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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라떼 Jan 25. 2023

절망이라는 안락함 속에서

「쇼생크 탈출」, 1994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탈옥을 주제로 한 영화나 시리즈물은 너무나 많아서, 이를 하나의 장르로 삼아도 될 정도이다. 1973년 「빠삐용」부터 2005년 「프리즌 브레이크」까지, 죄 없는 주인공이 누명을 쓴 채 가장 경비가 삼엄한 감옥에 들어가 그 곳에서 탈출하는 공통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포악한 간수들과, 주인공의 운명을 손에 쥔 교도소장, 나를 적대하는 죄수와 친구가 되어주는 죄수... 그들 사이에서 탈옥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과정은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오늘 소개하려는 「쇼생크 탈출」도 이와 동일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감방생활 자체는 소재일 뿐,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꽤 심오하다. 오늘은 그 내용을 살펴보려 한다. 


촉망받던 은행 부지점장 앤디(팀 로빈스)는 아내의 불륜을 목격한다. 그는 아내와 정부를 향한 살인의 충동을 느끼지만 실제로 죽이지는 못하고 술을 들이마신 채 잠이 든다. 다음날 앤디는 아내와 불륜남이 누군가로부터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그 범인이 자신이라는 누명을 쓴 채 체포된다. 앤디는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지만 법정은 그에게 종신형을 선고하고 악질 죄수만을 다루는 악명높은 쇼생크 교도소에 수감시킨다. 


쇼생크는 죄수들에게 인간 취급을 해 주지 않는 곳이었다. 신입 죄수 중 하나가 "밥은 언제 먹습니까?"라는 질문을 했다가 교도소 보안과장에게 배를 얻어맞는다. 


"우리가 처먹으라고 하면 처먹어. 똥을 싸라고 할 때 싸고 오줌을 싸라고 할 때 싸. 내 말 알아들었냐? 이 역겨운 쓰레기야."



이어 이중적인 기독교 신자 교도소장 노튼은 재소자들에게 경고의 환영인사를 해 준다.  


"난 두 가지를 믿는다. 규율, 그리고 성경이다. 너희들은 여기서 둘 다 받게 된다. 신을 믿어라. 너희들의 숨통은 내 것이다. 쇼생크에 온 걸 환영한다."


여기서 잠시 영화의 제목을 살펴보자. 한국판 제목은 쇼생크 '탈출'이지만, 영어 원제는 Shawshank 'Redemption' (쇼생크 구원) 이다. 왜 Escape나 Break 같은 단어를 쓰지 않았을까? Redemption이라는 단어는 기독교 용어로 불릴 만큼 종교적인 목적으로 사용된다. 쇼생크의 어떤 점으로부터 '구원'이 필요하다는 말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절망'이라는 속박이다. (여담이지만 이 속박을 시행하는 주체로 기독교가 이용된다는 것도 이 영화가 말하는 중요한 포인트이다)


장기, 무기수들이 살아가는 쇼생크는 철통 같은 보안과 경비가 유지되는 곳이었다. 쇼생크의 두껍고 높은 벽은 이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희망을 짓누른다. 여기서 복역하는 대부분은 쇼생크의 삶에 익숙해져 있다. 희망이 없는 이곳에서 권력을 만들고, 희망이 없는 이곳에서 특기를 개발하고, 희망이 없는 이곳에서 관계를 형성하여 일상을 영위한다. 이곳에 처음 발을 디딘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지만 10년, 20년, 30년을 지낸 이들에게는 쇼생크라는 절망의 공간만큼 안전한 곳이 없다. 거추장스러운 희망을 내려놓고 자신을 둔감함에 익숙하도록 만들면 그들에게는 쇼생크가 자신들의 모든 세계이고, 이곳을 벗어나는 것만큼 두려운 것은 없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영화를 통해 브룩스라는 노년의 장기복역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50년간 수감생활을 하던 얌전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감옥 안에서 작은 서고 관리를 담당하던 브룩스는 어느날 가석방이 결정되었다는 통보를 받게 된다. 그는 이제 자유다. 그러나 브룩스는 쇼생크를 떠나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할 수만 있다면 이 감옥에 더 있고 싶었다. 급기야 그는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해 동료 죄수를 잡고 인질극을 벌인다. 추가적인 범죄를 저지르면 쇼생크에서 더 오래 복역할 수도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한바탕 해프닝이 끝난 후 브룩스는 예정대로 풀려나고, 사회에 나와 마트 계산대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미 너무나 많이 바뀌어버린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채 목을 매 자살하고 만다.  


