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닐라라떼 Feb 20. 2023

나만 모르는 죽음

「식스 센스」, 1999

<강력한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위에 빨간 글씨로 크게 적어 놓았지만 다시 한 번 경고하려 한다. 아직 이 영화를 못보신 분, 결말에 대해 듣지 못하신 분, 특히 앞으로 감상할 계획이 있는 분들은 과감히 백스페이스를 누르시기 바란다. 이 영화는 명작이지만 마지막 반전이 그것을 완성하는데 90% 이상의 지분을 가진다. 그리고 오늘 이 영화를 소개하며 마지막 부분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고보니 영화 관련 다섯 번째 글인데, 모두 비슷한 시기 (1990년대 후반)에 개봉한 작품들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다. 돌아보면 그 시대의 영화들은 다 깊이있는 명작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간략히 줄거리를 살펴보자. 아동 심리학자인 말콤(브루스 윌리스)은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며 연구와 치료를 해 왔다. 그는 워커홀릭이라 불릴 정도로 자신의 일에 몰두했고, 지역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표창까지 받는다.



모처럼 아내 안나와 조촐한 파티를 하며 즐거움을 나누던 도중, 말콤은 자신의 집 욕실에 외부인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욕실에서 벌거벗은 채로 권총을 들고 있던 청년은, 소년시절 말콤으로부터 심리치료를 받았던 사람이었다.



말콤은 당시 자신이 그 소년을 성공적으로 치료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창백한 표정의 청년은 "나는 실패작이야"라는 말과 함께 말콤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총에 맞아 괴로워하는 말콤을 보며 그 청년은 자신의 머리에도 총구를 겨누고 자살해버린다.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 사건은 말콤에게도, 아내 안나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말콤은 더이상 아동 치료를 하지 않았고, 안나와의 관계도 급속도로 냉랭해졌다. 둘 사이는 더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어느날 말콤에게 새로운 환자가 맡겨진다. 말콤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 소년의 증세가 자신에게 총을 쏘았던 청년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고는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 소년의 이름은 폴. 폴은 귀신을 보는 아이였다. 본인이 보고싶지 않아도 귀신은 자기 앞에 나타나 원한을 토해내며 말을 걸어오기 때문에 어린 폴은 엄청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다. 귀신은 대부분 죽을 때의 모습 그대로 나타났고, 그 광경이 적잖이 끔찍하다. 총을 맞아 뒤통수가 거의 날아간 귀신, 손목이 칼로 흉칙하게 그어진 귀신, 목이 매달린 채로 자신을 쳐다보는 귀신...



말콤은 폴과 상담을 하며 귀신에 대해 질문한다. 이 과정에서 나오는 폴의 대사는 오늘 글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저는 죽은 사람들을 봐요."

"귀신들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몰라요."

"귀신들은 자신이 보고싶은 것만 봐요."


I see people, they are dead.

They don't know they're dead.

They only see what they want to see.


처음에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말콤은 폴과의 시간을 보내며 점점 폴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무작정 귀신을 겁내지만 말고 찬찬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폴에게 조언한다.



마침 계속 구토를 하며 우는 여자아이 귀신이 폴을 찾아온다. 폴은 그녀에게 무엇을 원하냐고 용기내어 물어본다. 그러자 여자아이 귀신은 자신을 독살한 범인이 촬영된 비디오 테이프가 있는 곳을 알려주고 폴은 그 테이프를 그녀의 아버지에게 전달함으로써 한을 풀어준다. 귀신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된 폴은 예전보다 정신적으로 훨씬 성숙해진다.



말콤은 이제 상담치료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아내와의 관계가 냉랭해진 사실을 알고 있는 폴은 "아내분이 잠들었을 때 말을 걸어보세요."라는 조언을 말콤에게 건넨다.



말콤은 잠들어 있는 아내 곁에서 자신의 솔직한 마음과 그동안의 미안함을 털어놓는다. 그런데 잠든 아내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온다.


"왜... 왜 나를 버리고 먼저 떠난거에요?"


그 말을 이상히 여긴 말콤은 자신의 결혼반지가 소파 밑에 있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설마, 설마하며 자신의 배를 쳐다본 말콤은 그 부위가 온통 피로 물들어 있다는 것을 보게된다. 그렇다. 말콤은 당시 그 청년의 총에 맞아 이미 죽었었고, 그동안 자신이 귀신인지도 모른채 돌아다녔던 것이다.



여기서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진다. 아내와의 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이유, 폴의 어머니가 말콤의 격려에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던 이유, 오직 귀신을 볼 줄 아는 폴과만 대화가 가능했던 이유, 소파에서 잠든 아내가 늘 결혼식 비디오를 틀어놓았던 이유... 영화는 곳곳에서 이런 절묘한 설정을 해놓았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1년의 시간동안 아내와 대화가 끊겼는데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내 뿐 아니라 (폴을 제외한) 다른 이들과의 소통도 불가능했을텐데 어떻게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단 말인가? 해답은 폴이 말콤에게 던진 대사에 있다.


"귀신들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몰라요."

"귀신들은 자신이 보고싶은 것만 봐요."


바로 이것이 이유이다. 말콤은 귀신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도 몰랐고, 아내와, 타인과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인지할 수 없는 사람들의 행동을, 단지 차가운 반응 정도로만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는 이미 죽은 존재였음에도 오직 자신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고 어떤 인간도 예외가 없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육체의 죽음 외에 다른 죽음이 있다고 말한다. 에베소서 2장 1절은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의 상태를 '죽음'으로 선언한다. (한글 번역이 문맥을 명확히 살리지 못한 관계로 NIV번역으로 살펴보자)


AS for you, you were dead in your transgressions and sins
너는 너의 허물과 죄로 죽었었다.


