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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라떼 Oct 28. 2023

새로운 삶, 그 첫 걸음의 무게

「미션」, 1986 - 첫 번째 이야기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릴적 아버지께서 빌려오신 비디오 테이프를 밤에 같이 본 적이 있다. 선교사로 보이는 한 백인이 원주민들로부터 십자가에 묶여 폭포 아래로 떠내려가는 장면이 처음에 보였다. 무섭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영상미가 아름답기도 했지만, 이후 내용들을 잘 이해하지 못해 잠들어버렸다.


 사회 초년생이 되어서야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 그때도 플레이 전 많은 고민을 했다. 영화 제목이 「미션」이니 선교사님들이 고군분투하는 진부한 이야기 정도가 아닐까 싶은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후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때까지 나는 TV를 끄지 못한 채 멍한 표정과 젖은 눈시울로 앉아 있었다. 이후에도 세 번을 반복해서 더 보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내 마음 속은 이 영화가 던져놓은 살아있는 질문들로 꿈틀거림을 느낀다.


 롤랑 조페 감독의 「미션」이라는 영화를 모르는 사람도 엔니오 모리꼬네의 OTS <Gabriel's Oboe>는 알 것이다. 이 멜로디에 가사를 붙인 사라 브라이트만의 곡 <Nella Fantasia>도 유명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OST만으로 평가받기에는 너무 훌륭한 부분들이 많다. 굳이 이런 글을 쓸 필요 없이 "그냥 영화를 봐라"고 얘기해주고 싶을 정도다. 지금도 눈시울을 붉히는 장면들이 많아 한 편의 글로는 부족함을 느낀다. 두 번에 걸쳐 이야기를 나눠 보려 한다. 그만큼 가치가 있는 영화이다.




18세기, 예수회 소속인 가브리엘 신부(제레미 아이언스)는 남미의 과라니족 선교를 위해 직접 절벽을 타고 부족 지역으로 올라간다. 이미 한 신부가 순교한 바 있는 그곳에서 가브리엘 역시 죽음의 위기를 맞이하지만 그의 오보에 연주가 과라니족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이들과 교감하는데 성공한다.



 한편 과라니족에게는 무시무시한 대상이 있었는데, 바로 그들을 잡아 팔아넘기던 용병이자 노예 상인인 로드리고 멘도사(로버트 드니로)였다. 멘도사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 말종이었다. 그는 자신의 검술과 총술을 믿으며 이기적으로 살아왔다.



 그런 멘도사에게도 아끼는 대상이 있었는데, 바로 그의 이복 남동생이었다. 하지만 남동생은 멘도사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멘도사는 분노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우발적인 결투중에 그를 찔러 죽이게 된다. 차갑게 식어버린 동생의 시체 앞에서 오열하는 아내를 쳐다보며 멘도사는 극도의 좌절과 죄책감에 휩싸인다. 그렇지 않아도 용서받지 못할 삶을 살아온 그가, 스스로도 용인할 수 없는 정신적 무너짐에 이른 것이다.


 

 폐인처럼 스스로를 학대하며 시간을 보내던 멘도사에게 가브리엘 신부가 찾아온다. 가브리엘은 멘도사에게 속죄의 삶을 시작해보라고 설득한다. 다름아닌 멘도사가 노예로 팔아넘기던 과라니족을 위한 헌신을 함께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멘도사에게는 두 가지 장벽이 있었다. 첫째로 자신이 여전히 용서받지 못할 인간이라는 죄책감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 둘째로 가브리엘을 따라간다 해도 과라니족이 원수와 같은 자신을 받아줄 리 없다는 점이 그것이었다.



 멘도사는 과격한 자신만의 방식을 선택한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상징인 갑옷과 무기들을 허리에 멘 채 과라니족의 아찔한 절벽을 기어오른다. 그런 쇳덩이들을 매단 채 등반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이었다. 그는 미끄러져 떨어지면 다시 내려가 오르기를 반복한다. 과라니족이 자신을 받아줄 지는 보장할 수 없다. 아마 멘도사는 남의 시선 따위는 의식하지 않았을 것이다. 절망의 밑바닥에 떨어진 그가 생을 이어갈 마지막 방법으로 택한 속죄의 방법이 이것이었다.


 무척이나 안쓰러우면서도 위험 천만한 장면들이 이어진다. 드디어 로드리고 멘도사는 초죽음이 된 채로 신부들과 함께 폭포 위에 도달했고, 그를 향해 과라니족 사람들이 접근한다. 부족의 원수요, 살인자요, 인신매매자인 그를 향해 한 과라니족 사람은 거친 말들을 쏟아낸다. 그리고 칼을 꺼내어 로드리고의 목에 겨눈다. 긴장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원주민은 멘도사를 베지 않고 오히려 멘도사가 짊어진 갑옷 무더기의 밧줄을 잘라낸다. 과거의 삶을 상징하던 갑옷 무더기는 멘도사를 떠나 저 아래로, 폭포 상류로 굴러 떨어져 더이상 보이지 않게 된다.  

