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을 수용하는 다섯 단계가 있다고 한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그저 앞선 네 계단을 차분히 견디면 나도 혼자가 된 나의 삶을, 이 이별을 수용하게 될 줄로 알았지만 역시 실전은 이론과는 다르다. 이쯤 되니 내가 하는 나에 대한 생각 중 착각이 아닌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나는 부정, 분노, 타협, 우울을 거쳐 다시 부정 그리고 분노로 빠져드는 굴레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없는 삶은 내게 있어서 영원히 수용될 수 없는 삶인 것일까. 혹 그녀가 나의 수용 그 자체는 아니었을까. 좋은 사람 만나, 나보다 좋은 사람 말구. 그녀는 마법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이었고 나는 꼼짝없이 그 속에 갇혀버렸다. 눈을 뜨고 감는 매 분 매 초에 망막에 그 애가 맺혔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그 애의 번호를 누르지 않았다. 몇 번이나 우리의 좋았던 순간들이 담긴 사진첩을 들여다 보고 그 애가 남긴 사랑한다는 메시지들을 되새기고 그 애가 주었던 편지들을, 선물들을 만지작거리며 내 심장이 이미 죽은 지 오래라 썩어 문드러진 것은 아닌지를 가늠해야 했다. 그래도 그 애를 붙잡으려 손을 뻗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나는 여전히 그 애를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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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는 나의 게슈탈트였다. 부분의 합보다 커져버린 전체. 일 더하기 일은 이, 이 더하기 이는 사지만 그 애와 함께한 십몇 년은 나의 일부이면서 전부였다. 그것도 전체를 한참 뛰어넘는 전부. 그 애가 없는 모든 공간 속에 그 애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 내 삶이었으므로.
그렇기에 일부에 불과했던 그 애를 도려낸 지금, 나는 전부를 잃은 양 고통스럽고 공허해지는 것이다. 어쩌면 그 애가 내게서 가져간 것 중 빛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 내게 남아있는 것들이 있을 텐데도 세상이 암전 된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그러나 나는 짐승이다. 찢어진 거죽 속으로는 새 살이 차오르고 어둠 속에 머물다 보면 처음에는 제 콧잔등조차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이내 적응한 눈은 어렴풋이라도 사물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평생 어둠 속에서 살지 않고 불을 밝혀줄 무언가를 찾게 될 것이다. 그것이 형광등 스위치이든, 촛불이든, 곧 꺼져버릴 간이 휴대용 랜턴이든......, 그것조차 없다면 별빛을 바라보며 새벽이 밝아오기를 기다려도 좋을 일이다. 그것은 외롭고 고통스러울지 모르나 반드시 올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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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흠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그리 많겠냐만은 나는 나를 내심 그런 사람으로 여겼다. 나는 탈피하는 짐승이니 껍데기에 상처가 좀 난다 한들 한 겹 벗어내고 나면 그만인 것이다. 깊은 상처가 나고 만다면 그것은 또 그것대로 흉이 아니라 죽게 될 것이며, 운이 좋아 죽지 않는다면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탈피를 하며 옅어지기를 기다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기분으로 남겨두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죽을 때까지 흠 없이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혼자서 믿었다.
삼십 년 넘게 파충류라는 개체로 살아가는 동안 그리 자신했었는데, 이제는 도무지 자신이 없다. 나는 알지만 몰랐다. 내가 만들어내었던 모든 생각과 계획과 미래는 착각이었다. 고개를 들었다. 왜 이제야 알았는가. 도마뱀은 꼬리가 끊어져도 살 수 있지만, 잘린 꼬리는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이제 꼬리 없는 도마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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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종류의 도마뱀들이 꼬리에 영양을 비축한다고 한다. 그래서 도마뱀이 건강한지 아닌지는 꼬리만 보아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고. 그렇다면 나처럼 꼬리를 잃은 못난이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놀랍게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