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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수레 Jul 08. 2021

자식의 최애에 대한 예의

 나는 좋아하는 것이 많았다. 책을 좋아했고 잔잔한 음악을 좋아했다. 친구들이 H.O.T노래를 들을 때 박정현, 이소라 노래를 찾아 듣던 애 늙은이 녀석이 바로 나였다. 매일 테이프를 넣어 작은 카세트에서 나오는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17평 아파트에서 가장 작은 방, 책상 구석에 앉아있다는 현실을 잠시 잊곤 했다. 국민학교 5학년 여름,  사촌오빠가 귀에 꽂아준 이어폰으로 음악을 처음 듣던 날, 아직도 내 인생에 몇 안되는 센세이션 한 순간으로 기억한다. 세상에 음악과 나뿐인 순간을 얼마나 바래왔던가.. 워크맨에 딸려오는 작은 이어폰 두개에 나의 세상은 다시 열린 듯 했다. 


 테이프를 사모으던 90년대를 지나 밀레니엄을 맞이하면서 나라는 사람에게 또 작은 욕심이 생겼다. CD가 비싸다 한들 테이프처럼 늘어나지도, 감지 않아도 된다는데 그 CD를 언제나 들을 수 있는 CD플레이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작은 욕심을 수십번, 수백번 되새김질 하다 엄마에게 조심스레 말했던 그 저녁이 생각난다. 


"나한테 그런 부탁 좀 하지마라" 


 회사일과 가사노동에 시달리며 감정이라고는 한 줌도 남아 있지 않던 엄마의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이야 엄마가 어떤 상태였을지, 자식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위해 얼마나 고민하다 한 말인지 모를만도 하다고 이해하지만 그 당시 나는 그걸 이해 하기엔 너무 어렸고 이미 받은 상처가 너무 컸다. 부모님에게 단 한번도 걱정끼치지 않고 학교 잘 다니고, 뭘 자주 사달라고 한 적도 없었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악을 더 잘 듣고 싶어서 CD플레이어를 사달라고 한 것이 그렇게 엄마를 힘들게 한 일이었을까? 라고 그저 내 자신을 검열했을 뿐이다. 


 결국 CD플레이어는 어떻게 어떻게 여러 단계를 거쳐 내 손에 들어오긴 했다. 그 당시 돈으로 9만원, 생각해보면 아빠의 월급은 모조리 17평 주공아파트를 매매하느라 낸 대출을 갚았을테고 많지 않은 엄마 월급으로 네가족이 꾸역꾸역 살았을텐데 내 요구가 부담스러울만도 했을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엄마는 평생을 쉬지않고 맞벌이를 했지만 이혼 할 당시에 아빠에게 재산에 기여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원망을 수도 없이 들었다고 한다. 대출을 갚은 돈은 재산에 기여한 게 맞지만 생활비로 쓴 돈은 번것도 기여한 것도 아니라는 아빠의 논리는 결혼을 하고 전업주부가 되어보니 이제야 얼마나 이기적인 논리인지 알게 되었다. 


  눈물과 자기검열로 얻어낸 CD플레이어로 열심히 노래를 듣다보니 나에겐 가장 좋아하는 가수가 생기기도 했다. 한달 3만원의 용돈 중 만오천원을 쪼개 앨범을 사고 시간맞춰 라디오를 듣고, 스케줄을 찾아가며 텔레비젼을 챙겨보았다. 그러다 생전 처음 콘서트라는 것을 가보고 싶다는 마음에 CD플레이어를 사달라고 말하던 그 때의 그 기분으로 한달간 고민하다 아빠에게 콘서트를 가면 안되겠냐고 말을 꺼냈다. 


"너는 참 철이 없다, 그까짓게 뭐라고 지금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냐?"


 내가 왜 그곳에 가고 싶고, 그 가수가 언제부터 나에게 영향을 주었는지, 내가 그곳에 다녀와서 어떤 좋은 방향으로 바뀔지 .. 그런 것은 아빠의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원래도 견고하지 못했던 부모사이에 점점 더 눈에 띄게 균열이 생기는데 자식이라는 너는 그딴 소리나 하고 있냐는 퉁박뿐이었다. 나는 그래봤자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부모님은 열세살부터 열 여덟살이 될때까지 매일 소리지르고 싸웠지만 우리에게 어떤 사과도, 이유도 말해주지 않았다. 부모님에게 그 배경을 못듣는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 우리가 그 배경에 눈치없이 구는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 된 것이다. 


