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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희 Nov 22. 2023

2. 당신이 한국어를 쓰기 싫다면

할랄 마크가 있는 음식점을 이용하면 좋다

처음으로 도착한 유학원에선 실망을 했다. 여기가 한국의 토론토인지 캐나다의 서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유학원 복도애는 나처럼 상기된 한국인 12345가 가득 보였다. 앗 쟤네랑 같은 반이 되면 안 되겠다, 제발 중국인인이나 일본인과 같은 반이 되게 해 주세요 생각하니까 그 한국인들과 같은 반이 되었다. 야매 신자의 기도는 신이 느슨하게 들어주시는가, 나는 중국인 친구들과 친해져서 영어를 쓰고 싶었는데 별 수가 없었다. 결국 처음에는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기로 했다. 지금에서야 고백하건대 그 친구들에게 악감정은 없다. 


처음에는 친구들과 팀홀튼이라는 카페에 갔다. 미국의 스타벅스가 있으면 캐나다에는 팀홀튼이 있었다. 더블더블과(커피인데 더블로 달다) 블루 제이스(도넛으로 토론토의 상징 푸른 새가 그려져 있다) 조합으로 맨날 먹었던 기억이 있다. 곧 한국에 들어온다는데 그 맛일까 기대된다.


그러다 묘한 일이 생겼다. 나랑 클래스가 달랐던 대만 남자가 나를 좋다고 쫓아다니기 시작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랑 연애를 해서 영어 실력을 높이면 좋았을 텐데, 당시 나는 사귀는 사람이 있어서 그 친구를 거절했다. 애는 순박하고 착한 친구였는데 왜 그런 거. 좋은 사람인데 좋은 이성은 아닌 것. 그래서 일부러 인상 쓰고 그 친구를 쳐냈는데 내가 센스가 없어서 그 친구는 내가 자신을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들었다. 좀 미안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나가서도 샌다고, 그 당시에는 사람과 어울리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학원에 꼬박꼬박 나가는 일도 힘들었고 간다고 해도 애들과 어떤 대화를 해야 하는 지도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면 그냥 적당한 스몰토크로 퉁치면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당시의 나는 너무나 진지하고 너무나 어설펐으므로 점차 겉돌기 시작했다. 영어를 조금씩 하기 시작하면서 어차피 내 목적도 성취한 셈이었다. 여기서 독해 지지 않으면 한국어만 쓰다가 생돈 날릴 것 같았다. 최대한 한국인들과 멀어져서 다닐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생각했다. 최대한 한국인과 접점을 안 만드는 일은 무엇일까? 나는 앗살라말라이쿰에 눈길을 돌렸다. 점심시간이 되면 학생들은 다들 도시락을 가져와 먹거나 근처 카페를 가곤 했지만 나는 할랄을 선택했다. 한국 학생들에게 이슬람 글자와 할랄 마크가 크게 그려져 있는 가게는 연이 없는 곳이었다. 실제로 할랄 마크가 걸려있는 그 가게에 내가 6개월을 다녔지만 동양인이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거다! 싶어서 나는 곧장 그 가게로 들어가 있는 카레 없는 카레 다 맛보며 학원을 다녔다. 


학원 옆에는 거대한 미술 대학이 있었다. 거기 학식도 고맙게 받아먹었다. 5불이면 나시고랭을 먹을 수 있었으니 물가에 비해 엄청 싸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수요일이 되면 미술 대학에 붙어있던 미술관이 공짜였는데 나는 그때마다 미술관에 혼자 가서 시간 때우기를 했다. 사람들은 너무 복잡하고 시끄럽고 종잡을 수 없는 존재였지만 그림은 정적이고 고요하고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 그게 좋았다. 


그렇지만 모든 게 그렇게 고요하게 흘러가진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보자마자 사람의 급을 나누고 그 급에 나누어 사람을 비웃거나 무시하는 종류의 인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인간이 하나 걸렸는데 그 인간은 나에게 지나가면서 비웃거나 나의 말을 무시하곤 했다. 그러다가 수업 시간에 교수에게 대들다가 낮은 클래스로 내려갔다. 그 순간 나는 더 크게 비웃어줬다. 꼽주는 쾌감이 그렇게 좋은 줄 몰랐다.


그러다 캐나다에서 사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언젠가 본 다큐멘터리에서 무연고자의 시신은 화장해서 구청 맨 지하에 방치해 놓는다는 것을 종종 생각했다. 완벽한 나의 미래였다. 나는 내 미래가 무연고자가 되어 고독사해서 발견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므로, 이왕에 그런 거라면 캐나다에서 내 생사 여부를 아무도 알 수 없도록 고독하게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캐나다에 정착하면 깡시골로 가야지. 가서 혼자서 살다가 죽어야자. 삶의 번잡스러움은 더 이상 싫어. 같은 생각을 하면서.




아픈 와중에 써서 글이 재미있게 나오지가 않은 게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입니다. 좋아요, 구독, 댓글 모두 환영합니다.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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