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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희 Nov 15. 2023

1. 이 환자가 유학을 간다고요?

정신과 의사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요. 엄마는 단호했다. 거기서 '이 환자'는 나였다. 당사자인 나도 놀랐다. 아니 제가요? 누가요? 유학을? 간다고요? 문장의 어절마다 아찔해져 엄마를 쳐다보았다. 당시의 나는 하루 10알의 약을 먹고 20시간을 내리 잤다. 숨만 붙은 송장 신세인 내게 유학이라니요. 나야말로 당황스러워 엄마에게 말했다. 저는 영어도 못하는데요. 가서 하면 돼. 저는 환자인데요. 뇌에 힘을 주고 정신병을 이겨내렴. 어머니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게 네 인생 마지막 기회야.


2015년 5월 13일 나는 약봉지를 가득 안고 비행기를 탔다. 공항에서 수속을 기다릴 때 유학원 선생님이 그런 말을 하셨다. 제희야, 이제까지의 인생은 다 태평양에 버려버린다고 생각하고 새 삶을 살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짐을 하고 싶어 그제까지 피우던 담배와 라이터를 몽땅 엄마에게 줬다. 난 이제 이거 필요 없어. 실제로 그 이후 6년 동안 아무리 힘들어도 나는 다시 한번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


영어를 못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수능에서도 영어를 제일 못했으니까. 나는 유학을 가기 전 어학연수가 필요했다.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어학원에 다니기로 했다. 처음으로 토론토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경찰에게 붙잡혔다. 너는 왜 여행 비자인데 여기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인가? 손짓 발짓으로 추론해 보건대 그런 물음이었다. 실제로 나는 토론토에 있을 때 학생 비자가 아니라 여행 비자로 입국했다. 나는 잽싸게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티켓을 보여줬다. 그러자 경찰이 온화해졌다. 캐나다에 있으면서 여행 비자라는 건 성가신 것이었다. 은행에서 계좌를 만드는 일도 아주 힘들었다. 그래서 현금 박치기로 6개월을 살았다.


나는 6개월 동안 어머니의 친구분과 같이 살게 되었다. 어머니의 친구분은 어찌어찌 영주권을 따셔서 새로운 직장을 위해 근처 컬리지에서 회계를 공부하시던 분이었다. 나는 언젠가 그 분과 한국에서 같이 일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내심 반가웠다. 그분은 조용하고 섬세한 분이었다. 우리는 방 두 개가 있는 집에서 각자 방 하나를 맡아 살았다.

당시 살았던 방. 걸려있는 사진은 가족사진과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 엽서.

그 집은 낡았었다. 캐나다의 집에는 형광등이 달려있지 않는다는 걸 후에 알았다. 집세는 계좌이체가 아니라 수표를 썼다. 아직도 수표를 쓰는 나라라니. 현대 첨단 IT 강국에서 산업혁명시대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집에는 세탁기도 없어서 옆에 있는 코인 세탁소에서 세탁을 해야 했다. 언젠가 화장실을 썼는데 발에 이상한 게 밟혔다. 쥐였다. 쥐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쥐 입장에서는 갑자기 엄청나게 무거운 게 자신의 척추를 눌렀으니 놀랄 법도 하다고, 나는 쥐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애를 썼다. 쟤는 우리 집에서 길렀던 햄스터와 친척이라고 몇 번이고 되뇌면서.


캐나다의 생활은 신기한 것이었다. 아래층에서는 밤마다 이상한 냄새가 올라왔는데 그게 대마초 냄새라는 걸 후에 알았다. 내가 살던 집 주변은 유태인들 거주 지역이었는데 그래선지 슈퍼마켓에 코셔 제품들을 따로 팔았다. 제일 신기한 건 구멍가게에도 델리라고 하는 부분이 있어 소시지나 치즈를 전문적으로 파는 공간이 따로 있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아무리 작아도 꽃을 판다는 것이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제법 낭만적이군, 우리나라 꽃집보다 투박한 꽃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점은 이후에 갔던 호주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아마 영연방 국가들의 공통점인 듯하다.


도착하자마자 어머니의 친구분은 친구들과 여행을 가서 시간이 붕 떴다. 나는 렌즈 세척액을 사고 싶었다. 그래서 1달러 샵에 가서 렌즈 세척액을 사려고 했는데 잘못해서 틀니 세척액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 나는 억울했다. 분명히 박스에 렌즈가 그려져 있었단 말이야. 그렇지만 내가 그런다고 틀니 세척액이 렌즈 세척액이 되는 일은 없었다. 어쩐지 눈이 지나치게 찰랑거린다 했어. 결국 그 틀니 세척액을 한국으로 돌아와 외할머니께 드렸다. 할머니는 외제 틀니 세척액을 손녀가 선물하셨다며 감격하셨는데 조금 미안했다.


어쨌든 그렇게 시간이 일주일 정도 지나고 다음 날이 되어 처음으로 유학원을 가는 날이 되었다. 나는 바짝 쫄아 있었다.




그래서 틀니 세척액을 산 제희는 어떻게 될 것인가! 다음 화에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라이킷과 구독, 좋아요를 누르신다면 더 재미난 글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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