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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라떼 Jan 02. 2023

내면이 망가진 천재

「굿 윌 헌팅」, 1998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스턴 빈민가 일용직 청년 윌(맷 데이먼)은 MIT 대학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램보 교수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복도 칠판에 걸어놓은 난해한 수학 증명을 순식간에 풀어버린다.

수학 뿐 아니라 법학, 역사학 등 모든 분야에 천재적 재능이 있는 윌을 알아본 램보 교수는 그를 수제자로 키우기로 결심한다.



램보 교수는 마침 폭행 사건으로 유치장에 갇혀 있던 윌을 보석으로 풀어주는 조건으로 자신의 수학 증명 연구를 도와달라는 제안을 한다.

단, 보석 조건으로 윌은 정기적인 심리치료와 함께 결과 보고서를 법원에 제출해야 했다.

이를 위해 램보 교수는 자신이 아는 심리치료사, 최면술사 등에게 윌을 맡겨보았지만, 반항적인 윌의 태도와 조롱에 모두 넌더리를 내고 포기한다.

방법이 없던 램보는 결국 자신의 과거 룸메이트이자 심리학 교수인 숀(로빈 윌리엄스)에게 그를 맡긴다.

그러나 숀 교수에게도 윌은 쉽지 않았다.



윌은 늘 마음을 닫은채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떠나게 하는, 전문용어로 '경계성 인격장애'를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어떤 일에든 결코 깊숙히 들어가지 않았다.


얼마든지 일할 곳이 널린 청소부 구직을 '굳이' 명문대학 안에서 했지만, 강의실 주변을 맴돌 뿐이었고

천재적인 학습능력과 기억력을 보유했음에도, 그 재능을 잘난 대학생들에게 모욕 주는데나 사용했다.

램보 교수가 연결해준 연구소 직장 면접에도 친구를 대신 보내 상황을 엉망으로 만든다.

사랑하는 연인 스카일라와도 관계가 깊어지지만 이후의 삶에 대한 진지한 얘기가 나오자 그녀에게 가시돋친 말을 내뱉고 이별을 통고해버린다.



고아였던 어린시절, 수 없이 경험한 입양과 파양, 그 가운데 양부로부터 받은 폭력과 상처로 그의 내면은 엉망진창이 된 상태였다.


 “그 애는 남이 자신을 떠날까봐 두려워서, 남을 먼저 자기한테서 떠나가게 만들고 있어.” 


숀은 자신이 상처를 받으면서도 부드럽게, 때로 강하게 윌을 몰아붙이며 스스로 진심이 열리기를 기다렸고 비로소 윌은 조금씩 대화를 시작한다.


반면 램보 교수는 천재적인 윌의 재능을 빨리 꽃피우기 위해 몸이 달아있다. 그는 숀을 찾아가서 경과를 듣는다.


램보 : 상담이 잘 되고 있다며? 윌과 미래에 대해 얘기해봤어?

 : 아직 과거도 정리가 다 안됐는걸

램보 : 빨리 시작해. 사방에서 자리를 주겠다는 연락이 오고 있어.

 : 무슨 일?

램보 : 최신 수학을 다루는 두뇌 집단 자리지. 그런 곳에서라면 윌은 기량을 마음껏 펼칠거야

 : 그런.... 제의가 있다니 좋은 일이지만 그 애는 준비가 안됐어

램보 : .... 자네는 몰라

 : 뭘 모른다는 거지?

램보 : 윌한테는 천재적인 재능이 있어. 우리가 올바른 길로 인도해줘야 해

 : 1960년대에 미시간 대학을 졸업한 한 청년이 천재적인 수학 이론을 폈지. 특히 조화수열 이론에 능했어. 그 후 청년은 버클리 대학의 조교로서 잠재력을 인정받아 몬태나주로 갔고 거기서 경쟁자들을 날려버렸지

램보 : 그게 누구인데?

 : 테드 카진스키야.

램보 : 못들어본 친구인데?

 : (레스토랑 점장을 향해) 이봐요 팀, 테드 카진스키가 누구지?

점장 : 악랄한 폭탄 테러범이잖소.

램보 : (한숨을 쉬며) .... 내 말이 바로 그거야. 그러니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줘야해. 이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인물로 말이야

 : 방향의 제시와 조작은 다른거야

램보 : 숀!

 :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결정하게 해 주는게....

램보 : 이봐, 나도 어떻게하면 그 애 인생을 망쳐놓을까 하며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게 아니야. 나는 18살때 고등 수학을 하고 있었고 20년이나 연구해서 수학 수훈상을 탔어. 그런데도 지금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 하지만 윌은,


 : 그 애가 원하는건 다른 것일지도 모르잖아. 세상에는 빌어먹을 수학 수훈상보다 값진게 많아! 중요한 건 자네의 만족이 아니라 윌이야. 그 애 스스로 원하는 걸 찾도록 시간을 주자고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은 누구나 윌의 천재성에 흥미를 갖고 접근하게 된다. MIT 대학교수도 어려워하는 증명을 순식간에 해치워버리는 청소부라니! 놀랍지 않은가? 대중적 인기를 끌기에 이보다 더 좋은 소재는 없다. 이후 전개는 교수에게 발견된 이 청년이 재능을 인정받아 불우한 환경을 딛고 승승장구하는 이야기로 가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구스 반 산트 감독은 윌의 천재적 재능은 그대로 멈춰둔 채 그의 내면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돌리게 한다. 윌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 인물인지 말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의 천재성만큼이나 심각한 내면을 파고드는데 나머지 시간을 모두 소비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모습과 성과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종종 외적인 성취가 그 사람의 내면을 대변한다고 착각한다.


