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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마아빠 Jan 27. 2023

부부 수명이 약 3년 갱신되었습니다

<낭만적 연애와 그후의 일상>을 읽고

베일리를 낳고 우리 부부 대화에 전례 없이 자주 등장하기 시작한 단어는 바로 '이혼'이다.

솔직히 말하면 결혼 전엔 설마설마했다.

난 운전할 때 욕도 안 하고, 누구 때려본 적도 없고, 브런치에 고상한 글도 쓰는데, 설마 내가 이혼하겠어, 했다.

근데 아빠가 되고 10개월이 경과한 지금, 오은영 리포트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닌, 나와 아내에게 일어나고도 남을 일이 되었다.


2023년 첫 이혼 위기는 이런 식으로 왔다.

밥 먹이기 전에 기저귀 체크를 하는 건 내 몫이다.

하지만 그날은 전날 잠을 잘 못 자서,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지 걱정하느라,

과연 난 언제 다시 섹스를 할 수 있을까 같은 중차대한 문제로 고뇌하느라 정신이 좀 산만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축축한 기저귀를 찬 베일리를 의자에 앉힌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돼? 밥 먹이기 전에, 낮잠 자기 전에, 외출하기 전에 기저귀 확인하라고 내가 말했잖아."

반박할 것도 없다.

100% 내 잘못이다.

내가 확인을 안 해서 베일리 옷 다 벗기고 기저귀 갈고 다시 의자에 앉히는 난리부르스를 또 춰야 한다.

그럼에도 화가 난다.

아무리 그래도 이게 대역죄인 다루듯 쏘아붙일 일인가.

하루종일 빨빨댄 건 나도 마찬가진데.

마지막으로 여유롭게 똥 싼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한 건 나도 마찬가진데.

나도 힘들고, 답답하고, 외롭다고.

"이게 짜증 낼 일이야? 피곤하면 그럴 수도 있지."

"피곤? 어제 너 몇 시간 잤는데?"

단어선택 실패다.

‘피곤’은 모유수유하는 아내 앞에서 금기어인데 말이 헛나갔다.

누가 더 못 잤냐 얘기로 흘러간 이상 난 바로 꼬리를 내려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이성적 판단이 가능했으면 애초에 이런 대화를 하고 있지도 않았다.

"넌 왜 맨날 치사하게 잠잔 걸로 시빈데.

나도 베일리 깰 때마다 깨는 건 마찬가지야."

신이 있다면 지금 당장 제 입을 봉하여 주시옵소서.

"장난해? 베일리 네가 안고 잤어? 넌 자기라도 했지. 난 베일리 움직일 때마다 깨.

오늘 밥 누가 했어. 베일리 먹을 거, 베일리 간식, 우리 먹을 거, 내가 다 했지?

밥이 뚝딱 하면 뚝딱 되는 줄 알아?

뭐 먹을지 고민해야 하고, 레시피 검색해야 하고, 장 봐와서 정리해야 하고,

밤샌 나도 다 하는데 네가 뭘 피곤해?"

이 정도면 KO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잘못을 시인하고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하면 이혼이라는 정거장에 닿기 전에 유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놈의 똥꼬집은 이상하게 피곤할수록, 이성을 잃을수록 의기가 양양해지는 몹쓸 특성을 가졌다.

"아니 솔직히 하루에 세 시간씩 베일리 안고 서서 재우는 내가 밥까지 할 시간이 도대체 어디 있어?

니 눈엔 안 보이겠지만, 나 오늘 제대로 앉지도 못했어.

카드 재발급 내가 했지, 쿠팡 주문 내가 했지, 쏘카 예약 내가 했지,

내가 핸드폰에 머리 처박고 있으니까 노는 거 같아?

나도 핸드폰 좀 제발 그만 보고 싶어.

쿠팡 좀 그만 보고 싶다고.

한국말할 수 있는 게 나니까 할 수 없이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거야."

"그거 다 베일리 재우면서 할 수 있는 거잖아.

너 베일리 자는 동안 뭐 했어?

너 하고 싶은 거 했지?

