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결혼식 탐방기 - 3
결혼식 이튿날 아침, 등산을 하기 위해 모임장소인 마당으로 나갔다.
밤에 세네 시간씩 밖에 못 잔 우린 등산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피로 반 짜증 반 상태였으나, 집 뒤로 펼쳐진 대자연을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내 생애 첫 영국 결혼식을 최대한 정석대로 경험해보고 싶었다.
린다와 대니는 10시까지 모인 사람들을 이끌고 코티지 뒤의 언덕으로 향했다.
영국에 와서 느낀 점 중 하나는 산책로와 등산로의 개념이 한국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이다.
영국에서 산책을 하다 보면 거의 추리탐정이 된 기분이다.
잔디가 밟힌 정도, 돌담이 무너져내린 정도 따위를 힌트 삼아 길을 발굴하다시피 해야 한다.
특히 시골 허허벌판을 질러 걷다 보면 가축 이탈 방지용으로 만들어진 회전문을 통과해야 할 때가 많은데,
개중에는 호빗이 아니고서야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문폭이 좁은 문도 많다.
하지만 이게 다 영국 산책로의 매력이다.
자연 한가운데에 내팽개쳐진 느낌이 들긴 하나 내 안에 잠자고 있던 모험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날 아침도 들판의 똥지뢰들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돌담 중간중간에 뚫린 문을 지나, 가파른 언덕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올랐다.
30분 정도 오르고 나서 커피도 한 모금 마실 겸 잠시 걸어온 길을 돌아봤다.
저 멀리 안개와 안개 사이로 영국과 아일랜드를 경계짓는 아일랜드해가 보였다.
바다가 보이자 갑자기 내가 얼마나 낯선 곳에 와있는지 실감이 났다.
바다를 보기 위해 나처럼 순천만을 찾는 사람들과, 저 아일랜드해를 찾는 사람들은 얼마나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걸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왜 유독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내려다볼 때면 이런 삼류 감상이 잘 떠오르는 걸까.
한 시간 조금 넘게 등산을 하며, 자연스레 우리 앞뒤를 걷는 사람들과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린다쪽 손님이냐 대니쪽 손님이냐, 어떻게 아는 사이냐, 우린 아내가 린다 대학 친구다, 아 그러냐, 난 대니 둘째 형이다, 오 어쩐지 닮았다 했다, 등의 얘기들.
반갑게도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이 많았는데, 그들과는 바로 내적동지애가 일어 조금 더 많은 대화가 오갔다.
우린 지금도 베일리가 무거워 죽겠는데 2살짜리를 목마 태워 등산하는 게 존경스럽다, 아니다 걸을 수 있게 되면 오히려 편해지니 너네도 조금만 힘내라, 등의 얘기들.
등산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했다.
설거지를 하던 중 노크 소리가 들려 아내에게 물어보니 "누가 샤워하러 왔나 보다"라는 다소 기이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게 뭔 소린고 하니, 이런 뜻이었다.
영국에선 보통 1박2일 혹은 2박3일에 걸쳐 결혼식을 한다.
그럼 잠은 어디서 자느냐?
신랑신부의 친지가족, 그리고 베스트맨과 브라이드메이드를 포함한 소수의 친구들만 식장에 딸린 숙소에 머물고, 나머지 하객들은 알아서 근처 호텔이나 에어비앤비를 예약한다.
아내 말로는 결혼식장의 여건에 따라 텐트를 가져와 캠핑을 하거나 캠핑밴으로 잠자리를 해결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고 했다.
결혼식이 열리는 곳 근처에 숙소 자체가 부족한 경우도 있고, 빈 방이 있다 해도 하룻밤에 십몇만 원 하는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캠핑을 자처하는 이들도 더러 있단다.
아내 경험상 경치 좋은 곳에서 친구들 여럿이 오랜만에 텐트 치고 노는 게 피로연 못지않게 재밌을 때도 있다고 했다.
문을 두드린 사람은 바로 집 앞 캠핑밴의 주인장이자, 아내의 대학 동창, 조지와 에디였다.
그들은 각자 한 손에는 수건을, 다른 한 손에는 설거지 거리가 잔뜩 담긴 통을 들고 있었다.
아내는 반갑게 그들을 맞았다.
조지와 에디는 번갈아서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하고 밀린 설거지를 해결하고 갔다.
"나도 신세 진 적 엄청 많아."
이 광경을 굉장히 신기해하는 내게 아내가 말했다.
아내 역시 결혼식에 가서 잠자리를 대충 때우고 이튿날 친구 숙소에서 샤워를 하고 밥을 얻어먹은 적이 많다고 했다.
돌고 돌며 샤워 품앗이를 하는 영국의 결혼식 문화, 뭔가 따듯해 보였다.
(4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