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년 5월 13 - 14일
5/13 22:00 신도림
5/14 03:15 하늘재
04:05 포암산 1.35km
05:10 만수봉 갈림길 2.82km
05:55 (-938)-884봉
06:55 (-897-809-844-) 838 꼭두바위봉 아침식사(20분)
07:50 1032봉
08:45 버리기재 7.6km
09:15 대미산 (15분 휴식) 1.35km
09:50 문수봉 갈림길
11:00 (-826-920- 981-) 923봉
12:00 차갓재 5.9km
12:30 안생달 2.4km
총 9시간 15분 21.42km
5월 13일_토_22:00
지난 주와는 달리 주말의 날씨가 매우 좋으리라는 예보에 배낭을 가볍게 하고 물만 많이 준비한다. 그동안 4주 연속의 산행 덕분에 업무가 다소 밀려 토요일 오전 한나절을 PC와 씨름하고 나니 밀린 숙제를 끝낸 기분이다. 외출 나온 배소위는 얼굴 보기 힘들겠다. 다음 주 유격 훈련을 무사히 끝내고 훌륭한 초급장교로 군생활을 시작하기 바란다. 지난 조령산 구간을 이어 포암산을 함께하는 26산케의 장포드에게 건네줄 캔 막걸리를 신문지에 싸는 마음이 즐겁다. 지금쯤 금강산 팀들은 환상의 부부파티를 북쪽 동해안 자락에서 펼치고 있겠지...
시간에 맞추어 신도림역에 집결한 자유인 대간꾼들의 표정이 매우 밝다. 지난주 2박 3일의 악천후에도 큰 사고 없이 잘 걸어온 동지들.. 오늘따라 그리 짧지도 않은 구간을 가볍게 여기는 듯, 버스 가득 채우는 출석률에 새로운 얼굴들도 보이니, 부디 진부령까지 건강하고 즐거운 맘으로 가득가득 이어지는 행렬이 되기를...
용인 휴게소에서 밤늦은 시간에 사랑하는 가족들의 배웅으로 산행버스와 조우하는 동지를 맞이하며 가슴 뭉클한 가족애를 느낀다. 우리의 대간길에는 늘 이렇게 사랑하는 주변들의 애정이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그 길이 집안 살림에 큰 도움이 될지 어떨지는 모르나, 분명 이 걸음들은 우리네 삶의 중요한 발자취로 남아 지나오고 나아갈 길에 큰 교훈으로 살아 있을 것이다. 시원스레 달리는 중부내륙을 거쳐 문경 땅 하늘재에 닻을 내리니, 鷄立嶺 유허비가 손님들을 맞아 조용히 신라의 영혼들을 불러 모으고 관음에서 미륵으로 넘어가는 祭를 준비한다.
5월 14일_일_03:15
미륵사로 넘어가는 마지막 포장길인 하늘재 넓은 공터에서 힘찬 화이팅으로 4주간 연속 산행의 마지막 구간을 다짐하는 자유인의 기상이 상큼하게 퍼져가는 5월의 새벽이다. 서울에서 따라내려온 보름달은 산중 안갯속으로 이불을 덮고 얼굴을 내밀 생각을 않는다. 초여름의 더위를 생각하여 미리 외투를 벗은 채 들머리에 서 있는 몸이, 워밍업을 기다리며 으시시함을 느낀다. 오름길을 재촉하여 비교적 잘 정비된 하늘샘까지의 산행로를 밟아 든다. 곧이어 나타나는 교통호의 건너 뜀을 언짢아하며, 포암산 정상을 향한 된오름에 맞닥뜨린다.