세 시간씩 서 있느라 다리 아픈 거 알겠는데, 넌 그래도 하루에 세 시간씩 니 시간을 가지는 거잖아.

지금 할 일이 태산인데 니 시간은 니 시간대로 오롯이 쓰는 건 이기적인 거 아니야?"

대화가 이 정도로 무르익으면 접시가 벽에 날아가 깨지기도, 차문을 주먹으로 때리기도, 길 가던 사람을 불러 세울 정도의 고성이 오가기도 한다.

그 부서짐의 소리가 잠잠해지고,

놀란 베일리의 우는 소리가 다시 적막을 채우면,

이제 '이혼'이라는 단어가 고개를 내밀 차례이다.


오은영 선생님 상담비용이 10분에 9만원이라고 했던가.

아쉽지만 이번 생에 선생님을 뵐 일은 없을 거 같고,

대신 난 베스트셀러 작가 알랭드보통 아저씨를 당분간 내 결혼멘토로 삼기로 했다.

그가 2016년에 출간한 <낭만적 연애와 그후의 일상>을 읽는 것으로 내 결혼생활의 수명이 최소 3년은 연장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책은 한 커플의 첫만남부터 결혼 13년 차까지의 서사를 따라간다.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바람을 피우고, 부부상담을 받는 시시콜콜한 얘기이다.

재밌는 건 줄거리 마디마디에 보통 아저씨가 전지적 시점에서 이 커플이 각자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에 관한 철학적/심리학적 해설을 풀어놓는다는 것이다.

책에 주옥같은 내용이 얼마나 많은지 자동차 대시보드에 달린 피규어 마냥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


주인공 라비와 커스틴은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소한 데서 어긋나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커스틴은 창문을 열어둔 채로 자고 싶어 하고, 라비는 창문과 커튼을 닫고 자기를 원한다.

살짝 춥더라도 바깥공기를 마시면서 자야 머리도 개운하고 다음날 축 처지지 않는다는 커스틴의 완강한 입장에, 라비는 시위하듯 이불로 몸을 칭칭 감고 방 한쪽 구석 의자에 앉아 뾰로통해 있다.

커스틴은 그런 라비가 유치하다고 생각한다.

라비를 이해하기 위해선 어릴 적 라비와 만나야 한다.

베이루트에서 자란 라비의 유년기는 전쟁과 폭음으로 점철돼 있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쳐야 조금의 안정감이라도 되찾던 시절.

이젠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는 안전한 나라에 살지만, 그때의 감정은 이미 라비 안에 아로새겨져 있다.

따라서 구태여 창문을 열려하는 커스틴의 행동 속에 라비는 자신을 또 한 번 전쟁통으로 내몰려하는 잔인함을 읽는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식당 예약시간 30분 전에는 도착해야 안심이 되는 커스틴과는 달리, 라비는 예약시간이 8시면 8시20분까지 도착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저녁 8시면 퇴근시간도 아니어서 차도 안 막힐 테고, 또 일찍 가면 추운데 밖에서 기다리기밖에 더하냐고 라비는 말한다.

그는 30분이나 일찍 가려 하는 커스틴을 이해할 수 없다.

커스틴을 이해하기 위해선 어릴 적 커스틴과 만나야 한다.

7살 때 말 한마디 없이 가족을 버린 아버지.

그때 뿌리내린 두려움을 걷잡기 위해 커스틴은 자신의 삶을 최대한 예측가능한 범위 안에서 통제하는 식으로 살아왔다.

따라서 늦으면 늦는 대로 여유롭게 출발하자는 라비의 말은 커스틴에게 아버지가 자신을 떠난 그날로 돌아가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책을 읽으며 아내의 유년기를 떠올렸다.

아내는 3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다.

어린 나이임에도 뚜렷하게 기억난다고 한다.

지금은 마냥 인자하고 부드러운 두 사람이 그때 얼마나 피 터지게 싸웠는지.

그 뒤로 주중엔 아빠집, 주말엔 엄마집을 오가는 탁구공 생활을 한 지 10년째가 되던 해,

아내는 차라리 영국에 있는 할아버지와 함께 살겠다며 어린 나이에 혼자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를 떠났다.


