지 마음에 남기도 했습니다. 이렇게까지 ‘나라는 사람을 버리고도’ 저는 늘 뭔가가 부족한 엄마라고 느꼈습니다. 아이들이 어지른 장난감을 치우고 먼지와 머리카락이 아이들의 건강에 해가 될까 싶어 아침, 저녁은 물론, 하루 서너 번도 넘게 청소를 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원래 제가 청소를 이틀에 한 번 하던 사람이었던 걸 감안하면, 딴에는 엄청나게 자주 청소를 했던 셈입니다. 하지만 청소를 하면서 툴툴대는 제가, 아이들에게 그만 좀 어지르라고 신경질을 내는 저 스스로가, 엄마로서 아주 별로라고 느껴졌습니다.
저는 엄마 노릇을 하는 동안, 제가 너무 못난 엄마일 뿐만 아니라, 부족하고 심지어 적절하지 못한 엄마라는 생각을 계속했습니다. 그런 만큼, 아이들한테는 정말 잘해주고 싶었고 내 형편에서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걸 해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어떻게든 더 좋은 엄마가 돼 주고 싶었습니다. 특히, 저는 임상심리학으로 오래 일했고, 상담도 검사도 교육도 해오고 있어, 부모-자녀 관계 면에서는 전문가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감정 다루기’나 ‘문제해결’, ‘관계 갈등 다루기’ 쪽으로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은근 자부했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차곡차곡 배운 지식과 경험대로, 짜증이 나더라도 덜 문제적으로 표현하려고 했고, 우리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놀아주고 훈육을 할 때도 아는 대로 적용해보려고 했습니다. 단적으로, 아이의 손톱 물어 뜯는 버릇도 조기에 발견을 했고, 배운 걸 적용해서 효과도 봤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유독 짜증을 참지 못하고 버럭 할 때가 있었고 제가 배운 대로라면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대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저를 스스로 발견할 때마다 자괴감이 컸습니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더 잘해?’ 싶다가도 ‘내가 진짜 부족한가? 나는 엄마답지 못한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면, ‘아닌데. 나는 이미 나의 최선을 넘어서 하고 있는데. 원래 나였다면, 이렇게까지 안 했을 텐데.’싶은 생각도 같이 들어서 혼란스럽기도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저는 몸살이 난 상태에서, 몸살약이랑 진통제를 먹으면서도 애들 밥을 챙겨주고 있었는 데도요.
그래서 어느 순간 아주 억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제가 부모교육을 하고 검사결과 보고서를 쓰고 해석 상담을 하면서,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으로 상담소와 병원을 방문했던 어머니들을 얼마나 모질게 대해왔는지 새삼 반성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부모를 바라보는 관점과 부모를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확실해졌습니다.
‘왜 나는 부모를 그렇게까지 비판적으로 봤지?’
‘왜 그렇게 부모에게 높은 기준을 갖게 됐지?’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이런 질문을 해보고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생각할 때마다, 사실 답은 간단했습니다. 제가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부모에 대해 이렇게 배워왔거든요. 원래 심리상담 분야는 부정적인 심리학(negative psychology)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사람에 대해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 오죽하면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긍정 심리학(positive psychology)이라는 분야가 생겼을 정도입니다. 특히, 심리평가를 위주로 일을 하는 임상심리는 많은 심리학 하위 분야 중에서도 더 부정적이고 더 평가적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리고 임상심리학자입니다.
여담이지만, 임상심리사들은 별다른 문제가 없는 사람의 심리검사 결과를 볼 기회가 의외로 적습니다. 왜냐하면, 정신과 병원이나 심리상담소는 기본적으로 적응에 문제가 있거나 마음이 힘든 분들이 방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심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사람들은 전문가가 있는 현장에 와서 굳이 심리검사를 받지 않습니다. 늘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의 심리검사 결과만 보다 보니, 임상심리사는 진짜로 별다른 문제가 없는 심리검사 결과를 보면, 낯선 결과에 당황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문제가 없을 리가 없다고 가설을 세우고 어떻게든 문제를 찾으려고 하다가,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면 심리평가보고서를 어떻게 기술해야 하나 막막해서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좀 이상하게 보이고 웃길 수도 있는데, 진짜 이렇습니다. 그런데, 사실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부모님들 중에, 검사 결과를 보면 평범하고 건강해 보이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임상심리사들은 이렇게 그럭저럭 잘 지내는 부모에게서 조차 어떻게든 문제를 찾아내려고 하다가, 문제가 발견되지 않으면 높은 또는 이상적인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보고서에 기술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기존의 심리학 이론들이, 따듯해 보여도 사람을 평가하는 시선에는 부정적인 면이 많습니다.