지난 구간 탄항산 내림길에서 조망했던 布巖山의, 베를 늘어놓은 듯한 직벽 슬랩을 어둠 속에서 상상하며 조심스레 그 서쪽을 우회하여 올라가니, 날카로움을 간직한 크랙들이 밑바닥을 바쳐주어 다행히 미끄럽지는 않으나 급경사 오름길에 숨이 거칠다. 좌우의 검은 직벽 낭떠러지가 어둠 속에서 헤드랜턴의 불빛을 삼키니 오직 발 닿는 마루금이 내딛고 나아갈 한 길이다.
짧은 줄잡이와 완만한 슬랩을 밟아 올라 50여 분 만에 포암산 정상에 올라서니(04:05) 워밍업으로 흘린 땀이 꽤 세찬 바람에 이내 식어버리고 아직은 5월 훈풍을 기대하긴 어려운 새벽이라, 바람막이 옷을 꺼내 입는다. 마골산(麻骨山, 지릅산-껍질 벗긴 삼대, 베바우산) 왼쪽으로 길을 잡아 내려서니 암릉 계단길이 어둠 속에서 매우 조심스러운 행보를 요구하며 관음재를 지나 만수봉 갈림길까지 이어진다.
5월 14일_일_05:10
만수봉 갈림길을 지나 월악영봉으로 향하는 월악공룡능선을 이별하고 백두대간길을 향해 남동쪽으로 크게 돌아 오른다. 동쪽 문수봉 쪽에서 여명이 움트는 가운데 938봉을 완만히 지나면서, 멀리 1032봉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마루금을 밟아 나간다. 작은 봉우리들을 차례로 지나는 동안 이미 왼쪽 어깨 위로 해가 비추이고 수많은 산 새들의 울음소리가 신선한 아침을 퍼뜨린다. 햇살에 비추이는 연분홍 산철쭉의 고운 자태가 부드러운 여인네의 잠옷입은 새벽 침실을 열어준다. 풍한을 견뎌낸 숲 속의 아름다움이란...
809봉을 지나 짧은 로프들을 의지하며 심심치 않은 오르내림을 거치면서 844봉을 지나고 꼭두바위봉(838, 06:55)에 이르러 허기진 배를 채우며 아침 식사를 즐긴다. 신문지에 싼 캔 막걸리가 아직도 시원할 정도로 봄날의 산중 바람이 차갑게 느껴진다. 북쪽 용하계곡쯤에서 올라오는 봄기운이 아직은 꾀꼬리봉에 막혀 이곳 산정까지는 넘질 못하는 모양이다. 후미조를 기다린 후 체온이 급격히 떨어짐을 느껴, 오래 쉬질 못하고 먼저 일어나 1032봉을 향한 긴 오름길에 나선다. (07:15)
30여분의 긴 오름길에서 식후의 부담감도 잊은 채 쉴 틈 없는 양팔 스틱으로 고도를 높여가, 바위 너덜지대를 통과하여 오른쪽으로 감아도니, 훤한 시야의 1032봉(벼락바위봉)에 이르러 탁 트인 조망 속에 멀리 대미산을 맞이한다. 오른쪽 갈평리를 건너 멀리 주흘영봉이 우람한 능선을 솟구치며 남으로 문경땅을 감싸 안은 채 九峰山山의 連峰으로 밀려온다. 夏道長成이라 했던가.. 여름으로 열려가는 산들이 무럭무럭 자라나며 지난겨울 산의 움츠림과 황량함을 잊게 한다. (07:50)
5월 14일_일_08:45
1032봉을 지나 부리기재까지의 호젓한 트래킹 속에서 동행한 26산케의 장포드와 지나온 삶을 되새겨 본다. 숱한 해외 생활과 건설 현장에서의 추억담들.. 안경을 스치는 포크레인의 추락장면에서는 직접 보여주는 안경 속의 미세한 스크래치가 간담을 서늘케 한다. 지칠 줄 모르는 삶의 현장에서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질 50대를 맞이하며, IMF 이후의 구조조정이라는 또 한 번의 긴장 속에서 남겨 두었던 마지막 뇌를 혹사하여, 소방, 기계 기술사로 우뚝 솟아나는 저력을 보여준 장포드에게 경외감을 느낀다. 그렇다, 우린 결코 쉽게 쓰러질 그런 삶을 살아오지도 않았고, 나아갈 우리의 먼바다에는 또 다른 풍랑이 일지라도 멈추지 않는 발길로 生을 즐기리라...
