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태산 산책길을 걷는다.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바작바작 정겹다.
숨을 몰아쉬어야 갈 수 있는 등산로가 5등산로까지 있지만 눈으로 확인하고는 포기했다. 산책로를 선택하고 걷다 보면 1등산로 이정표가 보이고 한참을 걸어가면 2등산로 이정표가 있다. 그렇게 5등산로까지를 확인하면서 은근히 나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기도 하다.
우리 부부가 청태산 휴양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두 가지.
산책로는 경사가 웬만하고 부담이 없어 마음도 몸도 가벼워 좋다. 다음에 청태산 가면 등산로를 쳐다만 보지 말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도전을 해볼까 보다 ㅎ 걷노라면 고라니도 만나고 계절마다 분주한 아름드리 나무들의 휘파람 소리도 만난다. 꼿꼿한 절개의 의미를 담고 있는 소나무를 만나 ‘찰깍찰깍’ 사진도 찍어주고, 그렇게 그렇게 걸으니 2시간은 족히 걸린다. 자연 속에서는 아무리 걸어도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솟는다.
또 하나는 가을에 가면 낙엽이 발목을 덮을 정도로 소복히 쌓여 있어 겨울에도 멋과 낭만을 선물한다. 바짝 마른 낙엽은 발걸음과 만나는 순간 한편의 시를 만들기에 충분하다. 고요한 산자락에 떨어진 낙엽뿐 아니라 발가벗은 나무에서 그대로 말라버린 낙엽 모습은 그 운치가 대단히 아름다웠다. 봄에는 또 어떤 모습일지 상상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온다. 바람이 되어 청태산을 수놓을 꽃의 향연과 색깔의 향연이 만들어내는 기적을 만나고 싶다.
가끔 등산로 표기에 유혹을 받지만 ‘아니다 아서라’ 내 나이를 생각해 안전한 코스로 가야지. 이렇게 체력에 맞게 즐기면서 운동할 수 있는 곳이 청태산이다. 청랭한 공기와 아름다운 산새들의 낙원.
청태산은 강원도 횡성과 평창에 걸쳐 있으며 서울에서도 그리 멀지 않아 더욱 좋다. 해발 1200m의 청태산 이름의 유래는,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조부의 묘를 가기 위해 관동지방(강릉)을 지나게 되었다. 잠시 휴식을 하고 싶은데 마땅히 쉴 곳이 없어 넓은 바위에 앉았다. 한숨 돌리며 이리저리 바위 주변을 둘러보니 푸른 이끼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곳 수령의 점심 대접을 받은 이성계는 '푸를 청, 이끼 태'라는 휘호를 써서 수령에게 하사했고 그 이후부터 그곳을 청태산이라 불렀단다. 그런데 일제 때 일본인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끼 태’를 푸르고 큰 산이라는 ‘큰 태’로 고쳐 지금까지 쓰여 왔단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프랑스 시인이자 평론가 제미 드 구르몽의 '낙엽'을 흥얼거리며 청태산 나무들의 특성을 살펴보는 재미도 크다. 계절마다 얼굴이 바뀌는 모습은 그곳에 갈 때마다 관찰해 보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화사했던 나뭇잎들이 갈색으로 변하다 못해 그대로 오그라든 모습은 바람 불고 눈이 내려도 끝까지 버티겠다는 결심을 하는 듯하다. 그러다 봄이 오고 새로운 싹이 돋아나면 그 결심도 무너지겠지만.
우리집에서 한강 나가는 길목에도 가을이 되면 빨갛게 변하는 우아한 단풍나무 한 그루가 있다. 한강을 오갈 때마다 올려다보며 사진도 여러 장 찍어주었다. 근데 그 단풍잎이 겨울이 와도 오그라들기만 할뿐 잎이 떨어지지 않다가 봄 새싹이 돋고 어느 정도 자라야 슬그머니 떨어져 자리를 내어준다. 강변의 모진 바람을 맞으면서 무엇을 못 잊어 싹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걸까.
"저 단풍나무 잎은 이상하다. 잎이 말랐는데도 안 떨어져."
"새로운 싹이 나와야 떨어진다니까."
강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을 견뎌 내야만하는 여린 싹이 마음에 걸려서일까? 괜스레 이상하다고 말한 거 미안하다. 얕은 생각과 입놀림이 부끄러웠다.
나무들은 한 해가 지날 때마다 나이테가 만들어져 더 단단하고 더 건강하게 쭉쭉 자라는데 인간은 왜 나이가 들수록 마음도 생각도 작아지는 걸까.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청태산 산책길에 쌓여 있는 나뭇잎을 생각한다.
겨울에는 눈 속에 묻혀서 추억을 만들라고,
바 작 바 작 바작바작
가을에는 따스한 마음 만들라고 바작바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