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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마아빠 May 31. 2022

요새 머릿속이 꽤나 복잡해

4月 - 일수가 하리에게

안녕 하리,


우리가 처음 편지 쓰기로 했을 때 솔직히 난 한 달에 한 번은 너무 쉬울 줄 알았어. 그땐 베일리가 세상에 나오기 전이기도 했고, 또 거의 매일 글쓰기를 할 때라 그랬나 봐. 지금은 한 달에 한 번도 작정하고 쓰지 않으면 이 약속을 못 지킬 거라는 위기감이 들더라. 4월 막바지에 접어들어서야 겨우겨우 식탁에 앉아 공책을 폈어. (지난번 편지에서 다음엔 서재에서 쓰게 될 거라고 호기롭게 말했는데, 서재는 개뿔 아직 책상도 없다 ㅋㅋㅋ)


오늘로서 이사온지 3주가 지났어. 전세계에서 우리 편지 프로젝트를 주목하는 독자들(따윈 없지만)에게 내가 한 가지 조언을 한다면 절대 이사와 출산을 동시에 하지 말라는 거야. 부모 노릇도 몸에 안 익어 힘들어 죽겠는데 집이 아수라장이니 정신적으로 괴롭더라. 뭘 하나 꺼내려면 두 개를 어질러야 하고, 그 두 개를 치우려면 또 세 개를 옮겨야 하고. 쌓이기만 하는 테트리스 같달까... 어쨌든 여차 저차 해서 이젠 어느 정도 사람 사는 집의 흔적 정도는 갖추게 됐어. 여전히 이 집이 낯설고, 아직 우리 손길이 닿아야 할 구석들이 많지만, 일단 가장 만족스러운 건 '자연'인 것 같아. 주방 창문 밖으로 산이 보이고, 아파트 단지 하나가 앞을 가로막고 있긴 하지만 푸른 하늘도 보여.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마치 산장에서나 맡을 법한 숲내가 나. 새소리도 한몫하지. 서울에선 너무나도 귀했던 것들이 여기선 내가 매일 마주하는 풍경이 됐어. 지금은 마침 비가 오는데, 비가 올 때면 짙은 흙내음이 집 안으로 솔솔 들어와. 그 냄새가 좋더라고. 아직 서울을 떠나 순천으로 이사 온 이 삶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전혀 감 잡을 수 없지만 자연에 가까운 곳으로 삶터를 옮긴 건 잘한 결정인 것 같아.


사실 요새 머릿속이 꽤나 복잡해. 베일리도 건강하고, 내 집도 생겼는데, 그 와중에 나 자신은 점점 희미해져 가는 느낌이 들어. 베일리 우는 소리에 하루를 시작해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택배 랜덤 디펜스를 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지나가. 운동도 못하고 책도 못 읽고 그저 터지는 일을 하나하나 쳐내기 바쁜 일상이 지칠 때가 있어. 시간은 시간대로 흘러가는데 내 삶은 정체되어 있는 느낌이랄까? 예전 루틴을 잃어버린 후유증이 생각보다 크더라고. 그래서 요즘은 조금이나마 루틴을 되찾아보려고 해. 한참 손 놨던 명상도 다시 하루에 10분씩 하고 있고(아직 삼일째임), 베일리를 안고 소파에 두 시간 동안 묶여 있을 때 인스타 대신 책을 읽으려고 해. 그리고 정말 가끔가다 줄스랑 베일리가 동시에 잠드는 개기월식 같은 기적이 일어나면 이때다 하고 2층으로 올라가 20분이라도 운동을 하려고 해. 이렇게 며칠 해보니까 확실히 다르더라. 조금 중심이 잡히는 느낌이 들어.


그나저나 넌 어떻게 살고 있니, 하리야. 네가 가끔씩 보내오는 사진을 보면 잘 적응해서 독일살이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아.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야. 춤이라는 취미를 통해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아주아주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생각해. 네가 춤 파트너와 눈이 맞아 아이를 낳고 나와 함께 육아전선에 뛰어들어 우리가 '터미타임', '오감발달', '통잠' 같은 단어들이 난무하는 대화를 나누는 건 내 희망사항이겠지?


