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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기형 Feb 21. 2023

우리는 누구나 한때 어린이였다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발견한 문장과 시선

김소영 님이 쓴 어린이라는 세계는 어린이책 편집자로 10년 이상 일하고 현재 독서교실은 운영하는 저자가 오랜 시간 아이들과 함께 하며 발견한 '어린이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부모가 된다는 건 한 아이를 온전히 책임지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나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의 엄마 아빠를 이해하는 시간이기도 하지요. 좋은 부모가 되어야지, 오늘은 짜증 내지 말아야지 다짐을 해도 그걸 실천하는 건 너무 어렵고 매번 자책과 후회가 반복되는데요. 이런 따뜻한 책을 읽고 나면 딸아이의 세계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고 부모만 참고 배려하는 게 아니구나 라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문학평론가 김지은 님이 쓴 추천사도 인상적입니다. 맞아요, 어린이라는 세계는 정중하고 사려 깊고 현명함으로 가득한 것 같아요.

이 책은 어린이가 어른을 얼마나 성심껏 대해 주고 있는지 말해 준다. “바쁘다, 중요하다, 힘들다”라며 다그치는 어른을 힘껏 이해하고 기다려 주는 어린이는 더없이 다정한 사람들이다. 김소영의 글은 어린이만큼이나 따뜻하다. 좋은 날을 상상하며 애쓰다 멍든 그 작은 마음의 한 자락까지 놓치지 않고 다가간다. 그러나 그의 글은 타협 없는 엄격함을 가졌다. “어른은 어린이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책의 어느 장면을 읽어도 이 질문만은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멋지고 위엄이 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어른이 무례하다는 것을 이만큼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러나 더욱 몰랐던 것이 있다. 그것은 어린이라는 세계가 정중하고 사려 깊고 현명함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이다. 어린이가 우리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살펴보는 일은 어린 시절의 우리가 나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고 세계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었는가를 되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 마음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우리 모두가 읽어야 한다. 어린이와 무관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어린이라는 세계’는 당신이 잊고 있었던, 신중하고 용감했던 당신의 세계다.




1. 쓰면서 알게 된 한 가지는, 어린이라는 세계는 우리를 환대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어린 시절’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어린이들의 진솔한 모습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린이라는 세계가 늘 우리 가까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어린이에 대해 생각할수록 우리 세계가 넓어진다는 것이다.


2. 마침 그날 현성이와 읽은 책은 <시간이 흐르면>이었다. 윤곽이 뚜렷한 그림과 간결한 글로 ‘시간이 흐르면’ 일어나는 일들을 담아낸 그림책이다. 시간이 흐르면, “아이는 자라고 연필은 짧아져”. 시간이 흐르면, “빵은 딱딱해지고 과자는 눅눅해지지”. 그리고 이어서 신발 끈을 묶는 어린이 모습이 등장한다. “어려웠던 일이 쉬워지기도 해”라는 문장과 함께. 어쩐지 뭉클해져서 현성이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어른이 되면서 신발 끈 묶는 일도 차차 쉬워질 거야” 그러자 현성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것도 맞는데, 지금도 묶을 수 있어요. 어른은 빨리 할 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


3. 거울을 보지 않았지만 분명히 나는 얼굴이 빨개졌을 것이다. 지금도 할 수는 있는데. 아까 현성이가 분명히 ‘연습했다’고 했는데. 어린이는 나중에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도 할 수 있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4. 지금 어린이를 기다려 주면, 어린이들은 나중에 다른 어른이 될 것이다. 세상의 어떤 부분은 시간의 흐름만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나는 어린이에게 느긋한 어른이 되는 것이 넓게 보아 세상을 좋게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를 기다려 주는 순간에는 작은 보람이나 기쁨도 있다. 그것도 성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린이와 어른은 함께 자랄 수 있다.


5. 우리가 사랑하는 어린이의 잠자리를 살피고, 다정하게 이불을 덮어 주고, 그림책을 읽어 주고, 잘 자라고 인사하는 것은 어쩌면 그것만이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전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어린 사람이라도 악몽은 자기 힘으로 이겨내야 한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모든 어린이가 안쓰럽기도 하고, 새삼 대단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또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무서운 것들이 어린이의 어떤 면을 자라게 한다는 것을. 무서운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조심하고, 무서운 것을 마주하면서 용기를 키우고, 무서운 것을 이겨 내면서 새로운 자신이 된다는 것을. 그런 식의 성장은 우리가 어른이 된 뒤에도 계속된다. 그러니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해 줄 일은 무서운 대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주할 힘을 키워주는 것 아닐까.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을 응원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다독이면서.


6. 어린이의 개성은 그보다 복잡하게 만들어진다. 어린이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과 스스로 구한 것, 타고난 것과 나중에 얻은 것, 인식했거나 모르고 지나간 경험이 뒤섞인 존재다. 어른이 그렇듯이.


