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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라떼 Dec 01. 2023

세상은 원래 그런 겁니다

「미션」, 1986 - 두 번째 이야기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미션」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를 나눠보려 한다.

 

 가브리엘 신부와 회심한 로드리고 멘도사는 과라니족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 그들은 마을을 만들고, 교회를 세운다. 로드리고는 정식으로 예수회 수도사로 입회하게 되고 과라니족 마을은 작은 천국으로 일구어져 간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식민지 영토 분쟁이 진행되고 있었고 과라니족이 세운 마을은 그 경계에 위치하고 있었다. 교황청은 양국간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중재자 역할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권위를 보이고 유지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서는 과라니족이 살고 있는 마을이 정리(?)되어야 했다. 즉, 선교사들과 과라니족이 세운 아름다운 천국 공동체를 없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추기경 알타미라노는 과라니족들을 다시 정글로 돌려보내라는 교황청의 명령을 전하기 위해, 그리고 신부와 수도사들을 철수시키기 위해 그곳으로 파견된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에서 스페인, 포르투갈의 지도자들은 과라니족을 선교의 대상이 아닌 '미개한 짐승'으로 규정하려 한다. 가브리엘 신부와 로드리고는 이를 극구 부인하지만 강대국의 대변인들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주장을 가볍게 무시할 따름이다. 가브리엘은 원주민들에게 신앙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과라니족의 어린아이를 데려와 아름다운 성가를 부르게 하지만 이도 무용지물이었다.



 식민지 지배자들은 말한다.

 "자식을 죽이는 원주민들을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이에 가브리엘은 대답한다.

 "셋째부터 죽이는 것입니다. 부모가 각자 한 명씩 업고 도망가기 위해서이죠. 누구로부터요? 우리들로부터입니다."


 머리가 아파진 알타미라노 추기경은 거친 분위기를 진정시킨다. 그는 자신이 직접 과라니족의 마을의 모습들을 확인한 뒤 결정하겠다고 선언한다.





 가브리엘의 안내를 받아 추기경이 확인한 과라니족들의 모습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들의 예배, 그들의 문화, 그들의 신앙은 유럽의 신도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 더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다. 알타미라노는 가브리엘 선교사의 사역이 너무나 아름답고도 성공적인 것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애초에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과라니족을 마을에서 몰아내지 않는다면 양 강대국은 당연히 반발할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나날이 약해지던 교황청의 권위는 더욱 흔들릴 것이었다. 유럽 땅에서 예수회의 존립마저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선교지라 불리는 이곳은 잘 가꿔진 정원일 뿐, 진짜 정글은 유럽 왕실이오."는 말을 내뱉은 추기경은 냉정함을 유지하고 신부와 수도사들, 그리고 원주민 대표자들을 불러 "이곳을 떠나라. 선교사들은 귀환하라.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게될 것이다."는 청천벽력같은 명령을 한 후 돌아간다. 원주민들은 분노하며 반발한다. '복종'을 절대 계율로 삼고 있는 예수회의 사제인 가브리엘은 머리를 감싸쥐며 괴로워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곧 강대국의 군대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교회의 명령에 순종하여 과라니족을 버리고 떠날 것인가? 아니면 교회의 명령에 불복하여 이곳에 남아 (파면은 물론이고) 원주민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로드리고는 원주민 소년이 강 하류에서 발견한, 자신이 용병 시절 사용했던 검을 받는다. 그는 그것을 허공을 향해 여러 번 휘둘러 본다.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 로드리고는 과라니족과 함께 싸우기로 결심한다. 는 자신의 결심을 가브리엘 신부에게 전하지만 신부는 이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로드리고는 말한다.

 "저들은 주님이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저는 엄연한 신부고 저들은 저를 필요로 합니다."


 가브리엘은 로드리고를 향해 분노한다.

 "그렇다면 신부답게 행동하게! 당신은 신부가 될 자격이 없네. 손에 피를 묻히는 순간 우리가 이룬 전부를 배반하게 되는 것을 왜 모르는가? 주님은 사랑이시네."


 이후 로드리고가 무장을 갖추고 축복을 받으러 가브리엘을 찾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브리엘은 단호히 축복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한다.

 “아니오, 그대가 옳다면 하나님이 축복할거요. 그대가 틀리다면 내 축복은 의미가 없소. 무력이 옳다면 사랑은 설 자리가 없소. 틀림없이 그럴 거요. 그런 세상에서 난 살아갈 자신이 없소.”


 결국 군대가 과라니족을 침공하고 두 신부는 다른 방법으로 각각 저항한다. 로드리고는 주민들과 함께 무장하여 전투를 벌이지만 순식간에 제압당하고 죽음을 당한다. 가브리엘은 원주민 신자들과 함께 평화의 행진을 하다 총탄에 맞아 죽는다. 여러 선교사들의 희생을 통해 간신히 천국을 이루었던 과라니족의 공동체는 세상의 무력 앞에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져버린다.





 두 선교사들의 갈등과, 서로 다른 방식의 순교는 이 영화가 던지는 가장 큰 질문 중 하나이다.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있는가? 끝까지 그리스도의 방법을 택한 가브리엘이 옳지 않았는가? 로드리고는 무력이라는 옛 사람의 방식으로 다시 돌아감으로써 신앙을 버린 것이 아닌가?


