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전증 환자로 살아간다는 건 폭탄을 안고 사는 것과 같다
생각해 보면 아이의 이상한 낌새를 바로 알아챈 것은 기적이었다. '내가 단순히 아이 컨디션이 안 좋은가보다 여기면서 출근을 했다면? 마냥 아이를 친정 엄마 혼자 데리고 있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발작처럼 눈에 확 띄는 변화였다면 누구나 바로 알아볼 수 있지만, 우리 아이는 고개와 눈이 돌아가면서 몸이 경직되는 형태로 경련이 일어나는 경우라서 쉽게 알아차리기 어렵다. 경기라고도 하는 경련이 장시간 지속된면 뇌에 치명적일 수 있어 바로 멈출 수 있도록 주사약을 놓는 거라는 설명을 나중에서야 의사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그 뒤로 우리 아이는 잊어버릴만하면 한 번씩 경기를 했다. 의사는 '바륨'이라는 약을 처방해 주면서 경기를 할 것 같으면 먹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이 옆에 24시간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이가 어느 순간 갑자기 경기 증상이 나타나다 보니 너무 늦게 약을 먹이곤 했다. 고개가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 먹이면 이미 늦은 거였다. 때론 조짐이 보였을 때 약을 먹이고 나면 약 기운에 바로 잠들었다. 일어나면 괜찮겠지 마음을 놓지만 깨면서 결국 다시 경기를 시작하곤 했다.
경기가 시작되면, 난 119에 전화하기 일쑤였다. 첫 번째 경기했을 때야 몰라서 택시를 불러 타고 갔지만, 빠른 대처가 필요하다는 걸 안 이후로는 무조건 119에 신고했다. 달려온 구급대원들은 산소마스크를 씌우고 아이의 변화를 관찰한다. 처음엔 구급대원들도 본인들이 생각한 경련이 아니다 보니 약간 의아해했다. 하지만, 여러 번 반복되면서 구급대원들에게 우리 아이 경련 형태에 대해 자세히 브리핑(?)하면서 병원까지 이송했다.
여러 번 구급차를 타고 병원 응급실을 다니면서 구급대원들에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난 우리나라 구급대원들에게 빚진 마음을 갖고 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마음을 전해본다. 구급대원님들, 너무 감사합니다!!
나중에는 약간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으면 무조건 바륨 약을 꺼냈다. 정말 운 좋은 날은 바륨약 먹고 한숨 푹 자고 경기를 안 하고 지나가기도 했다.
이 모든 판단은 순전히 엄마의 feel이다. 이상함을 감지하는 것도, 약 먹고 괜찮아졌다고 느끼는 것도....... 나중에서 표정만 약간 이상해도 마음의 준비를 하며 지켜보게 됐다.
어쨌든, 일 년에 4-5번 정도 하던 경기가 한 해, 두 해 지날수록 조금씩 줄어들었다. 7세쯤 됐을 때는 일 년 동안 한번 정도 했던 것 같다. 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있는 심정으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다가 7세에 유치원을 보냈는데 큰 어려움 없이 졸업을 했다.
뒤에서 얘기하겠지만, 셋째까지 출산하는 바람에 나의 육아휴직은 장기화되었고, 큰 아이 1학년 입학과 함께 드. 디. 어. 복직을 하게 되었다. 경기하는 횟수가 줄어들어 불안함이 조금 줄어들었던 건 사실이다.
그렇게 1학년에 입학하고 얼마 안 있다가 학교에서 아이가 토했다는 연락이 왔다. 다행히 육아휴직했다가 복직한 교사라고 교과 전담을 줘서 수업을 미루고 당장 아이 학교로 달려갔다. 토했다는 건 경기하기 직전에 보이는 일종의 신호였기 때문에 내 가슴은 쿵쾅쿵쾅 요동쳤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왜 또......
다행히 학교에 비치해 둔 바륨약을 바로 먹고 아이는 경기 없이 위기를 넘겼다.
경기하는 횟수가 많은 것보다 적은 게 좋겠지만, 경기를 한다는 건 계속 뇌에 무리가 간다는 얘기라 아예 하지 않아야 하는 걸 목표로 두었다. 1학년을 무사히 넘기고, 2학년을 무사히 넘기고 3학년이 되었을 때 나름대로 희망을 가졌다. 계속 경기약을 복용 중인데, 이렇게 5년 동안 경기 안 하면 약을 끊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3학년 때 결국 다시 경기를 했다.
학교에서 공부를 잘 마치고 하교해서 집에 와서는 누워있다가 경기를 했다. 경기 안 한지 3년이 돼 가면서 나도 긴장을 늦추고 있었고 아이도 좀 무리했던 것 같다. 결국 다시 구급차 타고 응급실행이 이어졌다. 응급실이 익숙한 나
. 수속 밟고 주사 맞고 하룻밤 응급실에서 쪽잠 자고 나면 다음 날 새벽, 아이가 깨고 퇴원해서 함께 집에 온다. 병원에서 밤에 간호하고 쪽잠 자는 당번은 남편이었다. 아무래도 어린 동생들이 둘이나 있다 보니 난 병원에서 집으로, 남편은 회사에서 병원으로 출근한다. 내 빈자리는 늘 엄마 몫이었다. 친정 엄마가 어린 동생들을 돌봐줬기 때문에 남편 올 때까지 큰 아이 옆을 지킬 수 있었다.
다행히 3학년 이후로는 경기를 하지 않았다.
첫 경기 이후, 몇 개월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뇌초음파를 했다. '오른쪽과 왼쪽 뇌파가 다르다, 경기파가 존재한다'는 등 단순한 이야기 외에는 어차피 못 알아들을 거니 설명 안 해주겠다는 식으로 나오는 그 의사 선생님 때문에 상처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어쩌랴? 내가 만날 수 있는 최적의 의사 선생님인걸.....
갈 때마다 상처 한 가득씩 안고 돌아왔는데, 세월이 흐르니 선생님도 많이 부드러워지고 친절해졌고, 무엇보다 내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져서 편안해졌다. 이젠 웃으며 이야기하다가 웃으며 진료실을 나온다.
5년만 경기 안 하면 끊겠다던 경기약을 15살이 됐는데도 말씀 한 마디 없으셨다. 슬쩍 물었더니 뇌파검사 결과 계속 오른쪽 뇌파가 안정적이지 않다, 경기파가 다소 줄었지만 아직 남아 있다는 이유로 계속 복용하자고 하셨다.
그러다가 재작년부터 두 가지 먹던 약을 한 가지로 줄이고, 나머지 하나도 서서히 용량을 줄이더니 작년에는 끊어도 될 것 같다고 하셨다.
18살, 고2가 끝날 무렵, 드디어 경기약을 졸업했다. 남은 약은 과감하게 버. 렸. 다!!!
나는 그다지 감흥이 없는데 아이는 자기가 마치 정상이라도 된 것처럼 기뻐했다. 사실 경기파가 여전히 남아 있었고 일 년에 한 번씩 하는 뇌파 검사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 정도 경기파를 갖고 있으면서 지금까지 경기 안 했으면 약 없이 그냥 그 뇌파를 갖고 살아가도 되겠다는 게 의사 선생님의 소견이었다.
평생 먹어야 하나 걱정했던 것 한 가지가 해결되었다.
아이가 지금 약 없이 살아간 지 1년이 되어간다. 앞으로도 쭉 이렇게 약 없이 살길 기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