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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Apr 11. 2023

미국형 경쟁과 유럽형 경쟁 (2)

내가 경험한 유럽의 교육(경쟁)-박사과정 면접

지난 글에서는 한국과 미국에서 경험한 교육들과 그 속의 경쟁들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이번 글에서는 미국에서 대학 졸업 후 대학원 과정을 유럽으로 오면서 경험했던 것들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스웨덴에서 2년

네덜란드와 스웨덴에서 합격 이메일을 받고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내 관심분야를 더 다양하게 연구하던 스웨덴의 대학을 선택했다. 내가 처음 스웨덴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수업을 들었던 순간은 내 인생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선 스웨덴에서 수업을 들을 때 성적이 단 3가지만 있었다. No pass, Pass, Pass with distinction. 그러다 보니 한 두 문제 더 맞힌다고 성적이 달라지지 않았고 나는 문제를 맞히기 위해 공부하는 게 아니라 수업 전부를 훑어보지는 못해도 중요한 부분을 꼼꼼하고 확실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시험이 끝나서 머리에 남은 게 없다는 말이 쏙 들어갔다. 몇 년이 지난 아직도 그 당시 수업에서 배웠던 내용들을 기억하고 있고 어떨 때는 유용하게 응용하기도 한다. 


연구도 내가 교수님을 찾아가 매달리는 게 아닌 교수님들이 연구 주제를 공고를 내면 학생들이 확인하고 관심 있는 교수에게 찾아가 면담을 해서 선택하는 방식이었다. 교수가 선택하는 게 아닌 학생들이 선택하기 때문에 지위에서 나오는 힘의 차이를 느낄 수 없었고 나의 관심사가 무시보다는 존중받는 느낌을 받았다. 


연구를 진행하면서도 지도의 관점이 미국과는 확연히 달랐다. 미국에서는 내가 어떤 대단한 결과를 내는지가 중요했다면 스웨덴에서는 내가 얻어낸 결과를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잘 소통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과학은 혼자 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협동하는 능력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스웨덴에서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박사과정을 지원하는 시기가 다가오자 나는 지원서에 규칙하나를 세웠다. 절대 미국에 지원하지 않을 것. 그렇게 나는 미국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네덜란드로 향했다. 


네덜란드에서 2년째

네덜란드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니 지금껏 봤던 원서 접수와 면접들이 쭉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는 온라인으로 내 모든 점수들을 제출한다. 대학교 성적과 GRE 시험 성적, 필요하다면 고등학교 성적도 제출해야 한다. 거기에 더해 졸업증명서, CV와 자소서(전반적인 삶에 대한 자소서와 연구경험에 대한 자소서)까지 나를 뽐내고 부풀리는 한편 증명도 해야 하는 생각보다 정신이 소모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이때가 내 인생에서 나 스스로를 가장 싫어했던 시기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나는 면접 기회 한 번 받지 못하고 서류에서 떨어졌다.  


그에 반에 유럽의 박사과정 지원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학교마다, 나라마다 다르겠지만 최소한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 독일의 내가 지원했던 곳은 원하는 포지션에 자리가 나면 성적표와 CV, 연구 경험에 대한 자소서만 제출하면 서류는 끝이 난다. 그 외에 더 요구하는 것도 없고 이 외에 더 보내지 말라고도 한다. 심지어 최종적으로 뽑히기 전까지는 졸업증명서도 받지 않는다. 그렇게 지원한 곳들 중 절반 이상에서 면접제의를 받았고 네덜란드에서 최종 합격해 지금 네덜란드에 오게 됐다. 


물론 미국에 지원했을 시기와 유럽에 지원했을 시기의 내가 다르긴 하지만 유럽에서 나에게 요구했던 자료들을 생각하면 연구 경험에 대한 자소서 외에는 달라진 게 거의 없고 어쩌면 더 나쁘기까지 하다. 스웨덴에선 성적이 3가지밖에 없었고 나는 대부분 상위 50%-75%인 Pass를 받았다. CV에도 중간에 1년이 넘는 공백이 있었고 그동안 딱히 연구에 관련된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연구 경험도 미국에서 처럼 여름 인턴, 논문 연구가 전부였다. 


