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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라떼 Dec 28. 2022

우리의 눈꺼풀이 벗겨질 때

「매트릭스」(1999)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매트릭스」는 한창 그 인기가 지난 후 보았던 영화였다. 스미스의 총알을 누운 자세로 피하던 네오(Neo)의 슬로우모션 장면이 화제가 되길래 결국 비디오 가게에서 대여를 하게 되었다. 1편을 보고 재미있었다는 인상은 갖지 못했다. 거대한 스케일을 예고하는 떡밥들을 던져놓은 후, 작은 사건 하나 해결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왔던 대규모 시리즈물 영화가 아직 익숙치 않았던 것 같다 (반지의 제왕 1편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매트릭스에 홀딱 반했던 것은 2편인 「리로디드」를 본 이후였다. 그리고 3화 「레볼루션」을 보고 나서는 흥분감을 이기지 못해 인터넷을 검색하며 영화의 세계관과 해석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재미있으면서 철학이 담기고, 이야기거리도 만들어내는 영화는 많지 않은데, 「매트릭스」는 이런 영화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 세계관의 출발은 이것이다.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던 앤더슨씨는 어느날 이상한 사건들을 겪게 되고 모피어스라는 사람에게로 인도된다. 신비로운 느낌으로 가득한 모습의 모피어스는 단도직입적인 표현으로 대화를 연다.


“당신은 뭔가를 알았기 때문에 온 거야.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느낌 말이야.”


“매트릭스는 모든 곳에 있어. 

진실을 못 보도록 눈을 가리는 세계란 말이지.”


“무슨 진실요?”



“네가 노예라는 진실”



“불행히도 매트릭스가 뭔지 말로 설명할 수는 없어. 직접 봐야만 해.”


이 말과 함께 모피어스는 두 개의 알약을 꺼내어 양 손바닥에 올려놓고 앤더슨에게 내민다.



“이게 마지막 기회다. 다시 돌이킬 수 없어. 

파란 약을 먹으면 

침대에서 깨어나 네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살게 돼. 

빨간 약을 먹으면? 

끝까지 가게 된다.”




앤더슨은 주저하지 않고 빨간 약을 집는다. 


의식을 잃었던 그가 깨어난 곳은 충격적인 장소였다. 기계와 AI가 지배하고 있는 미래, 인류는 그들에게 정복당하여 인공 자궁이라 불리는 액상 캡슐속에 갇힌 채 기계들이 활동하기 위한 에너지(배터리)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AI들은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을 인간들 뇌에 주입시켜 그들이 마치 일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꿈을 꾸게 만들었다. 앤더슨, 아니 그곳에서의 이름인 네오(Neo)는 모피어스의 도움으로 깨어났다. 네오는 거짓의 아름다운 꿈에서 일어나 처참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매트릭스 마지막편인 「레볼루션」까지 수많은 명장면들이 있지만 유독 이 부분이 인상적인 이유는, 여기에 강렬한 복음의 메시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매트릭스가 기독교 영화는 아니나 기독교 테마를 차용한 흔적이 곳곳에 보이기 때문에 매트릭스를 성경의 관점에서 해석한 글들이 꽤 많다. 오늘 내가 소개하려는 장면에 관한 글들도 인터넷 여러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부할 수도 있는 생각의 나눔을 더해보고자 한다.  






「매트릭스」의 이 부분을 볼 때마다 나도 두려워하며 현실을 의심해본다. 나의 아침 기상부터 출근길 버스/지하철에서의 시간, 회사에서 업무하는 시간, 커피를 마시며 동료들과 이야기하는 시간,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 하루를 마감하며 잠이 드는 시간들도 다 매트릭스가 아닐까? 나도 실제로는 꿈을 꾸는 채로 캡슐에 갇혀 기계들의 생체 에너지원으로 사용되고 있지는 않을까? 그렇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내가 진지하게 임하고 있는 현실과 일상이 Fake 였다는 것처럼 기분나쁘고 절망적인 것은 없을 것 같다.  


매트릭스처럼 기발한(?) 형태는 아니지만, 신약성경에는 네오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사람이 소개된다. 다름아닌 사울이다. 똑똑하고 혈기 왕성했던 그 젊은이는 유대교의 신봉자였다. 그는 로마의 속국이 된 민족의 현실 속에서 율법의 가르침을 지키기 위한 모든 일을 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나사렛 예수를 추종하는 이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는 스데반 집사의 사형에 찬성표를 던졌고, 교회를 핍박하여 신도들을 옥에 넘겼다(행8:3). 뿐만 아니라 다마스쿠스로 가서 예수를 믿는 이들을 모두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올 계획안도 승인받았다. 위풍당당하게 길을 가던 그가 갑자기 환상 가운데 사로잡힌다. 핍박받는 교회를 자신과 동일시한 예수를 만난 것이다. 사울은 자신이 열정을 다해 달려온 지금까지의 삶이 모두 거짓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바울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180도 변화된 삶을 살게 된다. 이후 바울은 여러 교회와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했던 젊은날의 삶이, 실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이었다고 고백한다. (딤전1:15, 고전15:9, 살후1:4, 갈1:13) 


