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년 7월 15 - 17일
7/15 22:00 신도림 출발
7/16 03:30 도래기재 출발
820-1049-1258봉
06:00 구룡산(1345) 5.46km
고직령-1231봉
07:00 곰넘이재(실두재)-1184봉
08:00 신선봉(1280) 4.96km
09:00 차돌베기(1141)-각화산갈림길
(아침식사 15분)
10:20 깃대배기봉(1341) 5.35km
1356 안부-1461봉
11:20 부서봉(1546.5)
12:00 태백산(1560.6) 장군봉 3.93km
(30분-천신제)
유일사삼거리-새길령-1174봉
14:00 화방재 4.5km
(숙박)
10시간 30분 24.2km
7/17 06:20 화방재 출발
07:00 수리봉(1214)-창옥봉(1238)
07:50 만항재 (1330) 3.45km
09:00 함백산(1572) 2.85km
09:50 중함백(1505)
11:10 은대봉(1442)
11:50 싸리재(1250) 5.4km
5시간 30분 11.7km
7월 15일_토_22:00
토요일 텅 빈 사무실에 홀로 앉아 바빴던 한 주를 마무리하며 저녁에 출발할 대간길을 준비하며 여러 친구들의 걱정스런 전화와 격려를 받는다. 창밖에 부딪치는 빗줄기와 인터넷 뉴스로 돌아보는 기상소식이 을씨년스럽다. 한탄강 주변에서 대민 지원에 나선 배소위도 안부전화를 걸어온다. 이제 아들들의 염려를 받을 정도로 살아온 날들이 꽤 길어 보인다. 이틀간의 폭우가 부디 잠시 쉬어가며 적셔 주길 바랄 뿐이다. 대간 길 2천 리 길이 그리 순탄할 수만은 없겠지만 험한 환경을 무릅쓰고 걸어 나감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겠지.. 이 땅의 역사가 그럴진대, 끊임없이 다가오고 마주쳐야 하는 격랑 속에서 우리는 많은 지혜와 살아가는 생명력을 키워 나갈 수 있으리라..
오늘날 주변 강대국들의 응시 한가운데에서 이 땅의 민족들은 어떤 지혜와 슬기로움으로 제 삶의 터를 지켜 나갈 것인가... 자유로운 사고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며 진정으로 행복한 생을 누릴 수 있는 한반도로 가꾸어 가야 할 오늘과 내일을 위하여, 부디 민초들의 바램이 짓밟히지 않는 이 땅의 평화를 위하여, 소위 지식인 정치가들은 냉철한 판단과 국리민복을 위하는 마음으로 한 걸음씩 발전하는 정책을 마련해야 할 터인즉, 요즘 왠지 서로의 고집으로만 치닫는 한심함이 보이니 날씨만큼이나 무거운 오늘이다. 대체 이념이 무엇이고, 오직 부의 축적을 통한 삶의 질이 과연 개선 가능한 것인가...
신도림을 출발할 즈음 강해지던 빗줄기가 사당을 지나 양재동에 이르러서는 폭우로 변한다. 경부선을 향하는 지리산 팀과 헤어져 태백을 향하여 영동선에 올라서니 곳곳에 교통 불통 소식이 들린다. 부디 대간 길 들머리까지 무사히 닿아 물길 잡히지 않는 대간 마루금을 조심스레 밟아 태백산 천제단에 엎드려 절할 수 있기를.. 창밖에 쏟아지는 빗물을 바라보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영주, 봉화를 거친 산행 버스는 주실령 넘어 도래기재에 안착하니 잠시 빗줄기가 가늘어지며 기쁘게 산행준비를 마친다.(03:10)
7월 16일_일_03:30
가늘어진 빗줄기를 다행으로 여기며 잠시 버스 속에서 굳어진 피로한 몸을 풀고 도래기재 북쪽 들머리에 발을 올린다. 봉화와 영월을 잇는 88번 지방도에 차가운 비에 젖은 牛口峙마을의 원혼들이 전쟁의 비극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금정굴을 벗어나 태백을 향하는 발걸음을 따라 함께 날개짓하며 오름을 시작한다. 점차 굵어지는 빗줄기에 천천히 젖어드는 방수자켓이 체온을 떨어뜨리며 땀마저 씻어간다. 어둠 속에서 지나치는 묘 한기와 철탑을 지나니 금정골을 잇는 임도를 건넌다.(04;10)