 아무튼 그 날 이후로 나는 부모에게 무엇인가를 바라는 게 있어도 시원하게 말하지 않는 자식이 되었다. 그것이 없으면 학교생활이 힘들어 지거나, 내가 크게 곤란해지지 않는 한 요구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부모의 잦은 다툼 - 별거에 가까운 상황 - 결국 이혼까지 이어지면서 내가 무언가를 요구할 만한 상황이 되지 않기도 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오빠와 내가 대학생이 되어서야 이혼을 하게 된 것이 말이다. 엄마는 우리를 위해 대학 졸업까지 억지로 참았다고 했는데 지금에서야 그 말이 이해가 간다. 스무살이 되면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고난을 헤쳐나갈 강인한 멘탈이 생기는 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엄마랑 살래? 아빠랑 살래? 라는 질문을 받지 않아도 되는 나이였다. 또  기숙사나 자취방에서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명절이고 방학이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핑계가 생기는 마법의 나이였으니 어쩌면 엄마가 우릴 위해 억지로 참은게 맞는 것도 같았다. 


원하는 게 있어도 누군가, 특히 부모에게 말할 줄 모르고 스스로 해결해나가는 나는 , 생각보다 괜찮게 자랐다. 스무살 부터 결혼하게 된 서른살까지 한번도 살아보지 않던 서울 하늘아래에서 이 집 저 집 옮겨다니며 이사를 열번가까이 했지만 뭐 그것도 할만 했다.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의 집을 고르거나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바퀴벌레가 안나올만한 집을 구하기엔 가진 돈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걸 잠정적 내 보호자인 아빠에게 말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 못했던 것 처럼 내가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것에 대한 이해도 딱히 있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돈이 필요하다면 줄 사람이었다. 하지만 돈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이해시키기 보단 돈을 주게 된 아빠가 어떤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지, 나에게 어떤 식의 효심을 원하는 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예의가 없던 아빠에게 나또한 아빠의 최애에 대한 예의를 보여주기 싫었다. 


좋아하던 것이 많았던 나는 "최애"에 대한 이해를 받지 못하던 20년을 지나오며 이제는 싫어하는 것이 더 많은 사람이 되었다. 여전히 노래 듣는 것을 좋아하고 가슴 두근거리는 공연장을 좋아하지만 그것을 이해받지 못하던 시절의 아픔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자식의 최애에 대한 예의가 없던 나의 부모는 나의 뇌구조 마져 교묘하게 바꾸어 놓았다.


아무 음식이나 맛있게 잘 먹던 나는 20년간 입맛 까다로운 아빠의 밥투정을 들으며 소금은 백해무익하다라는 주장을 믿는 까다로운 사람이 되었다. 가끔은 쩌렁쩌렁 울리던 음악의 자유로움을 좋아하던 나는 이제 크게 음악을 듣는 사람을 미간 찌푸리며 보는 꼬장꼬장한 사람이 되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써내려가던 손일기장의 가치를 가장 크게 생각하던 나는 이제 모두 다 지나면 그만인데 일기가 무슨 소용이야 라고 말하는 무미건조한 사람이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예의를 지켜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지금보다 좋아하는 것이 많던 그때의 나로 한결 같이 살아갈 수 있었을까? 자식이 어떤 것을 왜 좋아하는지, 그래서 부모인 나에게 어떤 것을 무엇때문에 부탁하고 요구하는지 한번 쯤 더 생각해주는 배려를 받았다면 나는 지금과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항상 신중하며 고민많은 다섯살 딸아이가 한참을 망설이며 무언가를 고를때 나는 생각한다. 이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아이의 "최애"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야 내가 좋아하는 지금 저 모습대로 자랄 수 있을거라고. 


잊지말자. 자식의 최애에 대한 예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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