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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희 Apr 09. 2024

용서란 유량flow의 개념이다

가정폭력에 대한 글입니다. 열람시 주의 바랍니다.

아래 내용에는 상대방의 개인정보를 의도적으로 각색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제야 이 이야기를 한다. 이 이야기를 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고민이 필요했다. 나는 관계 속에서 학대를 당한 경험이 여러 있다. 새아버지가 그렇고 학교 다닐때 급우들 사이에서 그렇고 유학 중 만나던 사람에게도 그런 적이 있다. 이번에 이야기할 내용은 마지막 후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용서란 단어는 비용서를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다. 정확히는 어느 날은 내가 용서를 해서 그 날을 극복했다고 생각하다가도 어느 날은 마음 속에서 천불이 나서 주체할 수 없는 증오에 몸서리치는 날들 전체를 말한다. 그 모든 걸 극복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용서가 저량stock의 지표가 아니라 유량flow의 지표이기 때문이다. 그 싸인 함수를 모두 통틀어서 용서라고 말한다. 용서에 대한 잘못된 편견은 용서를 해야지 사람이 더 나아지고 성숙해질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이다. 아니다. 사람은 용서라는 과정 속에서 다만 그냥 살아갈 뿐이다. 고통 속에서 교훈을 얻는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내 20대 통틀어 깨달은 바가 있다면, 알지 않아도 되는 고통이 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 사람은 호주에서 만났다. 그 사람은 돈을 많이 버는 전문직의 사람이었고 나는 유학생에 돈 없고 영어를 못하고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세상에 고립되어 있던 내가 그 사람에게는 서열에 대해 목말랐던 비틀린 마음을 충족시키는 좋은 먹잇감이라는 것을 후에 알았다. 그 사람은 내가 살이 찐다고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고, 내가 목이 말라도 물을 주지 않았으며, 내 약을 숨기곤 했다. 내 연락처의 비밀번호를 알아내 타인에게 나인 것처럼 연락을 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소리를 지르거나 집안을 부수거나 화를 내곤 했다. 내가 공부를 하지 않고 쉬고 있으면 악을 쓰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 내가 그보다 좋은 대학원에 들어갈 때 폭언을 했다. 너는 그 대학원에 갈 수 없어. 멍청하니까. 너는 영어도 못하고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


어느 날 모든 관계가 산산히 부서졌을 때 나는 이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았다. 이러다가 내가 이 사람에게 죽겠구나 싶었던 날 나는 짐을 싸서 도망쳤다. 호주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모든 연락을 끊어버리고 호텔에 머물러 진술서를 쓰기 시작했다. 처방받은 자낙스를 먹고, 글을 쓰다가 까무러치고, 또 자낙스를 먹고 글을 썼다. 그렇게 진술서를 쓰자마자 모든 구호단체에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하염없이 기다렸다. 답이 온 호주의 구호단체에서는 "어떤 단체에서 당신을 인계refer했는가?"라고만 앵무새처럼 물어봤다. 자기네들 입장에서는 호주의 시민권자도 아니고 아무것도 증빙할 수 없는 사람이 피해호소인에 지나지 않는 나를 도와주기에는 껄끄럽다는 입장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리퍼럴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니 그 단체에서는 오늘부터 3일동안 연락을 아무때나 할 것인데 받지 않으면 기회는 날아간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3일동안 호텔방에 처박혀서 연락이 언제 올 것인지 기다렸다.


다른 문제가 있었다. 학교의 휴학 문제였다. 도저히 공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서 학교측에 알렸더니 학교측에서는 휴학을 합리적으로 해야 하는 근거가 있는 문서들을 가져오라고 했다. 나는 처음에는 나의 이슈를 숨길 생각이었기 때문에 곤혹스러웠다. 몇 일이 지나서 결국 나는 지금 이러저러한 상황에 쫒기고 있다고 말하니 학교 측에서 이머전시 담당 부서의 사람에게 연락을 해 주었다. 그래서 그 사람을 통해서 한 단체에 연결이 되었다. 나는 짐을 싸서 그 단체로 갔다. 호텔 앞으로 택시를 보내드릴테니 그걸 타고 오세요. 돈은 내지 않아도 됩니다.