"그렇게 힘겨운 시절을 딛고 저런 높은곳까지 올라갔대. 보통 사람이 아니야."

"올림픽 금메달 따는게 정말 힘든데! 얼마나 자기관리를 잘했으면."

"연기도 정말 잘 하는데 돈도 많고, 최고 스타랑 결혼한대. 얼마나 행복할까."

 

교회라고 다른가,

"목사님에 대한 이런 저런 소문들이 많지만 저렇게 교회가 부흥하고 영향력이 있는데는 다 이유가 있는거야."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성공자들의 삶에 도취된 후, 그들의 자살, 불륜, 공황장애, 마약, 이혼, 성범죄와 같은 반전의 소식들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그들의 성공이, 모든 것에 대한 성공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나는 이 영화의 주제를 따라가면서 열왕기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다. 열왕기서는 말 그대로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된 이후 왕들의 이야기와 역사를 다룬다. 열왕기서의 주요한 주제는 이것이다.

 

"왕들이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왕들이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신다."

 

실제로 열왕기서를 읽다 보면 대부분의 왕들은 이런 원칙 아래 심판 혹은 복을 받는다. 북이스라엘을 타락으로 몰고간 아합은 전쟁에서 패해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고, 하나님 앞에 의로움을 보인 여호사밧은 절대 열세의 전투에서도 승리를 얻게 된다. 하나님을 무시한 아하시야 왕은 병에서 고침받지 못하고, 하나님께 충성된 히스기야는 치료를 받는다.

 

그러나 예외적인 케이스가 있는데, 바로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이다. 여로보암 2세는 하나님 앞에서 악인이었음에도 당시 주변 국가들의 쇠락 분위기를 지렛대 삼아 영토 확장 정책을 추진하게 되고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 시대의 (남유다를 포함한) 이스라엘의 영토는 솔로몬 황금시대와 대등할 정도로 회복되고 국가적 중흥기를 맞이한다. 아마 이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지 않았을까?

 

"우리가 이룬 것을 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토록 기뻐하신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열왕기서 저자는 이 역사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내린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스라엘에 종이나 자유자나 남아있는 사람이 없었으며, 도와 줄 사람은 한 명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2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열왕기하 14:25~27, 쉬운성경)

 

이스라엘이 부강케 된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산 결과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내부적으로 붕괴 위기에 처해 있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으로 인해 구원을 받았던 것이다.

 

당시 활동했던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극심한 빈부격차와 허영, 불공정한 재판, 물질 만능주의를 고발했다.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에 노아 홍수 직전과 같은 배교와 안일함이 넘친다고 선언했다(아모스 6장 참조). 종교 역시 탐욕을 기반으로 한 가증스러운 예배가 넘쳐났다. 사람들은 종교적 규모와 화려함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의로움과 순종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그들이 받을 것은 심판 뿐이었다. 그들의 중흥은 잠시였고, 이후 앗수르가 그들을 제대로 침공하여 점령해 버린다. 북이스라엘은 멸망해버린 것이다.

 

여로보암2세의 북이스라엘처럼, 외적인 성공과 눈에 보이는 능력은 내면을 향한 우리의 시야를 흐린다. 더욱 위험한 것은 주변 사람들의 칭송과 환호로 인해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조차 놓쳐버리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에서, 목회의 현장에서 지켜보게 되는 것은 '바울 신드롬'이다. (이것은 내가 급조해 낸 용어이다. 적절치 않은 표현일 수 있음에도 억지스레 활용해 본다) 바울처럼 모든 조건이 완벽한 사람,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께 회심하면 하나님 나라에 얼마나 유익이 되겠는가!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하는 분위기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위 공무원이나 유명한 대학교수, 연예인, 심지어 전직 대통령과 같은 사람이 교회에 한 번 나오면 크게 환호한다. 그가 다른 종교를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면 이보다 더 큰 경사가 없다. 물론 그런 일은 귀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더해진다. 그런 사람들이 성경적인 교회의 치리 안에 들어오지 않고 세속의 Position 그대로 교회 안에 자리잡는다는 것이다. 교회는 서둘러 집사의 직분을 주고 그의 말에 권위를 실어준다. 때로는 그들의 전문성을 활용하여 교회의 외적, 법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앙 기초교육도 받지 않은 사람임에도) 긴급으로 중직을 맡길 때도 있다. 마땅히 그리스도의 도를 배우기 위해 엎드려야 할 사람에게 도리어 기존 신자들이 엎드리고 있으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이런 사례에 관해 교회의 질서가 흔들리는 것 이상으로, 영혼에 주목하지 못하는 목회 방향을 문제삼고 싶다.