서둘러 올라서는 820봉을 지나고 크게 가파르지 않은 1049봉을 여유 있는 호흡으로 천천히 올라선 후 이내 내리막을 밟아 두 번째 임도를 만나니 (05:00), 최근에 만든듯한 비박용 정자가 잘 갖추어져 있고 태백산 안내도가 잘 마련되어 있다. 비록 대간 허리를 자르면서 임도를 만들었지만 그런대로 대간길을 잘 꾸미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배낭을 벗고 굵지 않은 빗줄기에 안도하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구룡산 오름길 절개지에 잘 만들어진 나무 계단을 밟고 편하게 능선으로 올라서니 왼쪽 무릎을 덮는 연골이 조금씩 시큰거린다. 미리 무릎 보호대를 꺼내 착용하고 조심스런 디딤으로 확인하니 크게 걱정은 하질 않아도 되겠다. 3주 연속 산행에서 오는 피로감이 다소 영향을 받는 듯하다. 이후 1258봉까지 모처럼 된오름을 1시간 남짓 지쳐 오르니 땀과 빗물에 젖은 몸이 방풍 자켓 속에서 데워지기 시작하고 날은 이미 밝았다. 10여분 더 이어지는 가파른 능선을 밟은 뒤에야 구룡산 헬기장에 다다라 넓은 시야를 확보하며 새벽을 여는 태백산의 아침을 즐기려 하나 짙은 운무에 가려져 온통 잿빛이다.(06:00) 드디어 강원도에 접어드는 기점이다.
다시 후두둑 거리는 빗줄기가 심상치 않더니 이내 굵은 빗줄기를 쏟아낸다. 서둘러 오른쪽 하산길을 밟아 내리지만 미끄러운 내림길에 방금 지나간 듯한 멧돼지들의 식사? 후의 어지러움으로 더욱더 속도가 느려진다. 점차 세차게 변하는 빗줄기에 이미 품씬 젖어드는 방풍자켓 속으로 흘러내리는 빗물이 속옷을 적신 후 양말까지 타고 내려 완전히 절여진 생쥐 꼴이 되고 말았다. 고직령을 넘어서고 1231봉을 잠시 오르내림으로 건넌 후에 다시 긴 내림길을 젖어드니 실두동 마을로 이어지는 참새골 입구 곰넘이재(실두재)에 내려선다.(07:00) 점차 허기가 밀려오고 아침 식사를 원했지만 세찬 빗 속에서 어디 잠시라도 가릴 하늘이 마땅치 않아 다시 신선봉으로 향하기로 한다. 여름 날씨 답지 않은 기온 하락으로 비에 젖은 몸이 떨려오기 시작한다. 비록 온통 물에 젖은 상태이지만 다시 자켓 위에 우의를 겹쳐 입으니 한결 따스함을 느낀다.
대간 길을 따라 넓게 방화선을 이루어 무성한 풀섶을 헤치지 않아 발길은 가볍다. 단지 흘러내리는 빗물이 골을 이루어 흙길을 파헤칠까 염려된다. 평탄한 오름의 1184봉을 지나 잠시 가파른 암릉을 헤치며 신선봉(1280)에 올라서니 (08:00) 길게 자란 고사리 잎을 덮은 채 자리 잡은 묘지 한기(처사 경주 손 씨)를 만나고, 추위를 느끼면서도 역시 아침을 펼칠 만한 상황이 되질 않아 이슬이 한잔 씩을 나누어 마시며 체온을 유지하고 이내 오른쪽 내림길로 급히 꺾어 내린다. 짧은 내림 이후에 작은 오르내림으로 이어지며 빗줄기가 다소 가늘어지긴 했으나, 마땅히 앉을 만한 장소를 찾지 못한 채 1시간 여 만에 차돌배기(각화산 갈림길, 1141)에 다다라, 깔고 앉을 차돌멩이 하나 없는 산 이름이 아쉬운 채로 엉거주춤 앉아 김밥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나, 떨어지는 빗방울이 밥통을 먼저 채우며 국밥으로 적셔진다.(09:00-09:15)
다행히 운무는 많이 걷혀 빗 속에서도 시야는 맑아온다. 남쪽 覺華山 史庫터로의 진행 방향을 버리고 북쪽으로 방향을 다시 꺾어 깃대배기봉 오름길을 재촉한다. 추위를 벗어나는 길은 빠른 걸음으로 스스로 만들어내는 열발전이 유일한 대책이다. 급한 식사 후의 된오름길은 그리 만만치 않게 1시간여를 계속된 후에야 깃대배기봉(1341)에 이어진다.(10:20) 이미 7시간을 물에 부풀어진 신발 속에서 질퍽거리는 발걸음이 아예 고인 물을 일부러 밟으며, 어린아이들 장난질 치듯 흙 묻은 신발을 씻어낸다. 일제강점기 측량관계로 곳곳에`깃대를 세운 뒤로 대간 길 봉우리들 마다 깃대봉이란 이름이 꽤 많다.
