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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 Oct 06. 2023

형부의 섬김, 자매의 마음


아침에 잠에서 깬 형부는 손에 테이프를 들고 침대로 터벅터벅 걸어가 언니 베게에 대고 찌익 찌익 머리카락을 떼어낸다. 테이프를 이리저리 살피며 거실에 앉아 있는 아내에게

“여보, 오늘은 머리카락 빠진 게 한 올도 없는데?” 

조금은 들떠 있기도 하고 조금은 안도하는 형부 목소리를 들으며 영심이와 나는 부엌에서 아침상을 준비한다.

“하나도 없다고?” 

답하는 언니 표정은 볼 수 없지만 목소리에는 다행이라는 감정이 묻어 있다.

처음 항암 치료를 받고 머리를 빗을 때마다 한 움큼씩 빠진다며 엉엉 울었다는 언니를 안심시키려는 형부의 배려다. 

영심이와 나는 언니 집에 들어서자마자 손을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 팔을 걷어붙이고 주방으로 들어가면 떠나 올 때까지 나름 부지런을 떨어도 늘 부족하단 마음이 크다. 

1박 2일, ‘부족해 부족해 1박 2일은 시간이 너무 부족해’ 

오후에는 또 서울로 떠나야 하기에 언니 입맛에 맞을 것 같은, 그리고 원기 회복에 좋은 수육과 주꾸미에 야채를 듬뿍 넣고 조리해 다음에 올 때까지 드시라고 소분해서 냉동실에, 냉장실에 나누어 넣어 둔다. 육류는 굽는 것보다 삶아 수육으로 먹는 게 좋고, 날 생선은 절대금물이라는 의사의 처방을 잘 지키고. 야채와 과일을 충분히 먹을 것을 매일 통화하면서 당부한다.


비싸서 서민들은 선뜻 살 수 없는 전복을 좋아하는 언니.

“언니는 비싼 전복만 좋아하네.”

“그게 젤 당기는데 어쩌나, 아껴 아껴서 먹고 있어.”

“뭘 아껴~ 아끼지 말고 드셔요. 또 사 보낼게.”


그랬다. 팔십 평생 어쩌다 한 번씩 먹어본, 기억조차 희미한 전복은 암 투병하는 언니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그래도 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오늘도 언니네 집 냉동실에는 먹기 좋게 칼집을 넣어 하나씩 떨어지도록 사이사이 비닐을 끼워둔 깨끗한 전복이 얌전히 놓여 있다.


입맛이 없는 언니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데 주말에만 시간이 가능하니 생각처럼 쉽지 않다. 이번에 가면 언니와 이야기도 나누고 곁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지, 다짐해도 결국은 주방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은 안타까움에 매번 속상하다. 헤어짐은 늘 목이 아픈 것, 건강한 모습이 아닌 병들고 힘없고 허약해진 언니와 부엌일에 여전히 어설픈 형부를 남겨 두고 떠나 온다는 것은 곧 다시 만난다 해도 슬프다. “언니 우리 금방 또 올게~.”라고 인사하기도 전에 이미 눈 주위가 붉어져 있는 언니. 가능한 한 명랑하게 헤어지려고 너스레를 떠는 우리의 모습도 너무 슬프다.


많은 사람이 암과 처절하게 싸울 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고 한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해도 하나님은 인간이 감당할 시련만을 주신다는데, 그 시련을 극복할 힘도 능히 주실 거라는 당연한 소망을 품는 게 인간이다. 

“언니 암에게 이렇게 말해, 내가 죽으면 너도 죽어, 라고” 어느 의사가 말했다는 동생 영심이의 말이 언니 귀에 들리기는 하는지. 머리는 끄덕여도 아무 표정이 없다. 요즘엔 암 환자가 많다 보니 의사들이 말하길, 암과 싸우려 하지 말라고, 달래면서 함께 살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단다. 스트레스 받지 않으면서 암과 타협하며 살라는 말은 건강한 사람들의 그저 위로의 말일 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있는 환자에게 과연 얼마나 위로가 될까.


81세 언니가 암 진단을 받기 전에는 조카들 결혼식에서 잠깐씩 만나 상식적인 근황을 묻고, 식사 하고 서로의 생활로 돌아가곤 했다. 건강할 때는 살다 보면 만나겠지 하며 절실함이 없었지만, 언니가 병들고 나니 자주 오 가지 않은 지난날이 후회된다. 결국 세 자매가 주름진 얼굴로 만난 만큼 정을 더 나누고 싶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왜 생겼는지 새삼 피부로 느낀다. 미래를 계획할 수 없는 언니이기에 과거 힘들었던 시집살이를 회상할 때마다 맞장구를 쳐준다. 그러나 내 희망은 언니가 고단했던 사건들은 잊고 좋았던 일들만 기억했으면 좋겠다.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아무것도 못하는 남편과 아들을 두고 어떻게 죽나.” 걱정하던 언니. 항암 부작용을 견디기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젠 죽는 거 두렵지 않아”라며 “이리 고통스럽게 조금 더 사느니 치료를 멈추고 먹을 것 먹고 운동하면서 지내다 가고 싶어” 

고통의 밑바닥을 경험한 고백을 들으면서 “그래 언니, 그것은 언니만이 결정할 수 있어.” 

하나둘 내려놓는 언니를 바라보며 아무리 가족이라도 누가 나서서 그 고통스러운 치료를 멈추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동안 각자 사느라 잊고 있었던 형제자매의 소중함을 알게 된 계기가 암이라는 존재로부터라니. 가족 한 사람의 고통은 구성원 모두의 고통이다.