 

성추행을 저지른 사법계 인사가 한 대형 교회에서 간증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범죄 의혹으로 문제가 있는 초신자인 그를 강단에 세운 것도 심각했지만, 그 간증 내용 ("나에게 이런 억울한 사건을 겪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러나 결국 이 시련은 하나님께서 나를 더욱 겸손하게 하시려는 섭리임을 깨달았다")과, 간증 말미에 본인 스스로 심취해 울컥하던 장면, 그리고 크게 아멘 하며 박수 갈채를 치던 회중들의 모습에 나는 한참동안 멍하니 있었다. 고위 공직자인 그 사람의 영혼을 고쳐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그 사람의 영혼을 고쳐줄 누군가가 나타나면 그는 더이상 예수를 찾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그의 외적 지위와 사회적 영향력이 누구도 그의 내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장벽을 쳐버린 것이다.



 

인간을 존재 그 자체, 영혼으로 보지 못하고 Utility에 초점을 맞춘 오늘날의 목회 분위기도 서글프다. 이것은 목회자만의 잘못이 아니고 나의, 우리들의 이야기다. 오늘날의 교회는 분주하다. 교인의 규모와 관계없이 직분으로, 역할로 헌신하는 이들의 비율은 소수다. 그러다보면 '사역의 잘됨'과 '영혼의 잘됨'의 개념이 모호해지는 경우가 있다. 바쁘게 여러 교회일을 하는 사람이 영적으로도 안정되고 든든한 사람으로 여김받는 것이다. 사람들도 그의 헌신을 보고 '대단한 사람'이라 칭송하고, 당사자인 그도 다른 사람들이 말해주는 평가가 자신의 영적 정체성이라 착각하게 된다. 오히려 그의 내면과 영혼은 하나님 앞에서 너덜너덜해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럴 때 그를 영혼으로 대해주는 사람이 있는가? 주일학교 부장집사가 아니라, 소그룹 리더가 아니라, 회계집사가 아니라, 성가대 파트장이 아니라, 교회건축추진위원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내 이름 석자로 불러주는 누군가 말이다. 그의 내면은 한없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교회 사역의 중요한 역할로 그의 정체성을 삼는 경우를 무수히 보아왔다.

"당신은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왜 소중한가? 내가 그리스도의 보혈의 값으로 구속받은 영혼이라서? 아니면 내가 이 교회일에 계속 필요해서?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진짜 이유인가에 따라 목회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램보 교수는 윌의 천재성에 집중했다. 어떻게든 그의 재능을 즉시 활용하여 사회에 기여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숀 교수는 윌의 내면을 꿰뚫어보며, 지금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불구자와 같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가 스스로의 문제를 딛고 일어서지 못하는 한, 그의 재능은 오히려 사회에 위험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형제 자매를 영혼으로 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랑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벼운 멍에'이다(마11:28). 그런데 서로를 기능적으로만 대하다 보면 그 쉬운 것이 매우 어렵게 느껴진다(나의 경험담이기도 하다). 사역 주제로만 동역하고 대화하던 상대와 갑자기 사랑을 나누라니,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결국 사랑의 흉내를 내기 위한 프로그램을 또 만들어 내 버린다. 그런 순간이 되어 보면 우리가 하던 것들이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의 대학 선교단체 시절은 바빴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많은 일들이 맡겨졌다. 그럼에도 감사했던 것은 공강시간 잠시 동아리룸을 들렀을 때 "우리 큐티 나눔 합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떤 정형화된 모임도 아니었다. 시작은 어색했지만 진솔한 나눔을 할수록 힘이 되었고, 어렵고 부족한 삶을 격려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뜨거웠다. 다른 게 아닌, 바로 이 시간을 위해 내가 하나님 앞에서 달려가고 있구나 하는 깨달음도 들었다.

 

최근 여러 일들로 지쳤던 어느 날, 교회에서 한창 동역하던 또래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맡은 일 중 놓친 게 있었나 싶어 차갑게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네 목소리 듣고 싶어서 그냥 전화해 봤다."라는 말이 들렸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닌 나 자체를 원했던 전화라는 사실에 코 끝이 시큰해짐을 느꼈다.


윌은 자신의 천재성을 기대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것도 함께 기대받았다. 그러나 윌에게는 그 문제가 쉽지 않았다. 어린 시절 양아버지로부터 받았던 학대와 폭력의 경험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윌은 자신의 어두운 경험에 대해 어떤 사과도 받지 못했고, 정확히 말해 그것은 그에게 책임이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 영화의 명대사인 "It's not your fault" (네 잘못이 아니야) 라고 이야기해주는 숀 교수와 같은 누군가가 필요했다. 모두가 자신의 재능만을 주목할 때, 유일하게 망가진 내면을 공감해주었던 사람이 있어 윌은 살아났다.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우리의 내면은 훨씬 중요하다.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 모두는 이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내가 이 핵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버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영화 #굿윌헌팅 #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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