오른쪽 두리봉으로 이어지는 남쪽 능선은 봉화 청옥산(1277)으로 이어지고, 대간길은 북쪽으로 태백산 정상을 향해 나아간다. 1461봉과 부서봉(부소봉), 태백산까지의 하늘고개(天嶺)를 행렬이 길어지며 후미에 뒤처진 채로 천천히 작은 오름으로 밟아 나간다. 6.25의 치열한 전투 속에서 빨치산과 토벌대의 유격전이 벌어지던 왼쪽 天坪계곡 쪽에는, 비 오는 휴일을 맞아 폭탄투하 훈련을 잠시 멈췄나 보다.. 하필이면 민족정기를 뒤흔들며 천제단 아래를 진동시키는 전투기의 폭격들은 빗속을 뚫고 함께 오르는 그날의 영혼들에게도 피아식별이 가능할 것인가.. 아니면 그날의 어처구니없는 싸움들을 죄다 허공 속으로 날려 한꺼번에 잊혀질 수 있을 것인가.. 날지도 않는 폭격기의 굉음이 우의 속 귓가를 맴돈다.
깃대배기를 출발하여 1356봉과 1461봉을 천천히 지나는 동안 끊임없이 내리는 빗줄기가 멧돼지가 할퀴고 간 자리를 메우며 쉽게 아물지 않을 대간 길섶을 적셔나간다. 인적이 드문 대간 등줄기에 흐린 날의 급작스런 멧돼지의 출현이 염려된다. 1시간 만에 도착한 부서봉(부소봉) 갈림길에서(11:20) 결국 빗속을 뚫고 부소봉을 오르지 못하고 단군의 아들 부소의 영혼을 스치며 옆으로 이어지는 대간길을 10여분 재촉하니, 태백산 주봉을 고집하는 문수봉(1515) 갈림길을 만나 왼쪽으로 서둘러 오른 후 천제단-하단에 도착한다.
7월 16일_일_11:40
잠시 숨을 고르며 휴식을 취하는 동안 제단 아래를 차지한 묘 한기를 돌아보니 죽어서도 부귀영화를 누리는가... 병조참판 밀양박공의 무덤을 둘러보며 그 후손들의 정성이 갸륵하다 여긴다. 다시금 발길을 이어 태백산 영봉 천제단-천왕단에 이르니 태백산 큰 표지석이 우람하게 그 곁을 지키고 서 있다. 선승 탄허스님이 세운 단종비각이 있다는 망경사 갈림길이 오른쪽 당골(塘谷)로 이어지고 비바람은 더욱 세차다. 그 우중에서도 끊어짐이 없이 제를 올리고 있는 두 무속 여인의 제복이 매우 깨끗하고 신비스럽다. 丘乙壇으로도 불리웠던 이 신성한 제단에서 흘러나오는 영기를 맛보며 한참을 머문다. 신라 일성왕 때부터 천제를 올렸던 민족의 제단은 아래쪽이 네모 모양으로 땅을 받치고 위는 둥근 하늘을 이루니(天圓地方) , 한배검 檀君을 大皇神으로 모시는 이 땅의 민초들의 성지다.
太白山, (크고 밝은 뫼-박달-檀)으로 대표되는 단군의 瑞氣를 운무 속에서 느끼며 다시금 장군봉(1566.7) 최고봉 자리에 마련된 천제단-장군단에 도착하여(12:00) 정성스레 마련한 제물을 차려 놓고 빗속에서나마 우의를 벗고 엎드려 절한다. 전쟁의 상흔들을 아직도 치유하지 못한 채 긴 세월 먼 길을 걸어온 영혼들이, 부디 천혜의 영광으로 그 상처를 이 흐르는 빗물에 씻은 듯이 나아 훨훨 날아오르기를 빌며 엎드려 눈물 적시니 흐르는 빗물에 섞여 얼굴을 타고 내린다. 대간 길 소백능선을 끝으로 사라진 조대장님의 영혼이라도 이곳으로 함께 올라, 부디 이승의 애끓는 인연의 끈을 자르고 훠어이 훠어이 하늘로 날아오르소서... (12:30)
장군단에 엄숙히 절한 뒤의 자유인들 얼굴에는 태백산 정기가 감돌고, 지리산 천왕봉에서 이어 온 10개월 넘는 긴 발걸음 속에서 오늘 이렇게 창대비에 흠씬 젖어드는 보람을 맛본다. 빗물에 섞인 음복주와 떡을 나눠 먹으며 빗속의 추위도 잊은 듯 자리를 뜰 줄을 모른다. 무엇이 이들에게 강인한 심력을 가지게 만드는 것인가.. 결코 긴 훈련의 다리 힘에 느껴지는 체력만으로는 설명이 되질 않으리라..