7. 어린이들과 글쓰기를 할 때, 집에 빗댄 설명을 종종 한다. 단어를 벽돌로, 문장을 벽으로, 문단을 방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특히 하나의 문단에는 하나의 생각만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잠자는 방, 부엌, 화장실을 구분하는 데 비유하면 설명하기가 좋다. 집의 크기나 식구 수에 따라 방의 개수가 달라지듯이, 글도 상황에 따라 단락 수가 달라진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어린이들이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게 내 경험을 덧붙인다.


8. “위로가 됐어요”라고 할 때 주이는 오른손을 가슴에 가져다 댔다. 그 장면이 이따금 생각난다. 평소 주이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린이에게는 어른들이 환경이고 세계라는 사실을 그날 다시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9. 어린이는 어른보다 작다. 그래서 어른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큰 어른과 작은 어린이가 나란히 있다면 어른이 먼저 보일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가 어른의 반만 하다고 해서 어른의 반만큼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가 아무리 작아도 한 명은 한 명이다. 하지만 어떤 어른들은 그 사실을 깜빡하는 것 같다.


10. 왜 그럴까? 나와 어린이는 키만 다른 게 아니라 공간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림책 작가 안노 미쓰마사는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에서 그것을 원근감의 차이로 설명한다. 멀리 떨어진 사물의 크기는 비교하기가 어려운 법인데, 어린이는 어른보다 두 눈 사이가 좁기 때문에 ‘비교하기 어려운 지점’이 어른보다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범위가 어린이 쪽이 더 좁다는 뜻이다. 어린이가 돌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통제 불능이어서가 아니라 감각이 다른 탓도 있을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 어린 시절 살던 곳에 가 보면 동네가 ‘좁아’ 보이는 것 역시 공간 감각의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11. 어린이는 자라면서 세상에 대한 크고 작은 오해들을 풀어간다. 하지만 어른이 보기에 어린이의 오해는 대체로 단순해서 그런 오해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도 모두 재미있는 일화 정도로 여겨지곤 한다. 나도 그렇지만 가끔은 어린이를 조금 놀려도 될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무지’에서 비롯된 일이니까 잘 알려 주기만 하면 오해는 금방 풀리고, 어린이도 같이 웃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린이 입장에서는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건 오해였어” “장난친 거야”라는 말을 하는 쪽과 듣는 쪽의 심정이 얼마나 다른지 아무리 무심한 어른이라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3. 이런 상황에서 어린이는 대상화된다. 어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어린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꼭 어린이를 존중한다고 할 수는 없다. 어른이 어린이를 존중하지 않으면서 자기중심적으로 사랑을 표현할 때, 오히려 사랑은 칼이 되어 어린이를 해치고 방패가 되어 어른을 합리화한다. 좋아해서 그러는 걸 가지고 내가 너무 야박하게 말하는 것 같다면, ‘좋아해서 괴롭힌다’는 변명이 얼마나 많은 폐단을 불러왔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어린이를 감사하지 말라. 어린이는 어른을 즐겁게 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어른의 큰 오해다.


14. 어린이는 정치적인 존재다. 어린이와 정치를 연결하는 게 불편하다면, 아마 정치가 어린이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 보기에도 민망하고 화가 나는 장면들을 어린이들에게 보이기 싫은 것이다. 그런 문제일수록 어린이에게 설명하기도 어렵다. 어린이는 그런 어른들의 모습까지도 볼 것이다. 달아날 곳이 없다. 이 봄이 지나고 다시 만났을 때 은규가 쏟아 낼 질문들 때문에 벌써부터 긴장이 된다. 봄이라고 졸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활짝 열고.


15. 나는 이제 어린이에게 하는 말을 나에게도 해준다. 반대로 어린이에게 하지 않을 말은 스스로에게도 하지 않는다. 이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래야 나의 말에 조금이라도 힘이 생길 것 같아서다. 일의 결과가 생각만큼 좋지 않을 때 괜찮다고, 과정에서 얻은 것이 많다고 나를 달랜다. 뭔가를 이루었을 때는 마음껏 축하하고 격려한다. 반성과 자책을 구분하려고,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린이 덕분에 나는 나를 조금 더 잘 돌보게 되었다.


16. 내가 이렇게 큰소리치는 것도 다 어린이 때문이다. 어린이가 그림을 망쳤을 때 “다 소용없는 일이란다. 구겨 버리렴”이라고 말한 사람은 없다. 고칠 수 있는지 보고, 안되면 새 종이를 주고, 다음에는 더 잘 그리도록 격려할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도 똑같이 말해야 한다. 실제로 어린이라면 어떻게 할까? 내가 새 종이를 주며 이런저런 미사여구를 늘어놓기도 전에 어린이는 종이를 뒤집어 뒷면에 새로운 그림을 시작한다. 냉소주의는 감히 얼씬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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