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리는 나 없이도 잘만 논다
며칠 전 어떤 인스타 육아채널에 업로드된 동영상 하나를 봤다. 두세 살 정도 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호숫가에 누워 돌멩이 하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아이 뒤에 멀찍이 선 엄마는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영상 말미가 되자 문구 하나가 아이 위로 나타난다.
"이 상황에서 엄마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몇 초 후 다음 문구가 나타난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이는 내가 19주 된 딸 베일리와 놀 때와는 사뭇 다른 접근방식이다. 난 마치 골이 들어가기 직전의 축구 해설처럼, 공백이 생길세라 끊임없이 감탄사와 추임새를 퍼붓는다.
"베일리 이거 봐봐"
"베일리 이거 뭐야?"
"우와~~~~"
"뿌뿌뿌뿌뿌"
"짠짠짠짠짠"
적막이 흐르는 순간 직무유기죄로 끌려갈 사람처럼 베일리의 청각을 자극한다. 이유야 물론 아빠로서의 임무에 충실하고 싶고, 베일리의 발육에 가능한 많은 기여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 영상을 보고 다시 생각해봤다. 과연 이게 베일리가 원하는 것일까? 정작 베일리는 자기 속도에 맞게 찬찬히 세상을 구경하고, 눈앞의 사물을 탐구하고 싶은데 내가 눈치 없이 귓가에서 조잘대는 건 아닐까?
이 의심이 일리가 있는 건 가끔 베일리를 침대에 눕혀놓고 급히 화장실을 가거나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돌아와 보면, 평온하기 짝이 없게 옹알대며 헤헤거리는 베일리를 마주하곤 한다. 그럼 난 베일리가 혼자서도 잘 놀고 있었구나, 계속 놀게 놔둬야지, 하고 생각하는 대신, 오히려 자리를 비운 게 미안해서 더욱 열심히 말을 걸고 장난감을 흔든다. 내가 베일리만의 시간을 방해한 걸까? 생각해보면 베일리의 세상은 특별한 외적 자극 없이도 하루하루가 새롭고, 신기한 것 투성일 것이다. 같은 천장 벽지도 어제 안 보였던 색갈이 오늘은 보이고, 같은 발가락도 어제 못 느꼈던 맛이 오늘은 느껴질 것이다. 어쩌면 베일리가 스스로 놀잇감을 만들어내고 즐기는 능력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뛰어날지도 모른다. 내가 베일리의 깨어 있는 모든 순간에 끼어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한 발짝 더 들어가 보면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다. 베일리 앞에서 열심히 소리를 내고 재롱을 떤 게 베일리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이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 베일리를 지켜보는 내가 지루해서, 수십 번, 수백 번 되풀이되는 이 놀이의 단조로움이 견디기 힘들어서, 계속해서 말을 걸고 베일리의 주의를 끌려고 한 건 아니었을까. 마치 인스타와 유튜브 프리미엄에 길들여진 내 감각을 베일리에게 투영하려는 것처럼. 놀이매트에 그려진 동물들을 보는 것만으로 10분은 끄떡없는 베일리인데, 옆에 있는 내가 그것을 못 견뎌해서, 자꾸만 다른 장난감을 베일리 앞에 들이민 것은 아닐까.
앞으로는 베일리가 울지 않고 혼자 잘 논다 싶으면, 그 앞에서 얼쩡거리지 않을 것이다. 간간이 힐끔거리며 아이의 안녕을 확인하겠지만, 내 마음이 불편하다고 베일리의 세상을 흩트려놓지는 않을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베일리 자신과, 덩달아 변해가는 세상을 관찰하는 데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걸리적거리지 않아 볼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