7월 16일_일_13:00
화방재로의 하산길은 매우 가파른 계단길의 연속이지만 다소 소강 국면을 보이는 빗줄기와 비교적 잘 정비된 돌계단들을 밟으며, 천년 주목들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가진다. 질긴 생명력을 한 쪽가지에 남겨 둔 채로 썩어 없어진 몸을 시멘트로 채우며 다시 천년의 역사를 지키려는 주목들의 이야기가 우의를 덮어쓴 귓가를 후두둑 거리며 이 땅의 슬픈 상처를 보여 주는 듯하다.
보스보강변의 동쪽 거리로 걸어 나오면서 러시아풍의 영화로움를 느낀 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 아파트촌을 거치면서, 이슬람 문화의 흔적을 더듬어 보려 하나, 이미 타쉬겐트도 꽤 많은 인구의 유입으로 점점 슬럼화해 가고 있음을 느낀다. 실크로드의 영광이 재현될 그날을 기다리는 이 땅의 이민족들에게도,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날 경제 지도자인 메시아가 있어, 이데올로기에 앞선 부귀영화를 창조해 줄 날이 오려나... 그것이 훗날 어떤 희생을 딛고 이루어질지는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배고픔으로부터의 자유 또한 소중한 것임엔 이견이 없을 것이니..
“또 한 번 얘기하지 않을 수 없네... 인간이 한평생을 사는 동안 스스로 계획하고, 자신의 의지대로만 살 수 있다면 그 또한 자유를 누렸다고 할 수 있으련만... 무릇 지나고 보면 스스로 자초했거나, 아니면 충분히 예상되는 불행을 비켜가지는 못한 채.. 대부분 뜻밖의 사고라든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다가온 사건들이라 자조하면서 운명적인 불행으로 감수하며 살아가겠지. 그러나 숱한 고난을 뚫고 충분히 경험과 배움을 통한 앞날에 대한 예측이 가능한 지식인의 굴레라는 것은, 결국 스스로가 스스로를 얽매어 나가는 어처구니없는 합리화로 그 끝을 볼 수밖에 없겠지... “
원하지 않는 삶이란, 그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의지에 반해서 이어지는 무의미한 생존이겠지... 스스로의 결단으로 편한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란 도대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먹고살기 위한 육체적 노동은 차라리 자신의 생명에 대한 책임감으로 그 의미를 찾을 수도 있겠으나, 원하지 않는 사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내 머릿속이 아닌 바깥에서 강요되는 내 사상이란..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 내가 선택을 위해서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자본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생소한 경제논리가 왜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선택해야 할 삶의 논리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오직 자유로운 사고와 스스로의 책임감으로 완성하고 싶었던 K노인의 바램은 그리 쉽지 않은 현실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20세기 초반을 살아온 K노인으로서는, 단순히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이 땅의 침탈로 인한 경제적 빈곤에 따른 부자유스러움만을 탄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기의 흐름 속에 왕조의 몰락과 소위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삶의 장이 열리는 반세기를 살아오며 부딪혀 온 오늘이다. 과연 그 진전되는 민주주주의가 이 땅의 민중들 속에서 획득되고, 이 땅의 숱한 선열들의 바램대로 이루어질 기회를 잃어버린 채, 결국 반세기의 역사 속에서 독립이란 투쟁의 공동된 깃발 아래 민족이란 이름으로 공존하던 서구의 자본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그들 지식인들의 배워들인 술수에 따라 힘센 외세들의 뜻대로, 결국은 나눠 갖기식 독립이 가져다준 이원론적인 삶의 방식을 두고, 이 땅의 힘없고 배우지 못한 민초들은 선악의 잣대로 선택적인 삶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 강제권력을 배격하고, 전 민족 전 인류가 최대한의 민주주의 하에서 다 같이 노동하고 다 같이 자유롭게 사상하고... “ 싶었던 단주 유 림 선생의 뜻대로, 자본의 거대압력과 무산계급의 독재 모두 싫은, 자유로운 사고와 자유로운 삶의 형태를 이루는 것이 과연 얼마나 많은 시간과 희생을 요구하는 것일까... 해방 15년이 흐르고, 수많은 죄 없는 민초들의 생명을 이 땅 위에서 희생시킨 후에도 더욱 깊어만 가는 상흔들이 결국 또 다른 세기를 지나야 만 아물어질 것인가..