그리고 네 편지 재밌게 잘 읽었어. 단편 하나 읽는 것 같더라. 유학길이 녹록지 않을 줄이야 예상했지만 가는 비행기부터 그리 험할 건 뭐람 ㅋㅋㅋ 나중에 좋은 안줏거리는 되겠다. 그래도 비행기에서 만난 친구가 있어 다행이다. 해외 나가서 살다 보면 가끔 그런 은인들을 만나게 되나 봐. 나도 유럽 여행하면서 그런 고마운 사람들을 만난 적 있거든. 이태리에서 workaway할 때 만난 프란체스코는 자기 집으로 날 초대해줬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며칠 집을 비운 동안에도 갈 곳 없는 내게 집을 내어줬어. 참 생각해보면 어떻게 만난 지 불과 2주 된 내게 그런 어마어마한 호의를 베풀었을까 싶어. 나도 한국 돌아가면 누군가에게 그런 은인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라고 마음먹었었는데, 딱히 실천에 옮기진 못한 것 같아. 가끔 지하철역에서 헤매는 외국인 도와주는 정도가 고작이야.


네가 독일인에 대해 가졌던 선입견을 나도 가지고 있는지도 몰라. 근데 사실 난 독일인을 많이 접해본 것도 아니라 어디서 그런 선입견을 주워듣고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어. 네 얘기를 들어보니 역시 독일인 전부를 싸잡아 형용사 몇 개로 설명하는 건 무리겠구나 싶어. 네가 지금 사는 지역 사람들이랑 큰 도시에 사는 독일인이랑 또 결이 다를지도 궁금하다. 나중에 겪어보고 알려줘.


그리고 네가 말한 '긴장'과 '경계'에 공감할 수 있어. 미국에서 대학 다닐 때 꽤나 열등감에 젖어 있었던 것 같아. 키 작은 동양인이라는 사실을 '만회'하려는 듯 부단히 노력했어. 괜히 더 웃긴 척, 더 활달한 척, 더 아무렇지 않은 척, 이런 '척'들을 여러 겹 껴입고 살았어. 그땐 몰랐지만 아마 에너지 소모가 장난 아니었을 거야. 참 안타까워. 벌써 10년 전 얘기네.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냥 생긴 대로 사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을 거 같아. 만약 그때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즐기려 했다면 과연 내 대학생활이 어땠을까, 하는 때늦은 공상에 잠기기도 해. 물론 그 시간은 이미 지나갔고,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 10년이 지난 지금 과거의 내가 어리석었다고 생각하는 건 내가 성장했다는 뜻일까? (기승전성장)


앞으로 목표만을 향한  말고  순간을 즐기는 삶을 살아보겠다는  결심에 박수를 보내. 유시민인가 누군가가 비슷한 말을 했던 걸로 알아. 하루는 인생의 압축판이라고. 지금의 하루하루가 모여 결국  인생이 되겠지.  말은 지금  하루하루가 즐겁다 결국  인생 전체 또한 즐거운 인생이 된다는 말이겠지? 내가 운동하고  읽고  쓰는 루틴을 되찾고 싶은 이유도 비슷한 맥락인  같아. 그날그날은 별거 아닌 일들이지만 그게 모이고 모이면 결국  인생이 되겠지. 어쨌든 건투를 빌어.


우체국 직원이 편지가 독일까지 가는데 3주가 걸린다고 했을 때 반신반의했어. 근데 정말 꼬박 3주가 걸릴 줄이야. 로켓배송의 피가 흐르는 내겐 너무 가혹하게 긴 시간이었어. 그래도 무사히 건너갔으니 다행이야. 이번에도 바다 건너 무사히 네게 닿기를.


여름이 오려하는 순천에서

일수

2022.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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