"참 이상하지, 이 감옥 벽들말야. 처음에는 싫어하다가 곧 적응하게 되어버리고 어느 순간엔 의지하게 되거든. 기대지 않고서는 못 살게 돼."


브룩스의 가석방 소동 이후 재소자들이 나눈 대화처럼, 쇼생크는 무시무시한 감옥이지만, 여기에 적응한 이들에게는 쇼생크보다 더 안락한 곳이 없었다. '절망'이라는 안락함 말이다. 



반면 쇼생크에서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끊임없이 희망을 노래하는 인물이 있었다. 다름아닌 주인공 앤디다. 앤디는 억울하게 20년을 복역하는 기간에도 자유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는 감옥 생활의 절망에 익숙해진 동료 재소자들에게 여러 방법으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앤디가 방송실에 들어가 문을 잠궈놓고 교도소 전체에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이 울려퍼지게 한 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이다. 



이 영화의 화자인 레드(모건 프리먼)는 이 때를 아래와 같이 회상한다.


난 지금도 그 이탈리아 숙녀분들이 뭐라고 노래했는지 모른다. 
난 그것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 
그 때문에 가슴이 아픈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 목소리는 그 회색의 공간의 어느 누구도 감히 꿈꾸지 못했을 만큼 하늘 위로 높이 솟아올랐다. 
마치 아름다운 새 한 마리가 우리가 갇힌 새장에 날아들어와 그 벽을 무너트린 것 같았다. 
그리고, 아주 짧은 한 순간, 쇼생크의 모든 사람은, 자유를 느꼈다.


앤디는 무단으로 방송실을 점거한 대가로 2주간의 독방 신세를 지게 된다. 이후 레드와 앤디의 대화를 잠시 살펴보자.


죄수들: 독방 고생 많았지?

앤디: 아니, 순식간이었지. 모차르트와 함께 있었거든.

헤이우드: 독방에서 음악도 들었단 말야? 축음기도 함께 넣어줬나?

앤디: 머리로 듣지. 내 가슴에도 울리고. 그래서 음악이 아름다운거야. 이걸 뺏어갈 수는 없거든. 음악에 대해 그렇게 안 느껴봤어?

레드: 글쎄다… 젊었을 때 하모니카를 불긴 했지. 이젠 흥미를 잃었지만. 여기선 부질없는 짓이니까.

앤디: 아뇨, 이런 곳일수록 음악이 필요하죠. 잊지 않게 해주니까요.

레드: 잊어버려? 뭘?

앤디: 진짜 세상이요. 차가운 교도소 말고.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말이에요. 그걸 내 마음 속에 담아두면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고 아무도 손댈 수 없어요. 내 것이니까요.

레드: 네 것이 뭔데?

앤디: 희망이요.

레드: 희망? .....
얘기 하나 해줄까 친구. 희망이란 위험한 거야. 사람을 미치게 만들지.
이 안에선 아무 쓸모도 없어
.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좋아.


시간이 흐르고 앤디는 교도소장에게 처절한 배신을 당한 후 사람이 견디기 힘든 2개월간의 독방 처분을 받는다. 갖은 고초를 겪은 앤디는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레드에게 오히려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앤디 :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지후아타네호에요. 멕시코에 있어요. 태평양에 접한 작은 마을이죠. 멕시코인은 태평양을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기억이 없다'에요. 그곳에서 남은 여생을 살고 싶어요. 아무 기억도 없는 따뜻한 곳... 바닷가에 조그만 호텔을 열고 낡은 배를 사서 깨끗이 수리해서 손님들을 태우고 낚시나 하는 거죠.


레드 : 자신을 학대하지 마, 앤디. 이뤄질 수 없는 꿈이야. 멕시코는 저 멀리 있고 넌 여기 있어. 그게 현실이야.


앤디: 네, 맞아요. 그런 거죠. 가려는 곳은 저긴데 난 여기 있다는 거.
간단한 선택에 달린 것 같아요, 
부지런히 사느냐, 부지런히 죽느냐.