지도 교수님들에게 왜 나를 뽑았느냐 물어보기는 쑥스러워 아직 물어보지 못했다. 이건 아마 졸업할 때에서야 겨우 물어볼 수 있으면 다행이지 않을까 싶다. 다만 확실한 건 교수님들이 내 연구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면접에서 교수님들은 내 성적과 졸업한 학교에는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내가 했던 연구들을 같은 과학자로서 순수하게 궁금해했다. 그렇게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연구에 대한 질문과 답, 토론을 이어갔고 며칠 지나지 않아 나를 뽑고 싶다는 이메일을 받았었다. 면접이라는 것도 잊고 신나서 떠들었던 면접이 끝나고 들었던 충족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박사과정 지원을 하는 동안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미국에서보다 내가 정신적으로 훨씬 안정적이었다는 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주변에서 받은 조언의 관점들이 전혀 달랐다는 게 큰 한 몫했다고 본다. 미국에서는 좀 더 시험 성적을 잘 받아야 한다, 자소서를 더 매력적으로 써야 한다, 제출하는 자료 하나하나 전략적으로 나를 뽐낼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등등 나 자신을 갈고닦아야 하는 조언을 받았다. 하지만 스웨덴에서 받았던 조언은 나는 이미 충분하고 그저 나와 잘 맞는 자리와 지도교수를 만나는 운이 작용해야 하는 것이었다. 운이라니. 이 막연하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요소로 내 미래가 결정된다니 어떻게 보면 절망적인 조언이지만 그 배경을 생각하면 그렇게 절망적이지만은 않았다. 


'운'이라는 조언 배경에는 물론 내 서류에 부족한 점이 있으면 더 보완해야 하지만 나라는 사람 자체는 이미 충분하다는 것이다. 나를 무리하게 부풀리지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지금처럼 계속 따라가다 보면 결국엔 해낼 것이라는 확신이 막연한 한편 큰 위로와 안심이 되었다. 


면접에서 떨어지는 동안에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않았던 건 주변의 조언과 분위기에 나도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할 수 있다는, 나는 이미 충분히 박사과정에 충족하는 사람이라는 든든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근거 없는 자신감은 근거 있는 자신감이 되었다. 


마무리하며

유럽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게 있다면 "Good enough"이라는 마인드이다. 너무 모자라지도, 너무 과하지도 않은 딱 적당한 그것. 스웨덴어로는 라곰(lagom)이라고 한다. 나태함에 빠져 너무 모자란 것도 안되지만 무언가 대단한 걸 이루기 위해 과하게 무리해서 다른 중요한 가치들을 소홀히 하는 것도 문제라는 것이다. 네덜란드에서도 지도교수님의 단골 조언은 너무 무리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늦게까지 일을 하고 있으면 교수님은 안 피곤 하냐며 집에 가라고 하기를 몇 번이었다. 그 늦은 시간이라는 게 겨우 오후 6시였지만... 논문을 쓸 때도 "Good enough"의 수준이 되면 손에서 놓아주는 것도 능력이라는 조언도 종종 하신다. 휴가를 아끼지 말라는 것과 휴가 중에는 이메일 비밀번호를 잊을 만큼 푹 쉬라고 하기도 했었다. 연구도 중요하지만 연구가 내 삶에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꾸준히 상기시켜 주는 말들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분위기가 잘 맞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유럽 사람들 중에도 치열한 경쟁을 기피하는 문화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능력이 너무 뛰어난 사람을 억누르는 분위기가 있는 스웨덴에 결국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그 사람들이 틀렸다기보단 내가 미국에서 피폐해졌던 처럼 그들에게 이 환경이 맞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실제로 유럽에 진저리를 치며 미국으로 넘어갔던 사람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게 지내는 경우도 종종 보았다. 물고기가 육지에서 억지로 살아갈 수 없듯이 각자에겐 자신에게 맞는 환경이 있다고 생각한다. 


유럽 생활도 어느새 4년 차이지만 나는 아직도 조급해하고 불안해하며 무리해서 몸을 부풀이려고 한다. 한국에서 20년, 미국에서 6년의 경험이 한순간에 바뀔 순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매일매일 일 외에 내 삶에서 소중한 것들을 찾아가고 지키려 노력한다. 내가 점점 지금의 이 길을 나아갈수록 전 세계 사람들을 만나고 어쩌면 경쟁해야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 과정에서 뒤처지고 절망할 수 있지만 일이 나의 전부가 아닌 내 삶을 즐기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는 것을 항상 상기하려 노력하고 이렇게 글을 쓰며 다시금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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