지난주 흠뻑 비를 맞은 5월의 신록이 더없이 싱그러운 아침이다. 투명한 綠葉속에서 우러나는 綠香을 마시며, 갈참 나무숲으로 뒤덮인 능선길에서 마주하는 대미산의 우람함을 담을 수 없는 아쉬움 속에서 부리기재로 향하는 발걸음은 점점 느려진다.
석양이 저물고 금세 어두워진 타쉬겐트의 카페테라스에서, 희미한 가로등의 조명이 길게 뻗은 알마타 쪽 거리로 시선을 머물게 한다. 서빙을 돕던 러시아계 젊은 미녀가 우리들의 한국어에 익숙지 않은 듯, 곧 고려인 여성 한 명을 데려온다. 1990년대 이후부터 우리나라 국어학계에서 해외 동포들의 국어교육에 많은 교류를 하고는 있으나, 오랜 기간 동안 북쪽의 말투를 배워 온 러시아 지역 한인들의 발음은 아직도 상당히 함경도 어투가 묻어난다.
4.19 학생 혁명이 가져다준 역사적 의의가 단지 한 독재자의 퇴출로서 끝날 수는 없을 것이며,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각계각층의 봇물 같은, 자유를 위한 명분으로 내세우는 그들의 민주주의는 과연 어떠한 형태의 민중을 형성하고 만인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 K노인의 양미간이 좁아지며 길게 한숨 섞인 담배 연기가 흘러나온다.
“온통 거리 천지가 데모라는 명칭으로 폭력을 스스럼없이 정당화시키고 있었으니, 도회지는 말할 것도 없고, 시골 곳곳에서도 민주당원들에 의해 가해지는 자유당원들에 대한 린치를 경찰로서도 대책을 세울 수 없을 정도였으니... 그 틈에... “
휴전선을 넘나드는 북측의 공작원들의 수도 무수히 많아진 시기였다. 전쟁 후 강화된 반공교육 덕분으로 남한 사회의 북한 공작원에 대한 적개심은 가장 최고조에 달했으나, 일부 지식인들의 통일을 위한 공감대 형성을 틈타 북한은 소위 지식인 포섭공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소위 주민조직의 투쟁집단을 형성하려던 전쟁 전의 전략에서, 대중을 이끌어 나갈 혁명 전위대 형성의 전략을 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각급 학교의 수업거부사태, 심지어 국민학교에 까지 번진 집단 시험거부 사태등은 이 땅의 초기 민주주의 교육의 경험이 일천한 상태에서 엄청난 혼란을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과연 가난한 나라의 배고픔이 자유의 범위를 확대시킨 후 욕구충족의 만족을 가져와 성공적인 혁명의 완수로 이어질 것인가... 누군가에 의해서 잘 이끌어져 나갈 사회가 계획된 정책에 의해서 지금보다 나은 자유를 가져다줄 것인가.. 또 다른 반혁명의 세력은 잠재하지 않는가..