 

 멘도사는 그 순간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웃기도 한다. 그가 우는지 웃는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항상 냉철하고 인정미 없었던 남자가 마치 어린아기처럼 울어댄다. 아니 환하게 웃으며 운다.

 


 과라니족 사람들은 그런 멘도사를 보고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우스워한다. 가브리엘 신부는 멘도사에게 다가와 그를 꼭 안아준다. 그의 회개가, 속죄가 이루어진 순간이었고, 그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첫걸음이 허락된 순간이었다.




 우선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선교사들은 모두 로마 가톨릭 아래에 있는 예수회 소속이다. 온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으로 인해 가톨릭의 근간이 흔들릴 무렵, 자기반성과 엄격한 복종, 공격적인 선교활동을 지향하던 수도회가 바로 예수회였다. 영화 초반, 가브리엘 신부가 죽음을 각오하고 폭포를 올라가 무기를 든 과라니족들 앞에서 오보에를 연주하는 모습은 예수회의 가치와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개신교인들에게 이 영화는 부분적으로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특히 칼과 갑옷을 얽어맨 뭉치를 메고 절벽을 기어오르는 로드리고의 '고행'은 가톨릭에는 있지만 기독교에는 없는 종교적 의식이다. 기독교는 고행을 권하지 않는다. 구원과 속죄에 대한 명확한 입장 때문이다. 기독교는 고행이 속죄를 대신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나 역시 개신교인으로서 이에 동의한다. 우리의 흉악한 죄는 그 누구도 대신 해결하여 줄 수 없다. 애써 망각한다 해서 그 죄가 없어지지 않는다. 죄를 지은만큼 선한 일을 더한다 해서 그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죄를 지은만큼 나를 학대한다 해서 그 죄가 없어지지 않는다. 내 기분이 나아진다 해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죄는 실체이지 감정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죽는다 해도 죄는 남아 있다. 죄는 인간의 노력으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흠 없고 고귀한 예수의 보혈 뿐이다. 여기에 다른 공로가 더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취를 더럽히는 일이고, 이는 '행위 구원'을 추구하는 것으로 간주될 뿐이다. 우리가 행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온전히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그 큰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의 용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 복음이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구원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삶이 누구에게나 쉬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당신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어요."라는 말이 어떤 이에게는 큰 절망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다른 이에게는 더 큰 죄 짓기를 허락하는 면죄부 정도로만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기독교 웹툰 사이트 에끌툰 (https://eccll.com) 에 올라온 「구원을 팝니다」(김영화 그림, 김민석 글) 라는 작품에서는 이현실이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녀는 차량을 후진시키다 실수로 자신의 딸을 숨지게 한 비극적인 과거를 갖고 있다.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어 몇 번이고 자살 시도까지 했던 그녀에게 집요하게 접근하는 전도자는 "예수님이 당신의 죄값을 모두 치러주셨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현실씨에게는 그런 말이 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결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누가 감히(!) 나를 용서한단 말인가? 그녀에게 예수의 속죄는 궤변에 불과했다.


 "혜인이를 죽인 내가, 평생 벌 받는 삶이라도 살 수 있다면 그나마 견딜 판인데... 예수가 뭔데 나 대신 죄값을 치뤄요?"


 정 반대의 극단도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영화 「밀양」(2007)에서 주인공인 이신애는 자기 아들을 유괴하여 죽인 범인과 면회를 하게 된다. 유괴범의 말은 놀랍다. 자신은 감옥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 마음이 편안하다는 것이다. 신애는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어떻게 용서를 해요? 용서하고 싶어도 난 할 수가 없어요. 그 인간은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데...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는데,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그 인간을 먼저 용서할 수 있어요?"


 구원은 원수되었던 하나님과의 화목이지만,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들과, 모든 피조물들과의 화목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출발은 이 모든 것들을 지향하고 포함한다. 하나님과는 화목했는데,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과는 화목했는데, 이웃에게 저지른 죄를 무시하는 새 삶은 존재할 수 없다.



 나 자신과의 화목

 로드리고 멘도사는 이현실씨처럼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었다. 처음에 그는 가브리엘 신부의 제안에 "내 죄는 참회할 길이 없다고!"라고 소리쳤다. 멘도사에게 새 인생은 꿈꿀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앞에는 자신의 죄악이 커다란 벽처럼 서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멘도사는 더이상 도망치지 않고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정직하게 대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앞서 그 내용을 설명했듯- 너무나 어렵고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멘도사의 고행을 지켜보기 힘들었던 후안 필딩 신부(리암 니슨)는 가브리엘에게 이렇게 제안한다.