특히 임상심리 쪽이 더 부정적이긴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심리학이 부정적이고, 특히 임상심리 쪽이 더 평가적이고 비판적이긴 해도, 기본적으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는 가르칩니다. 그래서, 저는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대인관계에서 본인을 또는 누군가를 대상화하거나 이상화하거나 역할로만 대하면, 관계 문제가 생기고 심리적인 건강이 나빠질 수 있다고 오래동안 배워왔습니다. 실제로 저와 제 주변 사람들을, 또는 그 누굴 만나더라도 있는 그대로 사람 자체로 보려고 노력해왔고, 상담도 그렇게 하려고 훈련도 해왔습니다.
‘근데, 왜 부모는 역할로만 보려고 하지? 부모도 사람인데?’
‘심리학은, 또는 심리학자들은 부모를 사람으로 보는 건가?’
무슨 맥락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이 들고 나니, 예전에 [위기의 주부들]이라는 미드에서 봤던 대사가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오래전에 본 드라마라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정말 인상적인 대사 한 줄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everyone has dirty laundry.” 직역하면 ‘누구나 더러운 빨랫감을 가지고 있다.’ 정도고, “털어 보면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없다.” 정도로 의역할 수 있을 것 같긴 합니다. 그러니까, 털어서 먼지 안 나올 사람이 없는데, 왜 유독 ‘엄마’라는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은 dirty laundry가 있는 것만으로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거구나 싶은 생각이, 정말 문득 들었습니다. 부모 역할에 대해 너무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게 문제라고는 생각했었는데, 늘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배웠으면서, 정작 자주 만나는 부모에 대해 평가할 때는 ‘역할’로 봤던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한 이후로는, 현장에서 부모님 심리검사를 해석하고 부모상담을 진행할 때 부모도 부모이기 이전에 사람이라는 생각을 늘 염두에 두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 스스로를 볼 때도, ‘부모’ 이기 이전에, 결함과 문제가 있는 사람 자체로 보려고 해도, 엄마 노릇은 계속 힘들었고 엄마로서의 부적절감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아이들 막 태어났을 때 “애 볼래, 밭 갈래? 물어보면 전부 밭을 간다고 한다.”는 속담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고, 이 속담을 처음 들은 이후로 여러 사람으로부터 많이 들었던 걸 보면, 엄마 노릇이 저만 힘든 게 아니라는 게 위로가 되긴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게 힘들기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은 그 자체로도 정말 사랑스러웠고, 아이들의 성장을 옆에서 함께 하는 건 축복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근사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제대로 챙기지도 못한 채로 아이들을 챙겨주다 보니 서러움이 커졌고, 말도 잘 안 통하는 애들하고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대화다운 대화에 목이 말랐습니다. 제가 ‘담화에 대한 욕구’가 이렇게까지 쎈 사람이라구나 라는 걸 아이들을 키우면서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무엇보다 해도 해도 끝이 없고 보람이 느껴지지 않는 지난한 일상을 반복하면서 무력감이 깊어졌고, 스스로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자괴감, 죄책감에 잠식되는 시간이 자주 찾아왔습니다. 건강이 더욱 나빠졌고, 살이 찌고 못생겨지고, 인내심이 줄고 짜증이 폭발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싯타르타가 고행을 하려고 먼 길을 떠났다고 했던가? 왜? 굳이? 그냥 본인의 아이들 중 하나라도 전담으로 키웠으면, 멀리 안 갔어도 고행은 충분히 경험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해볼 정도로, 엄마 노릇은 저에게 ‘고행’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했을 때, ‘주양육자’ 역할을 해본 분들은, 같이 깔깔대고 웃어주셨습니다. 그러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배운 이론들을 만든 그 학자들은 대체 이론을 왜 이런 식으로 만들었지? 잠깐만, 이 사람들, 아이들을 제 손으로 직접 키워보긴 한 걸까?’
