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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라떼 Jan 16. 2023

내 고향은 어디인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 1998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옛날 전쟁영화는 그랬다. 적군이 아무리 기관총을 난사해도 주인공 주변으로만 총알이 튀었고, 수류탄이 터져도 주인공은 파편 하나 맞지 않았다.

옛날 전쟁영화는 그랬다. 총에 맞아 죽더라도 외상은 가슴에 난 작은 총구멍과 흘러나오는 피가 전부였다.

옛날 전쟁영화는 그랬다. 총에 맞은 병사는 전투가 끝날때까지 숨지지 않았고,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손을 붙잡은 채 아내, 부모님, 자식, 친구들에게 실컷 유언을 쏟아놓을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


1998년, 이처럼 딱딱한 전쟁영화의 틀을 박살내버린, 스필버그 감독의 명작이 나왔으니 그것이 바로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 (Saving Private Ryan)」였다. (사족을 보태자면 내 인생 No.1에서 아직까지 내려오지 않고 있는 영화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초반 30여분간의 오마하 해변 상륙 전투씬으로 유명하다. 피가 튀고 두개골이 박살나고 사지가 절단되고 내장이 흘러나오는 장면이 여과없이 연출된다. 총에 맞은 병사들은 고통스러워 할 틈도 없이 막대기처럼 픽픽 쓰러진다. 실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던 사람들은 이 장면에서 당시와 달랐던 것은 냄새 뿐이었다고 인터뷰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이 영화는 고전 전쟁영화의 허황된 연출을 뒤엎고 전쟁의 참혹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밀러 대위(톰 행크스)는 이 오마하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그리고 그에게 다음 임무가 내려온다. 미 국방부에서, 네 형제가 참전했다가 세 명이 전사해버린 가정을 불쌍히 여겨, 그 집의 막내 아들인 제임스 프란시스 라이언 일병을 찾아 집으로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라이언은 노르망디 적진 어딘가에 투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어서 위험한 수색이 불가피했다. 이를 위해 밀러 대위를 지휘관으로 한 8명의 분대가 투입된다.



병사들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적진 속으로 이동하지만, 이내 불평이 나오기 시작한다. 라이언도 딱하고 그들의 홀어머니도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명을 살리기 위해 8명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이 옳은가? 8명의 병사들에게는 부모가 없는가?



 밀러 대위는 퉁명스럽게 "명령이니 따를 뿐이다"는 한 마디만 하고 반론을 인정하지 않는다. 무뚝뚝하기 그지없고 자신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는 대위에 관해 부대원들은 궁금해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대장이 입대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맞춰보자며 돈을 걸고 내기를 하기 시작한다.



예상대로 작전은 쉽지 않았다. 이동 중 적의 기관총 진지를 발견한 부대는 훗날 연합군에게 화근이 될 것을 우려해 기습 공격을 시도한다. 작전은 성공하여 기관총 벙커는 점령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의무병이 총에 맞아 전사하고 만다. 부대원들은 통탄함을 견디지 못한다. 밀러 대위도 부하들이 보지 않는 곳으로 가서 홀로 울음을 삼킨다.



분노한 부대원들은 살아남은 독일군 포로를 처형하려 한다. 그러나 밀러 대위는 부하들의 분노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포로의 눈과 손을 결박한 채 살려서 보내준다.



이에 심사가 뒤틀린 레이번 일병이 항명하고, 자기는 이 부대를 떠나 다른 임무를 수행하겠다며 짐을 챙긴다. 일탈을 용납하지 않는 호바스 중사는 그의 행동을 탈영으로 간주하여 총을 겨누고 이를 말리려는 이들과 뒤섞여 부대원들은 아수라장이 된다.





"내 신상에 걸린 상금이 얼마지? 300달러?"



밀러 대위는 감정이 격양된 부대원들의 시선을 끈다.


"난 학교 선생이었다. 펜실베니아 애들리라는 곳에서 영작문을 가르쳤지.

지난 11년간 토머스 고등학교에 있었다. 봄에는 야구 코치도 했다."


부대원들은 격렬한 전쟁을 통과해 온 이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밀러 대위의 과거를 듣고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본다.



"고향 사람들은 나를 인정해줬지만, 지금 여기에서의 나는 알지 못해.

나는 많이 변했어.

때로는 아내가 내 모습을 못 알아볼까 걱정도 돼.

오늘같은 일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


밀러는 레이번에게 다가간다.


"다른 곳으로 가고싶다고? 허락한다. 필요하면 증명서도 써 주지."


그리고 이어지는 대사는 나의 가슴을 쿵 하고 때렸다.


"살인을 할수록 내가 고향에서 멀어지는 것을 느껴."    