바울처럼 극적인 경험을 했든 아니든, 우리 역시 예수를 만난 이후에는 더이상 이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우리를 덮고 있던 눈꺼풀이 벗겨진 이후, 우리는 그간 열심을 다해 달려왔던 삶의 모든 시스템이 Fake였음을 깨닫는다. 나는 '천국'과 '세속'을 분리하여 선과 악으로 나누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태초에 하나님께서 '심히 좋았더라'(창세기 1:31)고 말씀하셨던 이 세상은, 죄와 인간의 실패로 인해 심각한 데미지를 입었다. 세상은 타락했다. 세상의 실권은 선한 의도로 지으신 창조주가 아닌 마귀가 잡고 있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요일5:19) 


이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휘어잡고 있는 마귀의 영향력 앞에 무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의심의 여지 없이 온 피조물들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기까지 우리는 불완전하고 심각하게 부패한 세상 가운데 살고 있다. 복음을 이해하는 시작은 여기에 있다. 내가 살아가는 이 일상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사실, 구원과 회복이 절실하게 필요한 대상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다. 세상을 향한, 나 자신을 향한 이와같은 시각의 전환 없이 복음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복음은 '지금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닌, '멸망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음을 핸드폰 통신사 선택하듯 비교하며 고를 수 없다. 복음을 선택하지 않는 대가는 '약간의 손실', 혹은 '큰 손해' 정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불편하고 충격적이라도 온전한 현실을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멸망을 피해야 하고 하나님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매트릭스는 이런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 


그런 측면에서 -비록 우리의 일상 행위 자체는 악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필요성을 망각하게 만드는 이 세상의 시스템은 악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계18:2)으로 상징되는 음란과 사치의 구조 속에서 의심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바벨론과 함께 멸망하는 것외에는 다른 결말이 없다. 그리고 바벨론은 이 시대의 사람들이 죄악된 시스템 속에서 죄악된 삶을 의심없이 영위하도록 끊임없이 속인다. 음녀(계17장)로 상징되는 이 세상의 정치와 문화를 주관하는 존재는 사람들을 세속 안에 끊임없이 취하고 또 취하게 만든다. 따라서 구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던 이 땅이 실상 매트릭스임을 깨닫고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며, 오염되고 손상된 현실을 직시하고 이곳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매트릭스가 보여주는 '차디찬 현실'의 메시지는 예수를 모르는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AI문명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의 조직원들 중 배신자가 생긴다. 그의 이름은 사이퍼인데, 당연히 그는 '참혹한 현실과 실상'을 아는 자다. 그럼에도 그는 AI세력에게 아군의 정보를 팔아넘긴다. 


"나는 이 스테이크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내가 이 녀석을 입에 넣으면 매트릭스가 내 두뇌에 맛있다는 신호를 입력할 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소.


(레지스탕스 생활) 9년동안 내가 깨우친게 뭔지 아시오? 

바로 '모르는게 약이다'는 말이오."


진짜 현실을 보았음에도 그것을 외면하는 것이 가능한가? 놀랍게도 가능하다. 매트릭스 영화 뿐 아니라 우리 주변의 수많은 삶의 케이스가 그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만났음에도, 그분의 사랑을 경험했음에도, 수많은 이적을 경험하고 위대한 사역을 해냈음에도 (마7:22) 진짜 현실을 외면하는 신자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매트릭스의 달콤함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속의 복에 취해 주의 길 가기를 포기한 수많은 이들을 목도한다. 한편으로는 사이퍼처럼 현실의 처참함과 자신이 견뎌야 할 삶이 너무 고됨으로 인해 매트릭스를 다시 선택하는 경우도 본다. AI문명과의 지긋지긋한 싸움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말이 싸움이지 실상은 은둔하고 도망다니는 삶이 더 정확했다. 이런 생활에 희망이 있는가? 그러다 AI들에게 잡히는 날에는 내 생명 자체가 잔혹하게 폐기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놀랐던 것은 해당 장면이 담겨진 유튜브 영상에 달린 수많은 댓글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사이퍼를 이해한다. 나라도 저렇게 하겠다'고 글을 남겨 놓았다. 현실을 외면하는 선택인데도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평하는 모습에 -이 역시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에도- 씁쓸함이 남는다. 


성도의 길을 걷는 것은 단기 프로젝트가 아니다. 우리가 본 진짜 세상이 처참한 만큼 주를 따르는 우리의 삶에도 고생길이 기다린다. 예수님은 일찌감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막9:58)라고 말씀하셨고, 사도들은 로마서(8:17), 히브리서(11:25), 베드로전서(4:13)와 같은 성경을 통해 고난의 삶을 적나라하게 예고했다. 그리고 이 같은 고생이 예비되어 있으니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격려했다. 

반면 매트릭스는 예수를 믿기 전에도, 믿은 후에도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물질과 지위를 받은 이들에게 그냥 그 속에 파묻힌 채 누리며 사는 것이 어떻냐고 제안한다. 주를 위한 수고와 헌신을 하는 이들에게 그런 개고생은 집어치우고 너도 평범하게 살아보라고 설득한다. 매트릭스가 가짜면 어떠냐? 너가 지금 느끼는 행복이 중요하지 않으냐? 라고 말이다.







네오는 알약을 먹기 전 모피어스에게 거듭 경고를 받았다. 이 약을 먹은 후에는 돌이킬 수 없다고, 그래도 먹겠냐고. 그러나 네오는 단호하게 빨간 알약을 집는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거짓의 세계에서 살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마음가짐이었다. 그리고 그는 현실을 마주한 후 연거푸 구토를 할 정도로 충격을 느끼면서도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사실상 돌아갈 길은 없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우리의 길도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돌아갈 수 없다. 돌아간다는 것은 현실을 부정하고 비인격의 매트릭스 속으로 숨어버린다는 것과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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