‘기라성 같은 그 학자들이 전적으로 육아를 몇 년이라도 해보고 그런 이론들을 만들었을까?’
여기서 전적으로 육아를 했다는 건, 아이 양육의 제 일 책임자를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양육자. 아이가 아플 때, 가장 먼저 달려가야 하는 사람. 아이에 대해 확인해야 할 게 있으면 제일 먼저 질문을 받을 사람이 주양육자 입니다. 그리고 부모라고 해도, 주양육자가 아닌 다른 한쪽은 보조양육자로 명명됩니다. 이런 호칭에 딱히 동의하지 않지만, 현장에서 많이들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아무튼, 기존의 유명한 심리학자들께서 실제로 주양육자가 되어 본 적이 있는지, 확인을 해볼까 하는 고민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잠깐만 생각해도 많은 학자분들은 주양육자가 되어 본 적이 없는 게 맞을 것 같아서, 굳이 찾아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심리학이 태동하던 1800년대 중후반, 기초적인 심리학 이론을 고안했던 심리학자는 대부분 남성이고, 당시는 지금보다도 남녀 역할 불균형이 더 심할 때였습니다. 무엇보다, 고전 심리학의 대부분의 성격발달 이론에서, ‘아빠’는 발달 초기에 부모-자녀 관계의 주요 변인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특히 발달 초기엔 ‘엄마’만 자녀 양육의 주책임자로 등장합니다. ‘아빠’는 아이가 만 삼세 정도 되어야 처음으로 의미 있는 대상으로 등장합니다. 그것도 보조양육자로. ‘아빠’도 양육자로서 엄마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한 건, 정말 최근의 일이기도 하고요.
‘그러네. 내가 배운 부모-자녀 관계 이론이, 주양육자 역할을 해본 적 없는, 옛날 사람들이 만든 이론들이네.’
아주 새삼스런 발견이었습니다. 그 시절 그분들이 육아에 동참했다면, 오랜 시간에 걸쳐서 그런 이론을 만들어 내는 거 자체가 아주 어려웠을 거라고 짐작을 합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없어서요. 아이들을 돌보는 엄마 노릇이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시간 빈곤자(time poor)라는 말이 다 나왔을까요. 지금처럼 온라인이 발달하지 않은 그 시절에 그런 이론들을 집대성하면서 육아를 병행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유명한 심리학자 중에는 아이들을 직접 키운 분들도 몇몇 계시긴 합니다. 위니캇, 멜라니 클라인 정도로 기억을 합니다(이건 나중에 다시 확인을 할 예정입니다). 그래서 대상관계 이론은, 부모-자녀 관계를 설명하는 이론 중에서도 밀도가 굉장히 높은 편입니다. 대상관계 이론에서 나온 개념들은 심리치료 과정에서 ‘관계 갈등’을 다룰 때 아주 유용합니다. 그리고 이 이론에서 나온 표현 중에 ‘good enough mother’라는 개념이 있고, "그만하면 괜찮은 엄마"라고 번역을 합니다. 엄마로서 그만하면 괜찮다고 잔잔하게 위로를 하는 표현입니다. 엄마가 완벽할 수 없고, 완전할 수 없다고 알아주는 것 같지만, 부모이기 이전에 '사람'이라서, 부족한 게 당연하다는 관점은 아닙니다. 그리고 부모-자녀 관계를 설명하는 이론 중에 또 사례 개념화 할 때 많이 쓰는 게 애착이론 입니다. 여기서 애착도 ‘엄마-아이’의 애착을 주로 다룹니다. 고전적인 심리-성격 발달이론들을 보면, 부모가 자녀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해주는 이론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전에 만들어진 발달 관련 이론들 중에서도 유독 다른 발달 이론과 결이 다른 이론이 있습니다. 장 삐아제의 인지 발달 이론입니다. 이 이론에는 아이의 인지발달과 성격발달에서 엄마의 역할이 그다지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습니다. 대상 영속성이라는 개념을 소개할 때, 엄마는 까꿍놀이 대상으로 등장합니다. 이 인지발달 이론을 주창한 장 삐아제는 세 딸을 직접 키우면서 이론을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참고로 장 삐아제는 아빠입니다. 저도 자녀들을 직접 키우고 관찰하면서 이론을 만들었다기에 엄마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빠였습니다. 편견이 참 무섭지요.