1960년의 겨울은 그렇게 뜨거운 열기를 형성하며 민주와 자유를 부르짖는 혁명주의자들에 의해서 과도적인 폭력과 독재를 또 한 번 경험해야 했고, 과연 그들의 해방이라는 혁명이 완수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자유가 억압당할 것인가.. 과연 만인의 자유라는 도덕적인 가치를 지닌 혁명이 이 땅에 실현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투쟁과 상대적인 부자유를 참아나가야 할 것인가... K노인의 그해 겨울은 무척 시리고 역사해석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5월 14일_일_08:45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며 여늬때와는 달리 힘들지 않게 내리막 경사를 밟아 내린 부리기재에서 예쁜 발목 보호대를 벗고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고마운 발을 들여다본다. 전날 출발하면서 건네받은 고마운 동지의 초록색 따뜻한 정성이 발목을 감싼 채 가슴까지 올라온다. 속리산을 지난 후 한 달 동안 험하고 험한 암릉들을 따라붙으면서 잘 낫지 않고 괴롭히던 통증들이, 이젠 포암산을 지나면서 부드러워지는 마루금만큼이나 사라지고 가벼운 맘으로 중간점을 향해 걸어갈 수 있음에 매우 기쁘다.
버리기재라고도 불리우는 이 고개에도 벌목처럼 낮아진 고갯길 좌우로 희미한 길자욱만 남긴 채 벌소리도 윙윙거리지 않는 한적함만 묻어난다. 후미조를 기다리며 잠시 휴식한 후 마지막 큰 오름인 대미산 정상을 향해 비교적 완만한 오름길을 이어간다. 길 양편에 지천으로 늘린 취나물과 더덕 냄새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개망초꽃 한 송이가 아담하게 어울린다. 속진(俗塵)의 때를 벗어나는 구도자의 걸음으로 우리는 이렇게 2000리 대간길에서, 작은 생명의 경이로움을 배우고 내 고귀한 삶을 후회 없는 한 生厓로 마무리하는 날까지 더 높은 곳을 향하리라...
5월 14일_일_09:15
30분 남짓 단숨에 스틱을 지쳐 올라온 대미산(大美山) 정상에서 모처럼 봄날의 햇살을 느끼며 긴 휴식을 갖는다. 멀리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운달산(1097), 북쪽의 문수봉(1161), 동남쪽의 옥녀봉이 한눈에 들어오며 시원한 조망이다. 단지 흔한 소나무 한 그루 없이 제멋대로 드러누운 갈대 잎들이 황량함을 더해줌이 아쉽고 한 여름엔 오래 머물기엔 적당치 않을 것 같다. 점점 멀어지는 후미조를 기다리지 못하고 앞서 출발하기로 한다. 오른쪽 여우목고개로의 하산길을 버리고 북쪽으로 90도 꺾어 문수봉 쪽으로 내려서니 오른쪽 70m 아래쪽에 눈물샘 표지가 보인다. 대미산(黛眉山-검푸른 눈썹산)이라 했던가..(聞慶縣誌)
5월 14일_일_09:50
대미산 정상에서 20여분 내려 밟기를 한 후에 1051 고지에서 문수봉으로 향하는 북쪽길을 버리고 90도 꺾어 다시금 동쪽으로 향하는 헬기장을 지난다. 문수봉 쪽으로 매달린 리본들을 제거하고 대간 리본의 방향 지시 도움을 절감하며, 무심코 매달은 잘못된 표지가 얼마나 많은 산행객들을 괴롭힐지 조심스러워야겠다. 이후 꽤 가파른 내림길을 지쳐 내려와 새목재를 지나고 826봉 헬기장을 만난다. 보라색 꿀풀꽃(夏枯草)이 소담스레 피어있다.