7월 16일_일_13:30
태백산 정상에서의 하산길은 비교적 여유롭다. 비록 물에 젖은 몸들은 부풀어 오를 대로 올랐지만 간간이 잦아들기도 하는 빗줄기처럼 운무 걷힌 능선 주변을 조망해 보기도 한다. 유일사로 통하는 안부까지(1230) 올라온 차량이 무슨 연유로 다행히 비포장으로 남아있는 높은 언덕을 숨 가쁘게 올라와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까.. 또한 엘리베이터 식으로 뒤편 급경사 아래쪽을 연결하는 탑승기구는 무슨 연유로 대간 언덕에 흉물스레 걸쳐져 있는 것일까.. 종교든, 정치든 인간이 관여하는 모든 잔치들은 이렇게 아픈 생채기만을 남기며 횡포를 부리게 되는 것일까.. 민족의 영산 자락을 파고드는 슬픈 인간들의 욕심이 점점 무서울 지경이다.
정상에서 1시간여의 내림길을 밟아 1174 안부에 위치한 사길치(四吉峙, 새길령, 鳥道嶺, 士吉嶺)에 다다르니, 穴里와 天坪을 오가던 옛 보부상들의 발걸음을 지켜주던 산령각이 자릴 잡고 넓은 고갯길을 쉬어가게 한다. 별도의 묵상을 바치며 슬픈 영혼을 위로하려는 총대장을 남겨둔 채 먼저 내림길을 향해 내려가니, 사길치 매표소에 다다르고 대간길은 넓게 이룬 배추밭으로 길이 끊어진다. 어쩔 수 없이 발이 빠지는 배추밭이랑을 건너 화방재로 이어지는 마지막 안부를 10여분 돌아 내린다. (14:00)
花芳재(御坪峙) 내림길에 만개했던 철쭉들은 그 잎만을 무성하게 남긴 채 내년 봄을 기약하고 태백산긴 종주길을 마감하는 31번 국도엔 무심한 차량들만 스쳐 지나고, 주유소 포장된 마당에는 여전히 비는 내리고 온몸이 젖은 몸을 누일 산장을 찾아 떠나는 길에는 무너진 흙더미에 섞여온 자갈들이 포장길을 덮친 채 폭우의 잔상들을 보여주고 있다. 대체 오늘 하루 태백의 보살핌 속에 물난리를 피할 수 있었던 걸음들이 환란 속으로 찾아드는 기분이란....
당골(塘谷) 마을 식당을 겸한 숙소에 몸을 누이니, 한 잔 산 딸기 담근 술과 함께 짜르르 젖어드는 피로가 감미로운 저녁이다. 당골이 숫굴이면 穴里는 암굴이겠지..
登太白山
直過長空入紫煙 허공에 곧추 올라 안갯속을 돌아드니
始知登了最高嶺 이제 더 오를 곳 없는 산마루임을 깨닫네
一丸白日低頭上 둥근 해는 머리 위에 나직하고
四面群山落眼前 주위 뭇 산봉우리가 눈아래 내려앉네
身逐飛雲疑駕鶴 구름 따라 몸이나르니 학의 등에 올라탄 듯
路懸危似 梯天 돌층계 허공에 걸렸으니 하늘사다리인가
雨餘萬壑奔流張 비 갠 골짜기에 시냇물 내달리고
愁度榮回五十川 굽이치는 오십천에 수심을 띄우나니.....