‘흠. 뭐지? 내가 애를 직접 키워본 적도 없는 사람이 주장했던 이론들을 이렇게까지 신봉할 필요가 있나?’
깊은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저는 중학교 3학년 때 심리학을 전공하겠다고 정했고, 당연한 듯 심리학을 전공했고, 별 고민 없이 대학원에서 임상심리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임상심리전문가 수련을 하고 나름 정석적인 코스를 밟아온 사람입니다. 딱히 종교도 없는 저에게 심리학 이론들은 어떤 면으로는 종교 같았습니다. 그런데 자녀 양육을 오롯히 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만든 이론을, 이렇게까지 신봉하고 있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약간 배신감 같은 걸 느꼈습니다. 사실, 심리학은 종교가 아니고, 애초에 맹신할 필요가 없었던 거였습니다.
여전히 대중에게 유명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전설적인 (옛날) 이론입니다. 정신분석 이론은, 여전히 현장에서는 유용한 심리치료 기법으로 활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 이론이 1890년 당시엔 과학으로 출발을 했으나, 학계에서 꾸준히 다양한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 영감을 제공하는 문학으로서는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 정신분석의 이론 중에 '무의식적 실수'라는 게 있습니다. 직면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피하기 위해, 또는 누군가를 우회적으로 골탕 먹이려고 자기도 모르게, 의도치 않게 실수를 하는 겁니다. 넘어지고 늦잠을 자고, 물건을 떨어뜨리고.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피해 다니는 모서리에 매번 부딪치고 넘어지고 물건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그릇을 깨기도 합니다. 정말, 병적으로 부주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의식이고 나발이고, 기능적으로 모서리를 인식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고, 지금은 이걸 ADHD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현재 심리학에서는 저 정도의 부주의는 방어기제나 무의식적 실수가 아니라, 인지기능 상의 문제로 봐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심리치료로 저 문제를 고칠 수 없고, 약을 먹거나 인지 훈련이 효과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골탕 먹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실수를 반복한다니, 너무 매력적인 해석 아닙니까?
그리고, 척박한 환경에서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이 만약 주관적으로 딱히 고통이나 불편감이 크지 않다고 하는 경우, 정신분석적 관점에서는 '방어기제' 때문이라고 설명하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자신의 심리적인 고통에 직면하지 못 하고, 심리적인 고통을 못 느끼거나 진짜로 없는 척 한다고 해석합니다. 실제로 이런 경향을 보이는 분들이 있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감정을 경험하는 종류, 감도, 빈도, 양이 다르다고 합니다. 유난히 민감한 사람이 있는 반면, 남달리 감정적으로 무디고 스트레스에 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방어기제를 써서 무뎌진 게 아니고, 방어기제를 써야 할 만큼의 부정적인 감정 자체를 느끼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방어기제와 관련된 이론은 여전히 매우 유용합니다. 정신분석을 비롯한, 전통적인 심리학 이론들 중에서, 현재에도 여전히 유용하게 활용되는 개념들도 많이 있습니다. 연구 기법들이 발전하면서 과거 심리학 이론 중에서 '틀린 점'이 발견되고 있기도 합니다. 학문이 발전하는 초창기에 만들어진 이론은 완성도가 낮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대가 지나면서 발전된 연구 기법들로 과거 이론들의 부족한 점들이 보완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구구절절 언급한 내용을 정리하면, 아무리 훌륭한 이론이라고 해도, 육아를 전담하지 않았던 사람이 '부모-자녀' 관계에 대해 언급한 내용에 대해서는, 이제는 예전처럼 맹신하지는 않으려 한다는 겁니다. 다만, 상담할 때 도움이 되는 기법들을 골라서 잘 써보려고는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