즉, 예수를 알기 전 인간의 상태는 '죽음'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비유적인 표현으로 종종 사용한다. "늘 정의롭던 그는 타락했다. 내가 알던 그는 죽었다."와 같은 표현이 그런 예이다. 복음서에서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나온 "네 동생은 죽었다 살아났으며"(눅15:32)라는 아버지의 말도 동일한 맥락이다. 그러나 에베소서 2:1의 '죽음'은 결코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실존을 드러내는 선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전, 우리는 실제로 죽은 존재였다는 것이다.


언뜻 동의되지 않는다. 왜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을 향해 자꾸 죽었다고 말하는가? 하나님을 믿기 전에도 나는 학교생활을 했고, 친구들과 활발하게 뛰어놀았으며 나름 착한 일도 하며 살았다. 나는 살아있었다! 그런데 죽었다니?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죽음이 육체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태초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창1:27). 하나님의 형상이란 겉모습 뿐 아니라 그분의 인격까지 모두 포괄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닮은 창조의 모습답게 최초의 인간인 아담에게 세상을 다스리는 사명을 주셨다(창1:28). 아담에게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그분의 생명과 사랑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이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우리는 온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과 누리는 이 사랑의 관계 속에는 결핍이나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연결되어 있을 때만 그분께서 창조하신 본연의 생명력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아담은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뱀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께서 금하신 영역, 즉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고 반역의 길을 선택했다. 그 순간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 꽃이 꺾여진 것처럼 아담도 하나님의 뿌리에서 떨어져 나가버렸다. 하나님과 최고의 사랑을 누리던 아름다운 삶은 '단절'이 되었다. 이것이 영적 죽음이다.


영적 죽음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만 하도록 창조된 인간이 그 본질적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엡4:18)


그리고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인류도 동일한 저주 아래 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5:12)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에 무감각하게 되었고 그분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1:28)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행하기는 커녕, 그분이 미워하시고 심판하시는 열매들만 맺게 되는 모습으로 타락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14:1)


인간에게는 영원한 형벌의 운명만이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살후1:8-9)



이러한 영적 죽음에 대해 존 스토트 목사는 아래와 같이 서술했다. 주1)

기독교적 고백이라곤 전혀 없는 사람,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거부하는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그들을 구원하지 않으셨다면 죽어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 그렇다. 실제로 우리는 바로 이것을 말해야 한다. 몸도, 정신도, 성격도 아닌 가장 중요한 '영혼'이라는 영역에서 그들에게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눈멀었고, 성령의 음성에 귀먹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전혀 없으며, 그분의 인격적 실재에 대한 민감한 인식도 없고,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으면서 하나님을 향해 영혼이 달려가지도 않고, 그분의 백성들과 교제를 나누고자 하는 갈망도 없다.그들은 시체처럼 하나님께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없는 삶은 (그 사람이 아무리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깨어있다 해도) 살아 있는 죽음이며, 그런 삶은 사는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죽은 것이라고 주저 없이 단언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존재론적이다. 기독교가 개인의 노력과 수양을 통한 구원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늘날 세상의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교회의 도덕 수준을 나 역시 깊이 개탄하지만) 구원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인격을 수련하여 만들다보면 닿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먼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인격이 좋은 귀신이 될 뿐이다. 예수께서 선한 의도로 자신을 찾아온 유대인 지도자 니고데모에게 "네가 거듭나야(다시 태어나야) 하겠다"(요3:3)는 말씀부터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율법의 지식과 인품과 사회적 지위가 뛰어났던 니고데모는 "내가 다시 모태로 들어갈 수도 없는데요?" (요3:4) 라고 질문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 나라를 전혀 감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하나님을 모른 채 건강하고 활기차게 사는 이들, 왕성한 지식 활동을 하는 이들, 훌륭한 인격을 갖춘 이들, 별 부족함이나 문제의식 없이 사는 이들이 '죽은'상태라는 말을 이제 이해하겠는가? 오늘 영화에서 나온 폴의 말을 한 번만 더 상기해 보자.   


"귀신들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몰라요."

"귀신들은 자신이 보고싶은 것만 봐요."


귀신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과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그럼에도 귀신들은 자신이 산 자들과 공존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말을 걸었을 때 반응이 없어도, 스스로가 끔찍한 형체로 돌아다니면서도 그들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며 살아(?)간다. 믿고 싶은 것들만 믿는 것이다.


복음의 출발은, 하나님을 알기 전 우리의 상태가 이와 같다는 사실을 소름끼치게 인정하는 자리에서 시작한다. 기독교를 독선적이고 편협하다고 비난해도 이 부분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형상에 대해 '선하다'고 분명히 말하지만, 타락한 존재론적 처지에 관해서는 조금의 양보도 하지 않는다. 우리의 상태는 몸에 오물이 튀었거나, 병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감각체계 자체를 잃어버린 시체요, 귀신이다. 귀신을 어떻게 미화할 수 있겠는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 즉 자신이 바로 귀신이었다는 사실을 말콤 스스로 깨닫는 장면은 -「식스 센스」가 여타 공포영화처럼 노골적인 호러 장면이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을 오싹하게 만든다. 자신의 존재론적 정체성에 대한 자각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음을 깊이 깨달을수록 큰 감격과 함께 이와 같은 오싹함을 느끼게 된다. 아래와 같은 탄식을 내뱉으며 말이다. 그것이 정상적인 반응이다.


"나는 이전까지 시체였구나, 귀신이었구나! 나는 죽을 뻔 한게 아니라 죽어있었구나!"






주 1) 「BST 에베소서 강해 -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 존 스토트 (IVP)



매거진의 이전글 절망이라는 안락함 속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