(安 軸, 謹齋集)
7월 17일_월_06:20
새벽 이른 잠에서 깨어나 전날의 피로에 지친 몸을 점검하니, 기분 좋게 마신 머루 복분자의 덕분에 활력이 솟는다. 단지 마지막 잠자리 직전의 연이은 여러 잔의 이슬이가 장에서 꼬륵인다. 소도마을(신성불가침의 종교구역)을 지나 들머리 화방재(花房峙, 정거리재) 파출소 앞에서 몸을 다스린다. 큰 빗줄기는 아니래도 전날의 악몽 탓에 미리 우의를 단단히 걸치고 빗속 운행에 대비한다. 왼쪽 만항재로 이어지는 414 지방도로를 따라 미리 산행버스를 출발시키고 민가 옆으로 난 수리봉 오름길에 발을 얹으니 생각보다 무겁게 느껴지고, 전날의 피로가 누적되어 힘든 출발을 예감한다.
30여분의 직벽 된오름으로 수리봉에 올라서니(7:00) 뱃속에서 전쟁을 치르며 후미로 유도한다. 제법 후두둑거리며 내리는 빗방울이 예사롭질 않다. 다시 우의를 챙겨 입는다. 대간 서쪽 하늘은 안개를 밀어 올리며 개여가는 날씨인데, 능선 동쪽에는 짙은 운무에 쌓인 채 진종일 비를 내릴 참이다. 진행 방향에 따라 빗물의 단속이 예상된다. 꽤 높은 산의 물가름이 이젠 하늘 가름으로 이어지는 모양새다. 평탄한 오르내림을 거쳐 창옥봉에 다다르니(07:30) 선두와 만나고 산죽길을 거쳐 이동식 천체망원경을 갖춘 관측소 옆을 지나고 만항재로 연결되는 비포장의 도로를 따라 걷는다.
멀리 만항재(晩項嶺. 늦은목이)를 쳐다보며 고한으로 이어지는 지방도를 거쳐 함백산 들머리로 올라선다. 잘 정비된 1300봉을 넘어서니 태백과 고한을 잇는 지방도를 두어 차례 만나면서 함백산 된오름길에 접어든다.(08:00) 비에 씻긴 깨끗한 옥돌 계단을 밟아 오르는 걸음은 적당히 내려주는 빗 속에서 평화롭기만 하다. 멀리 남서 쪽으로 태백이 어제의 힘든 조우를 미안해하듯 구름 안개를 허리에 띈 채 잠시 정상을 보여주고, 태백 쪽 동해안으로 떨어지는 혈맥들이 겹겹이 구름 속에서 밀려온다. 오른쪽 사내골(살래골, 士來洞) 활천(살천, 活川)으로 이어지는 좁은 포장길이 태백 선수촌 안부까지 꼬불꼬불거리며 멋진 드라이브 코스를 연출해 내고 있다.
7월 17일_월_09:00
함백산 정상을 향한 된오름이 한 시간 남짓 계속 이어진다. 빗줄기가 다행히 가늘어지는 느낌이다. 좌우로 펼쳐지는 산복도로를 따라 국가 시설물들이 유난히 많이 집중된 느낌이다. 고산지역의 필요성에 따른 정책이겠지만, 왠지 태백과 고한을 잇는 이곳 함백산 정상에 집중된 까닭을 모르겠다. 특히 주봉 어깨에 위치한 거대한 시설물의 안테나가 위압감 마저 느끼며 마치 영화에서나 본듯한 우주 정거장을 연상케 한다. 힘겨운 발걸음을 지쳐 함백산 정상석이 있는 암릉에 올라서니 비바람이 거세다. 기념 촬영 한컷을 마치고 멀리 남쪽 태백을 향하니 잦아드는 구름들이 산허리에 숨어든다.
수많은 탄광지대를 품은 채 이 땅의 막장을 파내던 산업의 영혼들이 젖은 수레에 실려 검은 얼굴로 골골을 올라온다. 가슴속까지 검게 젖어드는 가난을 씻고자, 뱉어내는 기침마다 피눈물이 맺히던 우리들의 형제들의 영혼은 그렇게 막장굴 깊은 곳에 갇힌 꿈을 그대로 묻어둔 채 어느 하늘로 흩어져 갔던가... 고한, 사북, 정암골 탄좌들의 영혼들이 서양 옷을 어설프게 걸친 채 카드놀이를 한단다... 북으로 난 내림길을 따라 주목보호지구에 철조망이 요란스레 담장을 이룬다. 자연보호 차원이 아닌 절도방지의 느낌이다. 매우 거북스러운 대간길이다. 행여 우의가 걸려 찢어질까 두렵다, 갈갈이 상처 난 우리 형제들의 가슴팍처럼..