 "신부님, 이정도면 충분히 참회를 했고, 다른 형제들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 않나... 우리는 민주주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받드는걸세."


 누구보다 멘도사의 내적 고통을 공감하는 가브리엘은 그의 육체적 고통보다 더 큰 죄의 무게를 보고 있었다. 멘도사가 인정할 때까지, 아니 하나님이 인정하실 때까지 그는 그 과정에 간섭할 수 없었다. 기독교인으로서 고행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반드시 시퍼렇게 살아 있는 나의 죄악들, 나의 어두웠던 과거들을 진지하게 대면하는 것이 필요하다. 동시에 그 모든 죄악을 씻어주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반드시 우리의 죄를 다루실 것이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 그 죄도 용서하실만큼 큰 희생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실 것이다.


 이를 위해 교회는 스스로의 모습 때문에 복음 앞에서 주저하는 사람을 인내와 사랑으로 용납할 필요가 있다. 그가 교리를 받아들이도록 무작정 강요해서는 안된다. 로드리고의 속죄 과정을 옆에서 도와주고 지켜봐주었던 가브리엘 신부와 같이, 우리는 고통받고 있는 사람과 동행하고 대화의 상대가 되어주고 기도해주어야 한다.


 이웃과의 화목

 뿐만 아니라 멘도사는 과라니족들에게도 용납을 받아야 했다. 그는 이 현실도 피하지 않았다.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멘도사가 과라니족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각오하고 절벽을 올랐다는 것이다. 부족들을 죽이고 팔아넘긴 살인마를 마주대할 때 과라니족들이 가만히 있을 것인가? 아무도 보장할 수 없었다. 가브리엘 신부도 도와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멘도사 자신이 갑옷 더미를 짊어진 채 흙투성이 모습으로 그들 앞에 서면 원주민들은 용서해 줄 것인가? 그는 그것을 기대했을까? 영화에서 말해주지는 않지만 멘도사는 그것을 거의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용병으로서, 노예상인으로서 생사를 오갔던 그는 세상의 비정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남은 자신의 생명의 불씨를, 무의미하게 보이는 행위에 모두 걸었다. 가브리엘 신부가 죽음을 각오한 채 폭포를 올라왔던 것처럼 멘도사 역시 스스로 죽은 목숨이라 생각하고 그 행위를 한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 해결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내 죄가 씻음받았다고 해서, 과거에 저질렀던 죄악의 열매들을 깡그리 무시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 만약 누군가가 진짜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그는 새로운 출발에 대한 갈망으로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자신이 범죄를 저지른 이웃과 사람들에게 가서 철저히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면 이 단계도 자연스러워야 한다. 앞서 언급한 영화 「밀양」은 이런 부분들을 무시하는 현대의 값싼 복음을 지적하고 있다.


  예배나 간증집회를 통해 종종 흉악범들의 회개 스토리를 듣게 된다. 그러나 나는 그 이야기에서 피해자들의 삶과 고통이 거의 언급되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씁쓸함을 느낀다. 그 범죄자가 회개한 것은 물론 귀한 일이지만, 그가 평생에 걸쳐 트라우마와 원한 속에서 괴로워할 피해자들을 찾아갔는지, 용서를 구했는지는 설교자의 시나리오에서 과감히 편집된다. 그저 그 살인마가 극적으로 교회의 멤버가 되고 '영적인'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 중심 내용이다. 그래서 나는 그 흉악범이 진정으로 '새 출발'을 한 것인지 궁금해질 때가 많다.


 구원은 원수되었던 하나님의 관계, 적대적이던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피폐했던 나 자신과의 관계가 모두 회복되는 것이다. 회개가 지난 날 내가 걸어왔던 모든 길들을 부정하고 유턴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이라면, 이 세 가지 관계들 중 어느 하나도 무시할 수 없다. 이 중 하나가 빠지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가 아닐뿐더러 진정한 회개도 아닌 것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 부분은 반드시 해결되고 청산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새 삶이 된다.


 멘도사는 스스로 용서받지 못할 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라니족은 그를 죽이는 대신 그가 저지른 죄악의 상징들인 갑옷 무더기들을, 그것들이 연결된 밧줄을 끊어주었다. 폭포 상류로 떨어져 깊이 잠겨버린 쇳덩이들을 바라보던 멘도사의 어린아이 같은 울음 소리, 나는 그 깊이를 공감할 수 있을까? 그런 측면에서 혐오스러운 인생을 살아온 로드리고 멘도사의 진정한 회개, 그의 새로운 출발의 장면은 지금도 내 눈시울을 젖게 한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눅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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