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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희 Mar 29. 2024

사랑의 대손충당금

회계적으로 사람을 떠나가게 되는 과정을 그려본다면

나는 도무지 회계에 적성이 없는 인간이다. MBTI가 ENFP인 나의 머릿속은 내 방처럼 정리가 되지 않은 난장판이고 무계획적이다. 그럼에도 나는 학부 4년을 세무학과를 전공했고 지금도 세무를 공부하고 있다.


회계는 나에게 몇 가지 선물을 주었다. 지금까지 공부한 바에 의하면, 회계는 수학보다는 법에 비슷한 학문이다. 목차와 체계에 빠삭해야 한다. 회계를 하기 위해서는 유기적인 목차의 개념들을 잇는 방법에 능통해야 하고, 저절로 생각에 체계를 잡는 방법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울증이 논리를 비약시킬 때 대항하는 좋은 수단이다. 그래서 나는 조금은 회계를 거치며 논리적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회계가 나에게 준 것은 이 학문의 몇몇 개념들이 인생의 거대한 장막을 들추듯 진리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


회계에는 대손충당금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를 설명하기 전에 회계의 기본 정의인 발생주의를 설명해야 한다. 발생주의란 회계 거래는 거래가 발생했을 때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현금이 실제로 오고 가고는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내가 외상으로 물건을 팔았을 때도 회계에는 매출금이 자산으로 잡힌다. 돈이 없어도 그렇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일반적으로는 내가 외상으로 물건을 팔았을 때 후에 돈을 받게 되지만, 상대편 회사가 부도가 난다 던 지 해서 그 외상매출을 돌려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가 있다. 더욱이 경영자들이 경영 성과를 올리기 위해 상대방의 신용을 생각하지 않고 외상매출을 하는 경우가 생길 수가 있다. 그런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회계에서 사용하는 개념이 대손충당금이다. 대손충당금은 미리 얼마치의 돈을 돌려받겠거니 생각해서 미리 돈을 두는 것을 말한다. 일종의 쿠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00만 원의 외상매출금 5만 원은 돌려받을 것이라고 예상되면, 5만 원은 외상매출금에서 차감하여 실제 장부상에 기록되는 외상매출금은 95만 원이 되는 것이다.


이 개념을 알게 되고 나는 탄성이 나왔다. 우리는 사람과의 이별을 갑자기 겪지 않는다. 내 마음이 100이지만 통보받는 이별에 순식간에 0이 되어야 하는 것을 관계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대손충당금이 있다면 어떨까. 네가 떠나갈 가능성이 10이 있으면 나는 대손충당금으로 10의 감정을 미리 가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90의 마음으로, 80의 마음으로, 미리 식혀 둔 감정으로 담담하게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상처받고 싶어 하지 않으므로 이별 직전에는 마음의 예비를 해 두는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를 두고 대손충당금이라고 부른다. 


살면서 나는 수많은 대손충당금을 산정해 왔다. 누군들 그럴 것이다. 우리는 모두 겁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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