7월 17일_월_09:50
주목지대를 거쳐 잠시 된 오름으로 올라 선 중함백 안부에서 태백시를 조망하니 멀리 매봉산 아래쪽으로 골프장 건설이 한창이다. 좀 더 낮은 지대에 개발을 통한 유락시설이나 골프장 계획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탄광촌이 폐쇄되면 그대로 자연으로 회복시키고 이주정책을 펴는 것이 보다 적극적이고 확실한 보장책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게 깊고 높은 곳에다 위락시설을 만들어 도로를 넓히고 돈 쓸 일을 만든다고 그 지역 주민의 삶이 나아질 것인가.. 검은 탄가루를 마시다가 또다시 오염의 비료들 속에서 몇 푼의 보상금으로 대체되는 그들의 삶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중함백을 지나 제1쉼터 안부에서 내림길이 대간 마루금을 잠시 벗어나게 왼쪽으로 리본이 달려 있고 길이 나 있다. 다소 거친 가지 덤불을 거치고 20여분 희미한 길을 찾으며 암릉지대를 통과하며 새로운 리본을 부착해 내려가니 보호수가 자리 잡은 사거리 안부에 도달하고 고한 군청의 안내 표지판이 대간길과는 별도로 안전한 등산로를 유도하고 있다. 문제는 은대봉 방향을 천의봉으로 표시하고 있으니 계속 의문이 가시질 않는다.
멧돼지들의 식당길을 함께 걸어 내리며 제2쉼터에 다 달아(10;20) 휴식을 취하며 아픈 다리를 점검한다. 이틀간의 행보가 빗길에서 그리 간단치가 않은 모양이다. 고장 난 발걸음들이 몇몇 통증을 호소한다. 챙겨 온 간식거리들을 나눠 비우면서 마지막 은대봉 오름을 위한 체력을 비축한다. 길고 힘든 여정의 끝에서 우러나는 동지애를 느끼며 자유인들의 웃음이 은대봉 오름길을 날아오른다. 여전히 비는 부슬거린다. 꽤 지루한 오름을 맛보며 마지막 안간힘을 다하며 30여분을 숨이 찰 정도로 지쳐 오른다.
초봄의 밤길을 반 트럭 경찰차에 실려 종로 쪽 어디론가에 실려 가는 K노인의 머릿속에는 10년 전 전쟁 중의 경상도 북쪽 마을길의 악몽으로 가득 찼으나, 벌써 두어 차례, 독립 노동당 가입 후 경찰과의 입씨름은 경험한지라 그리 두려움은 없었다. 단지, 함께 연행되는 아내의 존재가 가져다주는 까닭 모를 불안과, 회한으로 밀려드는 지난날의 기억들이 뒤엉키면서 오늘 저녁 유난히 밝아 보이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꽁무니를 매달린 채 따라온다.
내일모레면 아이들과 함께 개학하여 학교에도 가야 하는데...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되더라도 개학날 전까지 서둘러 결론을 내고 짧은 시간에 문제를 해결하리라 굳게 결심한다. 순간 맞은편에 앉은 아내의 얼굴에서 걱정스러움이 아닌 체념의 평온함을 선뜻 읽은 K노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제서야 떠오르는 작년 말의 그 방문객의 얼굴을 떠 올리고는 곧추 세우며 버티던 허리가 한치 아래로 꺼져 내리며 고개가 숙여졌다.
아, 둘이 함께 실려 오면서도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모든 걸 잊자면서 K노인 스스로는 진정으로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도 않은 기억들을 깨끗이 씻어낸 탓일까.. 한동안 정말 잊고 지내며 오직 새로운 삶을 위한 희망 속에서 보낸 겨울이었다. 하지만 정작 아내는 단 한시도 잊을 수 없는 고뇌와 불안 속에서 그 겨울을 보냈으리라... 그렇게 무심할 수가 있었던가..