'희망 고문'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도 '희망하는 것'은 고문과 같은 고통일 수 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개인의 상황들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한껏 몸부림쳐보아도 열매가 보이지 않는 사역들까지, 우리는 수많은 쇼생크의 벽 앞에 주저앉게 된다. 그리고 차라리 희망따윈 포기하고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믿으며 살고 싶은 유혹도 느낀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우리의 한계를 인정해야 할 순간도 있을 것이다. 최선 대신 차선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도 올 것이다. 또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이들에게 무작정 희망을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잔인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희망이 있던 빈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절망'이라는 존재의 무시무시함이다. 쇼생크가 수많은 장기수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절망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절망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비전을 꿈꿀 수 있는 기능을 마비시킨다. 우리의 상상력을 죽여버리는 것이다.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다. 남유다는 하나님께 거역을 일삼다가 결국 바벨론에게 망했다.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성전은 파괴되었으며 이스라엘의 종교는 철저히 농락당했다. 백성들은 포로로 적국에 끌려갔다. 바벨론에 도착한 포로들은 문화충격을 받았다. 화려한 제국의 도심과 종교 문화는 그들에게 실로 놀라웠다. 그곳의 신은 과연 팔레스타인을 제패할만한 규모와 수준이었다. 이 모든 장관을 본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 자부했던 성전이 얼마나 초라했던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방 신에게 패해버린 것일까? 아니, 하나님이 애초에 존재하기는 했던 것일까? 국가의 멸망을 겪고 약소 민족으로 전락한 그들은 맹목적인 선민 사상의 판타지에서 벗어났다. 거기에서 그치면 다행이었겠지만 그들의 정신세계가 반대급부로 급격하게 기우는 것은 문제였다. 유다 백성들 가운데서는 극단적인 회의가 전염병처럼 퍼졌다. 여호와 신앙을 간신히 지킨 사람에게조차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제국의 신들보다 위대한가?"에 대한 질문 앞에서는 주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벨론은 망하기는 커녕 승승장구했고 포로들은 남은 생애동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운명을 분명한 사실로 받아들여야 했다. 더이상 솔로몬 시절의 이스라엘은 없다. 영광의 날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자신들이 약소 민족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들에게 "아니야,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셔"라고 누군가 말했다면 아마 포로들은 실소하지 않았을까? 적나라한 현실이 여기 있는데 무슨 꿈같은 소리냐는 핀잔이 돌아왔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희망할 힘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긍정적인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현재의 고된 포로생활을 견디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마치 쇼생크 감옥 속의 죄수들처럼 말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 백성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진다. 오늘 살펴볼 이사야의 예언은 (신학자들 사이에서 '후기 이사야', '제 2의 이사야'라고 불리는) 이사야 40장 이후의 말씀이다. 후기 이사야서는 앞서 기술한 유다 백성들의 상황을 감안하고 읽을 때 그 문체의 과감성을 더 깊이 경험할 수 있다.


이사야는 무엇보다 최악의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노래한다. 그가 발견한 하나님은 (바벨론의 신에 패망한 작은 나라의 신이 아닌) '역사의 주관자'이신 분이다.  


누가 손으로 바닷물의 무게를 달아 보았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어 보았느냐?
누가 온 땅의 티끌을 그릇에 담아 보았으며, 저울로 산과 언덕을 달아 보았느냐? ......
여호와께는 많은 나라들도 통에 있는 한 방울의 물일 뿐이며, 저울 위의 티끌에 지나지 않는다.
주께는 바닷가 땅들도 먼지로 보일 뿐이다.......
여호와 앞에서는 모든 민족이 아무것도 아니며, 주께서 보시기에 민족들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하나님을 어떤 형상에 비교하겠느냐?
(이사야 40:12~18, 쉬운성경)


하나님은 위축되고 쪼그라든 이스라엘 포로들을 향해 "정신을 차려라, 눈을 똑바로 떠라. 너희가 자유인이든 포로든 나는 변하지 않는다. 내가 온 열방의 하나님이다. 내가 역사를 열고 내가 역사를 맺는다."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이 말씀을 믿어야만 했다. 하나님은 다른 모든 신보다 강하시며, 다른 신들처럼 사람이 조각하거나 운반할 필요가 없는 존재이시다.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권능이 넘치는 분이시다.


또한 이사야가 노래하는 소망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에만 있지 않았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얼마나 아끼시는지를 선포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며, 깊이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열방들을 향해 성난 파도처럼 넘실거리던 메시지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로 향하자 예언서의 문체는 한없이 애절한 러브레터로 바뀐다. 


나 야훼가 너의 하느님이다...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
그러니 어찌 해안 지방을 주고라도 너를 찾지 않으며
부족들을 내주고라도 너의 목숨을 건져내지 않으랴!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보살펴 준다.
내가 해 뜨는 곳에서 너의 종족을 데려오고,
해 지는 곳에서도 너를 모아오리라.
(이사야43:4~6, 공동번역)


너희는 늙어가도 나는 한결같다.
너희가 비록 백발이 성성해도
나는 여전히 너희를 업고 다니리라.
너희를 업어 살려내리라.
(이사야 46:4, 공동번역)


하나님의 말씀은 두려움과 위험, 상실감, 좌절감을 달고 살아가는 포로기의 백성들에게 주어졌다. 그들은 모든 것이 끝장났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실상 그들은 온 열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선이 고정된 대상이었다. 비록 잠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지만, 그것은 진실로 일시적인 것일 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그들을 품어주실 것이다.  