그 단체는 성폭력 및 가정폭력 담당의 비영리 단체였다. 도착해보니 거기서 다시 봉고차를 타고 어디론가 갔다. 그리 멀지 않은 집이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가정집과 다를바가 없었지만 들어가보니 쇠사슬이 가득한 집이었다. 나는 나와 비슷한 상황의 여성들과 같이 방을 쓰게 되었다. 당시 있던 사람은 인도인 한 명과 호주인 한 명이었다. 호주인은 릴리(가명)라고 불리우는 내 어머니와 같은 또래의 백인이었고 인도인은 푸니마(개명함)라는 밝고 명랑한 여자였다. 나는 그 집에서 3개월을 살 수 있었다.


우리는 소송을 하기로 했다. 호주에서 가정 폭력을 당한 사람은 DVO라는 서류를 만든다. 내가 폭력을 당했음을 자세히 정리해서 증명한 서류였다. 그게 통과가 되면 그 사람은 나에게 5년동안 연락 및 100m이내로 들어오지 못한다. 나는 처음에 썼던 진술서를 써서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단체 사람은 말했다. "제희, 당신이 고통스러운 건 이 글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지만 법정에서 먹히는 내용은 이런 게 아니예요. 다시 한 번 써서 가져다주세요." 나는 처음으로 오열을 했던 같다. 내가 고통스러웠던 것, 나의 믿음이 부서진 것, 나의 영원의 마음이 훼손된 것들은 법정에서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 결국 나는 새로 소장을 다시 썼다.


내가 오열한 것을 본 푸니마는 나에게 잘 했다고 칭찬해주었다. 우리는 고통스럽게 보여야 해. 옷도 아무렇게나 입고, 예쁘고 즐겁게 보인다면 저들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니까. 피해자다움을 증명해야 해.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아직도 궁금하다.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일까?


짐을 가지러 가는 절차도 이루어졌다. 경찰과 대동하여 그 집에 들어가서 짐을 싸그리 가지고 나와야 했다. 제한시간은 10분이었다. 나는 모든 짐을 싸그리 가지고 나왔다. 그 중 그와 끼었던 반지가 하나 눈에 보였다. 난 잠시 고민했다. 저 반지를 가져가면 나의 정서적 부채가 될 텐데, 아직도 왜 그 반지를 들고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반지를 가져온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우격다짐으로 물건을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단체 사람들은 내 짐을 중간에서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도청이기나 위치추척기를 달아놓는 경우가 있어서 그렇다고 했다. 나는 주저없이 내 물건들을 찢고 부수고 헤치기 시작했다. 활동가가 괜찮냐고 물어봤을 때 나는 그렇게 답했다. 아임 펑셔널. I am functional.


시간이 흘러 법정에 섰다. 마지막 날 가해자가 나에게 연락을 했다. 받지 않았다. 나는 가정법원에 들어섰다. 피해자들도 있는 법정에서 마지막으로 노트북을 켰다. 엄마에게 연락이 와 있었다. 가해자가 엄마의 연락처로 연락을 해 왔다며 메일을 포워딩해주었다. 미안하다는 글이 써져 있었다. 나는 그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너무 늦게 들었다. 펑펑 울다가 법정으로 들어갔다. 상대방은 내 글을 인정하지는 않지만(인정하게 되면 실형을 살게 되므로) 자기가 DVO를 받겠으며 가정폭력 혐의는 인정한다고 했다. 그렇게 그는 나에게서 접근금지 명령을 받았고, 사건은 그렇게 끝이 났다.


나는 가끔 꿈 속에서 그 때로 돌아간다. 호텔방에서 아무의 도움이 없이 자낙스를 먹으면서 버티던 나날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그 사람의 직접적인 폭력이 아니라 그 빈 방에서 혼자 있었을 때의 막막함을. 내가 그렇게 몰려있게 만든 삶에 대한 근본적인 불쾌감이다. 나는 다시는 나를 그런 식으로 방치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자살시도를 하고 정신병원을 거치며 겪은 깨달음이다. 더 이상 나는 그 때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앞으로의 관계에서도 절대로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을 것이라고, 내 사랑이 먹잇감이 되는 일은 절대로 피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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