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늦은 세수를 하고 얼굴에 로션을 바르면 나도 모르게 가다듬어지는 마음.
글쓰기를 위한 각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내 안에 다짐되는 것들이 들여다보이기 시작했다. 서재에는 언제나 손길을 기다리는 원고지와 펜 그리고 컴퓨터와 프린터가 있어서 바로 컴퓨터로 작업할 때도 있지만 나는 먼저 펜을 들고 쓰는 걸 좋아한다. 마음 상태에 따라 글씨 모양이 달라지는 것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기에 캘리그래피를 배우고 싶었지만,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변명하는 이유는 그냥 이대로도 만족하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니 그런대로 나에게 감사하다 말하곤 한다. 어떤 선택이든 순리에 맡기는 것이 편하고 조바심마저 멀리 달아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 백 걸음만 나가면 한강공원이 있고 걷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나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한강에는 낚시 가능한 구역이 따로 있는데 낚시꾼들의 집요한 유혹에 걸려 흐릿한 하늘 소리가 메아리치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지느러미의 외침이 넓은 강에 메아리친다. 또 한쪽엔 홍제천에서 흘러 들어오는 깨끗한 물을 마시려고 앞다투어 몰려드는 수백 마리 물고기들의 꿈틀거림이 정말 장관을 이룬다. 호흡하는 모든 것들의 본능. 그 열망의 몸짓과 열정을 막을 수 없음을 자연에게서 배운다.
낚시에 걸린 물고기
여름비가 오시기에
마실 나갔다가
갈기갈기 찢겨
허공을 날은다
온통 핏빛인 하늘을 날은다
붉게 물든 하늘
저리도 아름다운데.
돌아보면 글의 소재들이 무궁무진하지만 글 쓰는 사람에 따라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이 다 소재가 될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잘 짜인 작품들에 부러움의 시선을 보내곤 한다. 나는 왜 남들처럼 감동의 글을 쓰지 못할까, 가끔 자책하면서 내가 만족하면 된다는 첫 마음을 잊지 않으려 다독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공감을 주는 글로 조금씩 발전하는 모습을 나에게 보이고 싶기도 하다.
어젯밤부터 비가 내리더니 잠깐 그친 사이에 잠잠하던 새들의 지저귐은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비 그쳤으니 놀자는 소리일까? 하루하루 주어지는 양식에 감사하다는 듯 까딱까딱 인사하듯 주워 먹는 새들의 모습이 정말 사랑스럽다.
한강변 잔디밭에서 어슬렁거리던 비둘기들이 사람이 의자에 앉자마자 주위로 슬금슬금 모인다. 날갯짓 한 번에 혐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사람 곁을 떠날 수 없는 유혹이 결국 쓰레기통에 코를 박는 슬픈 삶이 되었다. 뒤적뒤적 검은 비닐봉지를 찢어 내는 모습은 저러다 날갯짓마저 잊을까 걱정되고 안타깝다. 평화의 상징 비둘기가 어쩌다. 어쩌나.
며칠 전부터 베란다 가스보일러 부근에서 어린 새소리가 들린다. 연통 속으로 들어갔다면 위험한데. 어찌어찌 들어갔다 해도 나오는 건 불가능한 일이어서 연통을 뜯어내야 하나 고민하던 중 벽에 작은 바람구멍이 보였다. 그곳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았나 보다. 얼마나 다행인지. 아기 새들이 죽지 않아 좋았고 나는 연통을 뜯어내는 번거로움이 해결되어 이래저래 감사했다. 그때서야 어미들이 부지런히 오고 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으며 호기심이 발동해 자주 밖을 두리번거리는 즐거움이 일과가 되었다. 다리 다친 제비를 치료해 준 건 아니지만 흥부 놀부 이야기가 생각나 우리 집은 복 있는 집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어떻게 저 속에 집을 지었을까?”
“도시에서는 새들도 집 장만할 곳이 만만치 않아.”
남편과 주고받은 대화에 웃고 말았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말이다
어미 새는 새끼를 위해 우리 동네를 몇 바퀴나 돌았을까? 속은 또 얼마나 타들었을까. 상상을 초월하는 모성애가 안전지대를 발견하는 지혜를 갖게 되었나 보다. 나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어린아이들을 학대한다는 소식들이 심심치 않게 들리는 요즘 새들을 통해 인간들이 배워야 할 것이 무언지 알게 되는 씁쓸하고도 감탄하는 날이다.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는 날은 오전 내내 글 쓰는 데 시간을 보내지만 건강을 위해 오후엔 햇볕을 쬐려고 두 시간 정도 한강 주변을 걷는다. 책상에 앉으면 눈높이에 창문이 있어 종종 들러주는 바람도 반갑게 맞이하고 하얗게 웃으며 창 안을 들여다보는 구름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후후후 바람님 감사 감사’
‘흰 구름아 어쩜 그리도 예쁘니’
때로는 보이지 않지만 떠나지 않는 생각들을 관리해야 할 때도 있다. 그로 인해 밤잠을 설칠 때면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지붕 위에 홀로 서 있는 외로운 참새와도 같은 신세라고 할까. 수고와 슬픔에 더디기만 했던 시간들. 이런 삶을 어느 때까지 버텨야 할까 했어도 언제부터인가 한 달이 큰 숨 몇 번 만에 훌쩍 지나가더니 요즘엔 모였다가 금방 흩어져 버리는 구름처럼 한순간에 스친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전에 어르신들의 말씀이 오십 대는 오십 킬로미터, 육십 대는 육십 킬로미터 속도로 달린다 했던가.
글 쓰는 작업은 선천적인 감수성이 풍부해야 하고 또 쓰는 일이 즐거워야 한다. 가장 힘든 부분이라면 책 읽는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의 가능성으로 집요하게 붙어 있던 고집이 하나씩 순화되는 과정. 즉 읽는 이의 마음 변화를 기대해 보는 내용을 선택해야 한다는 거다.
오늘 아침에도 다른 아침과 같이 대충 집안을 청소하고, 버튼만 누르면 맛있는 커피가 ‘쪼르르’ 소리를 내며 잔 속으로 떨어져 채워지는 커피머신의 신기함과 편리함에 즐거워하며, 그에 곁들여진 사랑스러운 맛을 음미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책상에 앉았다.
어떤 책을 선택해 읽어야 할지, 어떤 내용의 글을 써야 할지 전문적 지식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그때부터 심장이 고민에 빠진다. 피나게 높은 나무 꼭대기 끝자락에 매달린 열매를 따긴 했는데 속이 텅 비어 어디에도 쓸모없을 때만큼이나 황당하고 어려운 게 글 쓰는 작업이다. 자질구레한 단어에 신경을 곤두세우다가 중요한 문장이 어디론가 날아가서 좀처럼 와주지 않는 건 세월에 탁해진 내 머리 탓이겠지. 거의 한 달 동안 글 쓰는 일에 흥미도 열정도 식어버렸던 내가 오늘은 사랑스러운 커피 맛 때문인지 밀쳐 두었던 원고지를 슬그머니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