내가 잠깐 너를 내버려두었었지만,
큰 자비를 기울여 너를 다시 거두어들이리라.
내가 분이 복받쳐 내 얼굴을 잠깐 너에게서 숨겼었지만,
이제 영원한 사랑으로 너에게 자비를 베풀리라.
너를 건지시는 야훼의 말씀이시다. 
(이사야 54:7~8, 공동번역)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남은 운명이 '절망'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아니야, 너희들은 틀렸어. 나는 너희 생각과는 달라. 너희가 생각하는 계획은 내게 없어. 나는 더 높은 계획을 갖고 있어." 라는 말씀으로 감방에 갇힌 포로들의 편견을 부수신다. 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신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야훼의 말씀이시다.
"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듯 나의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이사야 55:8~9, 공동번역)


 그 계획은 단지 '영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사건으로 유다 백성들에게 주어질 것인데,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이스라엘로의 귀환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해 세계를 움켜쥔 패권자, 즉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을 움직이신다.


야훼께서 당신이 기름 부어 세우신 고레스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오른손을 잡아주어 만백성을 네 앞에 굴복시키고 제왕들을 무장해제 시키리라.
네 앞에 성문을 활짝 열어 젖혀 다시는 닫히지 않게 하리라...
나의 종 야곱을 도우라고 내가 뽑아 세운 이스라엘을 도우라고 나는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나를 알지도 못하는 너에게 이 작위를 내렸다."
(이사야 45:1~4, 공동번역)


이 구절은 역사적 사건을 사후에 서술한 것이 아니다. 이 선언은 하나님의 주권적 표현이다. 바벨론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하나님의 손아귀에 있으며, 그 왕도 하나님의 손 아래,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움직인다는 것을 본문은 강조한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는 자리로 초청받은 것이다. 




그러나 당시 얼마나 많은 유다 백성들이 이 말씀을 받아들였을까? 슬프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메시지를 허무맹랑한 소설로 여겼다. 예레미야의 혹독한 심판의 메시지 앞에서 슬퍼하지 못했던 백성들은, 이사야의 찬란한 소망의 노래 앞에서 즐거워하지 못했다. 월터 브루그만은 이사야 말씀을 다루며 아래와 같이 말한다.


"이사야는 외적인 정치 상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상상력을 되찾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외부로부터 오는 새로운 선물을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의 이성에 위배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도 믿지 못한다. 
 희망은 너무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주1)


결국 이 예언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소수인 '남은 자'들에게 주어졌다. '귀 있는 자'가 이 좋은 희망을 취한 것이다. 하나님의 희망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은 절망에 걸맞는 삶을 취했다. 영화에서 가석방 출소한 레드가 사회 생활에 적응기를 거치며 "40년동안 허락을 받고 오줌 누러 갔다. 허락 안 받으면 한 방울도 안 나온다." 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들은 절망이 지배하는 쇼생크, 인간성을 상실한 삶을 선택한 것이다. 




나는 '신앙이란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 삶으로 답하는 이들과 교제하며 감동을 받는다. 그들은 적어도 몇 개월, 수 년 이상 자기를 괴롭힌 문제를 통과하며 눈물과 고통을 토해낸 이들이었다. 나는 그런 사연을 들을 때마다 그들의 토로 속으로 빨려드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나의 미래는 어둠 뿐이라는, 하나님도 나의 문제는 해결해 주실 수 없다는 그들의 말에 공감을 넘어 동의까지 하고픈 충동도 경험한다. 


그러나 그러한 형제 자매가 어느 날 환한 얼굴로 와서, 자진해서 다시 호랑이 굴로 들어가 보겠다는 결심을 나눌 때, 나는 그들의 능력을 넘어선 존재가 그 안에 자리잡고 계심을 깨닫게 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떠한 낙심 속에서도 다음 희망을 생각해내는 것, 내 능력과 경험에 얽매이지 않고 온 열방을 통에 한 방울 물처럼 여기시는 분을 선택하는 것, 그 삶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진정한 모습 아닐까? 이런 측면에서 희망은 하나님 백성이 갖고 있는 속성 중 하나이다. 우리는 절망의 안락함 속에 안주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영화 말미에 레드에게 남긴 앤디의 편지를 마지막으로 이번 글을 맺을까 한다.


기억해요 레드. 
희망은 좋은거에요. 
어쩌면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몰라요. 
그리고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





주1) 「예언자적 상상력」, 월터 브루그만 (복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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