첫 항암치료를 받고는 구역질로 먹지 못해 10일 동안 병원에 입원해야만 했다. 음식을 먹지 못하니 힘이 없고, 힘이 없으니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지럽고 비틀거려 치료받을 때마다 병원에서 영양주사로 견디더니 체중이 10킬로나 빠졌다. 암이란 것이 사람의 몸속에서 무슨 장난을 치며 발광을 하는 건지. 


다행히 네 번째 치료부터 울렁거림이 덜했고 음식도 먹고 체중도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이런 언니의 모습을 보면서 항암치료 하시는 분들에게 희망을 놓지 말라 말하고 싶다. 그렇게 고통스럽다던 언니는, 치료를 멈추고 싶다던 언니는 아무 말 없이 병원에 계속 가고 있다. 6월 8일 오늘 5차 항암 받으러 병원에 입원하는 날, 동생으로서 할 수 있는 건 언니가 지치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뿐.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병들고 서러울 때, 가슴이 추울 때 위로가 되는 누군가가 아니 가족이 곁에 있는 사람은 축복받은 삶이라 말하고 싶다. 이기적인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핵가족 문화, 아픔을 외면받지 않는 것만도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생각하니 서글퍼진다.


언니와 55년을 살면서 한 번도 부엌에 들어가 보지 않았다는 형부, 요즘 젊은이들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뿐더러 어떤 사람은 이혼 사유라고 방방 뛸 일이지만, 그렇게 언니는 자신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 삭이면서 전형적인 맏며느리로 지내왔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시대에 태어난 게 잘못이라면 할 말이 없다. 세상이 변하고 문화도 바뀌었다는 걸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었다 할지라도 시대에 맞게 변해야 된다는 지혜를 터득하고 행동하는데,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형부는 주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멍 하니 서 있기 일쑤라고, 아픈 언니가 짜증난 모습으로 한숨을 쉰다. 그렇지만 언니의 잔소리와 함께 조금씩 적셔 가는 형부의 주방일, 이제 곧 주방은 형부가 완전 접수하실 것 같은 예감이 든다. ^^ 


요즘 복지관마다 나이 든 남자들을 위한 요리 강습이 유행이다. 살다 보면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기에 남자들도 다양한 경험과 홀로서기를 위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사실 배우자가 병들면 곁에 있는 사람이 젤 힘든 건 당연한 일이다. 때로는 힘들고 짜증도 나겠지만 간호하는 사람의 말 한마디와 행동에 극도로 예민해지는 암 투병 환자들을 많이 보아온 나로서는 형부에게 당부하고 부탁하는 말이 있다. 

“언니가 예민해져 있으니 힘드시더라도 형부가 받아 주세요.”

“알고는 있는데, 내가 살아온 습관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성질 낼 때가 있어.”

“오랜 시간 받기만 했으니 이젠 형부가 섬겨 주세요.”

“그래 알았어, 조심할게.”

“언니 잘못도 있어요. 진작 주방 일에 형부를 동참시켰어야 했는데.”


언니가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다 못해 눈물을 흘린다는 형부. 본인도 살고 싶어 그 힘들다는 항암치료를 시작했을 텐데, 먹을 수 없는 고통은 얼마나 크며 평생 주방일을 모르던 형부는 또 얼마나 기막힐지.

“이거 맛 좀 봐 봐, 언니 입맛에 맞아야지.” 

낙지볶음을 언니 입에 넣어주며

“간 맞아? 맛있어?”

“냠냠 쩝쩝, 뭔가 2% 부족한데?”

“그래? 뭘 더 넣을까, 설탕을 조금 더 넣어 볼까?”


다른 사람들은 간이 맞다는데 입맛이 멀리 달아난 언니는 별로인가 보다. 낙지는 약간 달짝지근해야 맛있긴 하다. 언니 몸 생각해 설탕을 적게 넣었더니 ‘딱’ 이라는 신호를 주지 않는다.

“흐흐 아파도 입맛은 살아 있네.” 좋은 현상이야.


어쩌다 생각이 날 때면 전화로 안부를 전했던 나는 요즘엔 매일 언니 안부를 묻게 되고 3~4주마다 방문을 한다. 동생 영심이는 서울에서 4시간 거리의 강원도 삼척을 매주 가다시피하며 암이라는 벼락을 끌어안은 울적한 회색 공간에 쓱 들어가 웃음보따리를 펼쳐 놓곤 한다. 직장에 다니면서 결코 쉽지 않은 일이건만 그 섬김에 감동이다. 언니와 형부가 힘을 얻고 감사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 같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봉사할 때 병원 담당 목사님은 우리 봉사자들에게 병동 방문할 때는 화장을 곱게 하고 환우들을 만나라고 당부하셨다. 이유는 환우들에게 살아야겠다는 의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다. 그래서 영심이와 나는 언니네 주방에 들어가면 웃고 또 웃는다. 결코 소리 내어 웃지 않아도 될 내용이건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만들어 웃어젖힌다. 거실에 있던 언니의 궁금증과 부러움이 드디어 발동했는지,

“야들아, 너네 뭐가 그리 좋아서 웃나?”

“언니랑 같이 좀 웃어!” 소리치는 형부 목소리에,

“호호, 우리 성공한 거지?” 

큭 크크 킥킥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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