920봉을 지나 급경사 981봉을 힘겹게 올라선 후 내림길에 잘 가꾸어진 갈참나무 숲에서 후손을 위한 나무 심기 사업에 대한 구상도 나눠 본다. 신록의 삼림욕을 맘껏 즐기며 차갓재로 향하는 발걸음을 아끼고 있을 때 어느새 마지막 923봉을 지나며 오른쪽 안생달 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저 조용하고 작은 산골 안마을에 다가서는 문명의 영혼들은 어떤 사연들을 뿌리며 이 고갯길로 올라설 것인가..(11:00)
“형님.. 이젠 우리는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에 다다랐습니다.. 자유는 가만히 앉아서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투쟁에 나서야 합니다.. 비록 해방전쟁이 휴전으로 멈추어진 것 같지만.. 아닙니다.. 새로운 방법으로 끊임없는 투쟁의 길로 나서야만 형님의 억울한 한도 풀리고 평생에 자유라는 것 누려보고 죽어야 되질 않겠습니까... “
도무지 귀에 들리지 않는 그의 설득에 간간히 새겨지는 말들.. 자유.. 투쟁.. 한.. 해방.. 과연 20세기 이후에 그들이 말하는 혁명이란 19세기의 영국, 프랑스 시민혁명과도 맥을 같이 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그들이 정당화시키는 폭력은 과도적인 것으로 끝이 나고, 전쟁 자체를 혁명적 가치로 인식하지는 않는 것일까.. 남북을 통틀어 수없이 희생된 이 땅의 영혼들의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그 가치를 높여 위로할 것인가...
“학교로 돌아가십시오.. 저 엉터리 같은 자유주의자들, 회색분자인 정치꾼들과 무슨 혁명을 하시겠습니까.. 오직 투쟁적이고 승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젊은이들이 우리들의 동지입니다. 저들 노회 한 소위 독립군 세대들과 결별하십시오.. 이젠 방관자로, 탁상공론이나 벌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 말엔 그도 옳다고 여겨졌다. K노인 자신이 이젠 유림 선생의 그늘에서 벗어나 뭔가 새로운 돌파구로 이듬해 봄쯤엔 학교를 택하여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단지 그가 바라는 학교는 시골 국민학교 정도의 정치와는 거리가 먼 농민운동 정도를 꿈꾸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의 직업적인 교사생활의 길이 열리기엔 현실적인 여건이 너무도 막힌 상황인지라 몇몇 사범학교 동창이나 정치권에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과연 상아탑의 꿈을 키우는 젊은 학생들에게 무슨 혁명의 극약 처방으로 그들을 선동하여 이 땅의 진정한 자유를 위해 희생을 강요할 수 있을 것인가.. 단순히 의분의 감정만으로 가난, 독재, 실망, 그리고 자유롭지 못한 정치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영원한 투쟁의 길로 젊은이들을 몰아가서 대체 어떤 새로운 희망을 맛볼 것인가.. 고개를 저었다.
5월 14일_일_12:00
923봉을 지난 후 완만한 내림길을 여유롭게 밟아 내리니 송전탑아래에 구간 하산점을 알리는 표지리본이 요란하다. 이쯤에서 지친 종주자들이 몇 걸음을 참지 못하고 생달리 하산길을 서둘렀음을 보여준다. 작년 황장산행 때 눈여겨보아 두었던 차갓재가 분명 아니다. 5분 정도 오름을 넘어서니 눈에 익은 백두대간 중간점 표지석이 보이는 차갓재에 다다른다. 작년과는 달리 키 큰 장승(백두대장군, 지리여장군)이 표지석 양 켠에 지켜서고 댕기줄에 매달린 대간인들의 기념 리본이 사랑스럽다.
"통일이여 통일이여!
민족의 가슴을 멍들게 한
철조망이 걷히고
막혔던 혈관을 뚫고
끓는 피가 함께 흐르는 날
대간길 마루금에 흩날리는
풋풋한 풀꽃내음을 맘껏 호흡하며
물안개 피는 북녘땅 삼재령에서
다시 한번 힘찬 발걸음 내딛는
니 모습이 보고 싶다."
(표지석 뒷면에 새긴 詩)
(註:삼재령:진부령-향로봉-고성재 다음에 북한 땅 첫 대간 고갯길)
안산다리(안생달) 마을 양조장 문 열어 놓은 평상에 앉아, 복분자 더덕술에 야생화님이 마련한 두루치기를 곰취 향내로 쌈을 싸니 대간 길 지친 피로가 황장산으로 오르더라...
2006.5.15 스승의 날에
배 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