“x x x라는 간첩을 알겠지..” 아무리 생각을 해도 K노인은 그 이름을 기억할 수가 없었다. 분명 그날 밤 그의 황망스런 악수 속에서 듣긴 들은 것 같은데 왜 그리 생각이 나질 않는 걸까.. 그러나 그 이름 보다도 또렷이 살아나 떠오르는 그의 모습 속에서 비록 야윈 얼굴이지만 날카로운 눈매를 기억하며 그냥 알은 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옆 방의 아내와 함께 진술하는 그날의 정황이, 결코 함께 자리를 한 적이 없었기에 담당 형사의 억지 같은 물음 속에서 피차 꿈속에서 지어내는 거짓처럼 들리는 모양이다. 과연 무슨 말을 인정해야 해결이 될 것인가.. 그들의 잣대에 나를 맞추어 본들 무슨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며, 이미 정해진 죄목에서 벗어날 도량이 떠오르지 않는 가운데 부디 아내의 빠른 석방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1961년 4월 1일 종로 경찰서 뒷담으로 들려오는 개학식을 마친 학생들의 설레임이 섞인 웃음소리 속에서 K노인은 큰 딸아이의 울음소리를 듣는 듯 가슴이 답답했다. 토요일 일과를 마친 담당형사는 월요일쯤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안심시키고는 유치장으로 향하는 K노인에게 마치 긴 여행 후의 이별처럼 안스런 얼굴로 작별을 하고 퇴근을 서두른다. 도대체 북에서 왔다던 그 친구는 어떻게 된 것일까.. 혹시.. 그렇다면 아내의 석방은.... 며칠째 잠을 자지 못한 피로가 엄습하며 생각보다 넓고 텅 빈 유치장 방 한켠에서 깊은 잠에 빠져든
다. 유 림 선생께서 흰 두루마기를 걸친 채 저만치 대문 앞 사랑채를 돌아들더니 잠시 머뭇 거리다가 어느새 다시 사라진다.
일주일 후, 검찰청을 거쳐 독립문 쪽 구치소로 향하는 시청 앞 길목에서, 단주 유림 선생의 사회장을 스쳐 봐야만 했다. 그러나 이미 먼저 구속된 아내의 소식이 궁금하고, 부근 어디 에선가 서 있을 것 같은 아이들의 모습이 애타게 걱정되었다. 바로 저기 저 학교가 큰 아이가 합격한 명문여고에 틀림없는데... 체념과 회한으로 절여진 가슴은 썩을 줄도 모르는 듯 살아 통증을 느낀다.
7월 17일_월_11:10
힘 겨운 발걸음을 지쳐 낙동강 발원봉이라는 은대봉 헬기장에 올라선다. 황지 연못에 비해 너무 초라한 느낌이고 정상석 하나 갖추지 못한 채 개당귀 하얀 꽃들만 무성하다. 구석에 자릴 잡은 나뭇가지에 준비해 온 정상 표찰을 붙여 놓고 잘 붙들어 매 준다. 훗날 다시 만날 수 있는 날 얼마나 반가울까... 소백 이후로 고개와 봉우리들에 표찰 없는 곳에 대간길의 정성을 더해 가는 좋은 작업이다.
이틀간의 비 젖음에 익숙해진 대원들은 구간 마지막의 내림길이 아쉬운 듯 좀체로 서둘러 내려갈 기색이 아니다. 내리는 비는 그냥 친숙한 느낌으로 맞아들인다. 긴 시간을 함께 극복한 뒤의 보람이다. 어떤 다른 계기와 제각각의 목적으로 시작한 걸음이더라도 진부령에 닿는 날은 한마음으로 그 영광을 노래할 수 있으리라.
싸리재 옛길로 내려서는 길은 잠시 가파름을 거친 뒤 20여분 만의 짧은 내림으로 조망이 시원하여 태백과 정선 쪽이 두루 잘 살펴지고 그 꾸불거리는 오름길 포장도로가 정겹다. 내림길에도 역시 고한읍에서 만든 안내 표지가 은대봉을 천의봉으로 표기하고 있으니 매우 혼돈스럽다. 그 연유를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다음 구간의 매봉산과 혹시 다툼이 있는 것은 아닐까..
7월 17일_월_11:50
싸릿재(두문동재) 건너편 다음 구간 금대봉 입구에 있는 감시 초소에서 목을 내밀고 쳐다보고 있는 아저씨의 눈길이 어쩐지 한심스런 눈치다. 지친 발걸음만큼 빗속을 뚫고 나타나는 행색이 가관일 게다. 마땅히 씻을 만한 계곡도 없을 것 같아 귀경 버스에 몸을 싣는다.
고한, 사북을 지나 영월 못 미쳐 연하계곡 휴게소에서 점심을 즐기고, 제천으로 넘는 박달재에서 금봉이와 함께 태백산 생삼겹을 소금구이하니, 내리던 빗물마저 춤을 춘다.
이틀간 서울에 내리는 모진 비를 피해 태백으로 피난을 다녀오니, 신도림까지의 길이 막혀 물푸레와의 랑테뷰가 매우 더디고, 왠지 다시 피난을 떠나야 할 기분이다.
7/18 배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