전쟁터는 사람을 죽이는 곳이고 군인은 사람을 죽이는 직업이다. 밀러 대위는 그 참혹한 시스템의 한 가운데에 엉켜 살고 있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는 독일군 포로를 풀어주기로 결정했고 후환을 남겨버렸다. (실제로 영화 후반부에 그 포로는 제대로 화근이 되어버린다)


"살인을 할수록 내가 고향에서 멀어지는 것을 느껴."


밀러 대위의 이 말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이렇게 해석해 보았다.


"나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팬실베니아 애들리의 밀러이고 싶다."




참전 용사들의 인터뷰나 회고록을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우리는 전쟁터가 비인간화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안다. 전쟁터는 사람이 사람을 아무렇지나 않게 죽이는 곳이다. 인간의 외형이 터지고 어그러지는 모습, 피가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헤쳐가며 살아남아야 하는 곳이다. 명령에 따라 마을 전체를 학살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곳에서 하루, 이틀, 한 달, 일 년을 살게 되면 총탄이 날아오는 상황에도 무덤덤해지고 사람 하나를 죽이는 일에도 감각이 무뎌진다. 오히려 방아쇠를 당겨 상대 병사의 머리통을 날렸을 때 묘한 쾌감이 전달되기도 한다. 베트남 전쟁에서 살인병기 역할에 익숙해진 병사들은 집으로 돌아가서도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한 채, 정신병, 알콜중독, 자살과 같이 안타까운 결말을 맞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처럼 전쟁터는 비인간적인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나도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살인마가 되는 것이 옳은가? 물론 그곳에서는 악마가 되는 것이 훨씬 편리하다. 전쟁터가 내 세계의 전부라면 말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곳에서 그러한 인간상은 설 곳이 없다. 자신이 저지른 살인이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라고 씻겨지는 것도 아니고,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머릿속에서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시간은 되돌아가지 않는다. 자신이 저지른 행위들은 자신의 삶 속에 녹아 그 행위에 걸맞는 사람으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한다. 개 같이 벌어 정승 같이 산다는 속담은 거짓이다. 개 같이 벌면서 가치관이 다 개가 되어버렸는데 돈을 벌었다 해서 어찌 정승의 삶을 살 수 있단 말인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우리 신자들도 마찬가지다. 가뜩이나 전쟁터로 비유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모든 면에서 부자연스럽고 어렵다. 정직하고 의로운 삶을 좇는 것은 바보처럼 느껴진다. 한 푼이라도 더 벌고 일 분이라도 더 절약해서 나와 가족들의 안정을 보장해야 하는 것이 지혜롭다. 가난한 자를 돌아보거나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은 순진하고 사치스런 일이다. 미디어와 매체는 음란과 폭력, 자극적인 유흥으로 가득하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연스럽게 이런 문화들을 누리고 있다. 반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경건의 시간, 예배의 시간은 따분한 것으로 치부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5:8) 라는 말씀은 말세를 사는 우리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요구받는 삶, 예수님이 제시하신 좁은길은 우리에게 종종 가혹하게 느껴진다. 편하고 자연스러운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삶을 따르기를 결심한 횟수만큼 좌절을 경험한다. 그러다보면 이런 의문이 올라오기도 한다.


"꼭 이렇게 고생할 필요 있어?

어차피 구원은 받은 것이고

마지막 부활의 날에 나는 영화롭게 변할텐데.

대충 살아도 되지 않을까?"


우리는 이런 착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하나님 나라가 최종적으로 임했을 때, 나 자신은 여태까지 살아온 행동양식과 관계없이 날개달린 천사와 같은 순수한 모습으로 뿅 하고 변할 것이라는 착각 말이다.


우리가 이미 예수를 믿고 천국행 티켓(?)을 받았으므로 이 땅에서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하나님의 나라 회복에 굳이 관심을 갖지 않아도, 탐욕스럽고 자아중심적인 나 자신을 부인하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아도, '그 날'이 올 때 모든 삶이 다 리셋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세와 천국을 이분화시켜 생각하는 것은 명백한 신학적 오류다. 만약 이것이 오류가 아니라면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기 위해 자신을 지키며 그 나라의 회복을 위해 몸부림 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어차피 그 날에 모든 게 단절되고 새롭게 바뀌어질텐데 말이다.