그때 아내가 어떤 아픔을 느꼈고,

어떻게 그 상황을 해석했으며,

이를 통해 어떤 방어기제가 생겨났을지 난 헤아릴 수 없다.

내 말 한마디가 어떤 기억의 실타래를 잡아당겼을지, 그 실타래 끝에 어떤 사건과 감정이 묶여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내가 이혼을 말할 때, 내가 싫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닌, 내게 도와달라고 SOS를 치는 거라는 상상을 해봤다.

“난 어렸을 때 하루가 다르게 싸우는 엄마 아빠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어.

혼란스러울 때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는 생각.

평화로운 건 언제 깨질지 몰라 불안하지만, 혼란은 이미 바닥이라 그럴 걱정이 없거든.

난 널 사랑하고 우리 가족을 지키고 싶어.

하지만 네가 약속한 것을 지켜주지 않으면, 앞으로도 지킬 거라는 믿음이 사라지면, 나 혼자 이 가정을 지탱해 낼 힘이 없어.

만약 이 평화로움이 언젠가 깨질 거라는 생각이 들면 나도 모르게 혼란을 택할지도 몰라.

내 안에 불안해하는 3살의 어린 나를 안심시켜 줘.“


어설프게 오은영 선생님 흉내를 내봤는데, 아내가 보면, 뭔 개소리야 난 진짜 너 꼴 보기 싫어서 한 얘긴데, 라며 코웃음 칠 수도 있겠다.

어찌 됐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요지는 내 눈엔 저렇게 반응할 일인가, 싶은 반응을 아내가 보일 때, 복수심과 분노 말고 또 다른 선택지가 하나 생겼다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과거의 일 때문에 이런 내 행동/언어에 민감한가 보다,라고 생각하는 것.

더 나아가 아내의 분노를 한 겹 한 겹 벗겨내다 보면 두려움에 웅크린 어린아이가 있다는 것.

이렇게 생각하니 화를 더 큰 화로 받아치고 싶다는 마음을 주체하는 게 조금은 수월해졌다.

심지어 정말 가끔씩은, 1년 365일 중 약 이틀 정도, 내 감정을 살피기 전에 아내를 먼저 다독거려주고 싶은 마음까지 생긴다.


책 어딘가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사랑엔 두 가지 축이 있다고.

받는 축과 주는 축.

보통 내가 누구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으면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왜냐면 난 벌써 받았고 충족되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미완성 사랑이다.

사랑을 준 상대방도 사랑받길 기다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주는 건 받는 거랑은 좀 다르다.

주기 위해선 일인칭 관점을 초월해야 한다.

아내랑 싸울 때 난 내가 얼마나 아픈지, 너로 인해 내가 얼마나 불행한지에 집중했다.

“고작 기저귀 때문에 날 이렇게 아프게 한 네가 미워. 어서 날 다독여주고 어루만져 줘.“

하지만 아내 역시 속이 뒤틀리게 아파할 거라는 생각은 미처 못했다.

내가 사랑받길 원하듯 아내도 마찬가지일 텐데.

세상에 하나뿐인 남편 자리를 꿰찼으니,

이젠 주는 사랑을 연습할 때인 것 같다.


앞으로 부모 되기를 앞둔 누군가가 내게 조언 따위를 구한다면 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이가 생기면 너와 00의 관계가 지금과는 많이 달라질 거야. 지금까지 서로 보지 못했던, 볼 일 없었던 모습들을 보게 될 거야. 접시를 깨고, 차문을 때리고, 소리를 지르게 될 수도 있어. 하루에 몇 번씩 이혼을 생각하고 유튜브에서 오은영 리포트를 보며 무릎을 치는 게 유일한 위로가 되는 날도 있을 거야. 그때 00와의 관계 자체를 의심하진 않았으면 해. 잘잘못을 가리지 않았으면 해. 어쩌면 그때 네가 필요한 건 네 상황을 너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 너 혼자 겪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 가장 중요하게는 지금도 괜찮고 앞으로 더 괜찮아질 거라는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몰라.”

이 추천사와 함께 <낭만적 연애와 그후의 일상> 한 권을 그 앞에 넌지시 내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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