 주목할 것은, 이 영화가 가브리엘과 로드리고의 죽음의 방식에 대해 그 어떤 가치판단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폭력과 비폭력이라는 논쟁은 차가운 이 땅을 밟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쉽게 내려질 수 있는 결론이 아니다. 수 많은 역사와 사건 속에서 이 주제가 치열하게 다루어졌다.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하던 1939년, 현대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약소국들을 짓밟으며 수백만명의 살육을 일삼는 히틀러를 두고 '평화'라는 이름으로 현실을 방관하는 미국의 기독교인들을 경멸했다. 물론 그도 전쟁이 옳은 방식이 아님은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두 가지의 악 중 더 작은 악이었다. 실제로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일본이 자신의 영토인 진주만을 공격한 다음에야 참전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주1)


 이에 반해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비폭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적 부분이라고 믿었다. 그는 비폭력이 복음의 여러 행동적 강령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기독교의 필수적 요건이며 예수의 삶과 사역 전체에 걸쳐 분명히 드러난 하나님 나라의 본질임을 강조했다. 주2)   그에 따르면, 기독교인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폭력으로 빨리 제거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불의를 종종 견뎌야 한다. 기독교인은 불의를 묵과해서는 결코 안되며 저항해야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저항해야 한다. 주3) 


 어떤 방식이 옳은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쉽사리 답을 낼 수 없을 것 같다. 비폭력은 - 하우어워스의 말처럼 - 예수님의 분명한 말씀이요 친히 보여주신 삶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잣대로 무력을 사용한 방식을 비난한다면, 우리는 매우 복잡한 미로 속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히틀러 암살에 가담했던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나 일제 치하에서 무기를 들고 독립운동을 펼친 조국 교회의 수많은 선진들도 이 논의의 대상들이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분들의 행동을 감히 판단할 자격이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도 이 부분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할 것 같다.

 

 대신 우리는 이 영화가 정말 말하려고 하는 것, 즉 '선교의 본질'이라는 주제로 눈길을 돌려볼 필요가 있다. 선교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선교사는, 복음 전도자는 세속의 영업 사원과 어떻게 다른가?


 하나님의 생명을 전한다는 측면에서 참된 복음 전도자, 선교사의 모본이 이 영화 속에 있다. 가브리엘과 로드리고 신부는 과라니족에게 복음을 전했을 뿐 아니라 최후까지 그들과 운명을 함께 했다. 그들은 사영리만 전하거나, 복음이라는 스크립트만 낭독하거나, 건축물만 짓고 떠나버린 것이 아니라 과라니족의 비극적 상황에까지 기꺼이 동참했다. "복음으로 내가 너희를 낳았다." (고전4:15) 는 바울의 말씀이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가지는지 이 두 신부는 잘 보여주고 있다.


 가브리엘에게 과라니족은 더이상 미개한 종족이 아니었다. 과라니족은 함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눈 형제요, 차별없는 주님의 백성이었다.

 로드리고에게 과라니족은 더이상 인신매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참회한 자신을 용납하고 받아준 일생의 은인이었다. 로드리고는 살아남기 위해 칼을 든 것이 아니었다. 상대가 되지 않는 힘의 차이는 누구보다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리라. 다만 드리고자신을 위해 헌신해준 이들에게 동일한 헌신으로 화답했을 뿐이다.




 모든 전투, 아니 학살이 끝난 다음날 아침, 살아남은 과라니족 아이들 몇 명이 보트를 타고 정글로 돌아간다. 그 중 한 아이는 선교사의 바이올린을 챙긴다. 추정컨대 그들의 비극 속에서도 두 선교사가 보여준 진심은 아이들 마음 가운데 남아있었던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이 허무함처럼 보이는 현실에도 생명은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과라니족들과 선교사들이 몰살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추기경은 깊은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포르투갈 대표 혼타르는 이렇게 그를 위로한다.


 "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현실 속을 사는 존재 아닙니까? 그리고 세상은 원래 그런겁니다."


 그 말에 알타미라노 추기경은 정색하며 대꾸한다.


 "그렇지 않소, 혼타르씨. 우리가 세상을 그렇게 만든거요."


 그리고 다시 창밖을 보며 눈물이 맻힌 채 한 마디를 더 남긴다.


 "... 내가 그렇게 만들었소."



 죽은 선교사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이어나가게 했고, 기성교회는 지옥을 만들었다. 그들은 앞으로도 지옥을 계속 만들어 낼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교라는 미명하에, 교회의 권위를 지킨다는 명목하에, 지속적으로 세상에 지옥을 만들 것이다.


 이 영화는 폭력이냐 비폭력이냐에 대한 담론보다 좀 더 무거운 질문 하나를 던진다. 참 선교란, 참 섬김이란, 참된 사역이란 무엇인가라는 내용 말이다. 우리 삶이 그 질문에 성실하게 답할 수 있다면 세속적인 그 어떤 허무한 결말도 하나님 앞에서는 생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그 질문을 피해버린다면,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지옥을 생산해 내는 역할을 할 가능성도 있다. "세상은 원래 그런겁니다" 라고 변명하면서 말이다.



신부들은 죽고 저는 살아 남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죽은 자는 나고 

산 자는 그들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렇듯 

죽은 자의 정신은 

산 자의 기억 속에 남기 때문입니다

- 알타미라노 추기경의 편지 중 -





[참고서적]

주1) 현대신학이란 무엇인가, 로저 올슨 저 (IVP) 5장 중

주2) 현대신학이란 무엇인가, 로저 올슨 저 (IVP) 12장 중

주3) 평화의 나라 - 예수 그리스도의 비폭력주의, 스탠리 하우어워스(비아토르) 6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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