신학자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의 부활, 그리고 이후의 삶에 대해 과감한 글을 썼다. 거기서 그는 부활에 관한 고린도전서 15장(특히 58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을 해석하며 아래와 같이 말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육체의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그래도 괜찮아, 마지막에 가서는 육체가 없는 플라톤적 천국으로 가서 예수님과 함게 있게 될 거니까" 라고 말하게 하지 않고,
"우리의 존재와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가 하나님의 종국적 미래에서 영광스럽게 재확인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확고하게 동요하지 않으면서 언제나 주님의 일에 충성해야 해. 왜냐하면 주님 안에서 우리의 노동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야" 라고 말하게 한다.
육체의 부활에 대한 믿음에는, 현재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일이 종국적으로 미래에까지 긍정적인 역할을 미친다는 믿음이 포함되어 있다. 주1)


라이트는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 자신과 싸우고 교회를 위해 수고하는 삶이 최종적 하나님 나라와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한 구절을 더 소개하겠다.


왜 우리에게 새로운 육체가 주어지는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 의하면, 새로운 육체의 목적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지혜롭게 다스리는 것이라고 한다.
이제 빈둥거리며 하프나 켜고 있는 이미지는 잊어버려라. 거기에서는 분명 할 일이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 일을 기쁘게 할 것이다...
이것은 아마 부활 이후의 삶에 가장 신비롭고도 탐구가 덜 된 측면일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다스리는 것'을 몇 차례 약속하고 있고, 이것은 결코 빈말일 수 없다. 주2)


라이트의 이 주장은 우리로 하여금 이 죄 많은 땅에서 세상과 우리의 자아와 싸우며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말해준다. 물론 불완전하고 악의 지배가 있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는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며, 불안과 위협과 유혹에 시달린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 세상은 구조상 어쩔 수 없어. 나 자신을 거룩함을 지키는 것은 무의미해" 라고 말하거나,

"대충 살아도 돼. 어차피 천국 가면 다 끝날거니까"라는 안일함에 머문다면 어떻게 될까?

천국은 나를 기다려줄까? 내 삶이 천국을 사랑하지 않는데 내가 천국에 가는 것이 정상일까? 시간이 흘러도 내 삶에 예수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고 탐욕의 자아만이 견고하게 자라난다면 애초에 내게 하나님의 씨가 있었던 것인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요일3:9)


요한일서의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한 건의 죄도 범하지 않는 완전무결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의 삶이 죄를 지속적으로 지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No one who is born of God will continue to sin) 즉, 하나님의 씨가 있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에 머무를 수 없다. 성령께서 우리의 양심을 찌르실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고향(천국)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게 만드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씨가 있는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들은 자신들이 돌아가야 할 '본향' 즉 '고향'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자신이 '본향'과 정서적으로 멀어지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본향'에 어울리는 삶을 선택한다. 이와같은 삶은 필연적으로 대가의 지불을 요구한다. 이 땅이 우리의 본향과 너무나 이질적인 시스템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11:13-16)


히브리서 기자는 본향을 사모한 나머지, 이 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외국인'과 '나그네'로 정하기를 기꺼이 감내한 믿음의 선배들을 소개한다.

아브라함은 앞길이 막막함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육신의 고향을 떠났다.

모세는 애굽의 낙을 누리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했다.

기생 라합은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숨겨주었다.

이들의 선택에 대한 결말은 이생에서도 해피엔딩에 가까웠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고 증거한다.

어떤 이들은 심한 고문과 옥살이와 조롱과 채찍질,

돌로 치는 것과 심지어 톱으로 켜는 끔찍한 죽임도 당했다.

그들은 미쳤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이 모든 대가를 지불하고도 고향을 사모했다. 그랬기에 고향에 어울리는 삶을 산 것이다.


이처럼 본향을 사모하는 삶의 행동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자연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천국 백성들에게는 -수많은 실패가 불가피하더라도- '지금 여기서' 천국을 향한 사모함이 배어나온다. 반대로 하나님의 씨가 없는 이들은 세속을 향한 사랑의 행위들로 삶이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땅의 백성이라는 것을 '지금 여기서' 증명하며 살아간다. C.S 루이스가 "지옥의 문은 밖에서 걸어잠근 것이 아닌, 안으로부터 잠겨 있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주3)




밀러 대위는 비인간화의 한 가운데서 자신이 가진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지키고 싶어했다. 그는 어쩔수 없는 광기와 살인의 운동장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로 인한 결과가 자신을 향한 총구로 되돌아온다 해도 말이다.


지금 내 삶을 지배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율법이나 규정, 공포와 으름장은 나를 바꾸어줄 수 없다. 애초에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을 때도 내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그것들이 아니었다. 나로 새 삶을 살게 만들어 주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본향, 그곳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 방법 외에는 본향을 향해 걸어갈 다른 방법이 없다.





주1)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11장 '연옥, 낙원, 지옥' 中 , 톰 라이트 (IVP)

주2) 주1과 동일

주3) 「천국과 지옥의 이혼」中, C.S.루이스 (홍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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