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일째, 카미긴-필리핀-아시아 떠나기
대(大) 이동은 여러 모로 할 짓이 못 된다. 어디서부터가 큰 움직임이냐 물으면 정확한 정의는 없지만, 대륙간 이동, 다른 언어권으로의 이동, 몇 개의 시간대(time zone)를 건너는 이동, 몇 번을 환승해야 하는 이동, 하고 나면 온 진력이 다 빠져서 며칠은 회복이 필요한 이동들이 다 대이동이지 싶다. 그리고 대이동은 내게 여러 종류의 불쾌함을 주는 경험이다. 유랑 여정을 적으면서 사실 가장 많이 쓰고 싶은 주제이기도 한데, 한편으론 그래선 안될 것만 같기도 하다. 그렇게 싫은데도 결국 떠나기로 선택한 건 제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푸념하면서도 결국은 대이동을 하고 마는 사람의 후기란 대체로 재수가 없기 마련이다. 대이동이 얼마나 괴로웠나를 적는 시점에서 이미 그걸 다 겪어내고 성장해 낸 '나'는 모종의 영웅담의 주인공이 된다. 그 주인공 시점이 되는 것이 나는 점점 더 자주 불편하다.
대차게 바다로, 멀리, 깊이, 야생으로 나아가자고 꿈꾸는 사람치고 대이동을 어려워한다니, 재수 없는 걸 넘어 말이 좀 안 되는가 싶기도 하다. 바다를 만난다는 건 늘 어떤 경계를 넘어야 하는 일이었다. 편안한 곳, 안전한 곳, 익숙한 곳을 벗어나는 일. 가끔씩 익숙해졌다고 자만하다가 된통 혼나기도 하고, 갖고 있는 줄 알지 못했던 힘이 솟아나 위험을 극복하게 되기도 하는 곳. 바다를 향한 내 불순한 사랑에는 늘 높은 농도로 모험을 향한 열망과 광기가 섞여 있었다. 바깥으로 나가는 일은 늘 두렵고 막막하지만 그래서 짜릿하기도 하다. 모험의 필요는 삶의 기본 욕구 중 하나라고 믿는다. 적어도 내 삶에서는 그래왔다.
그러나 모험을 긍정한다고 모험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행동들을 필연적으로 모두 긍정하는 건 아니다. 대이동이 주는 불편함 중 가장 선명하게 식별해 낼 수 있는 감정은 '플라이트 셰임(flight shame)', 즉 항공편으로 이동하는 데서 느끼는 수치심이다. 항공편은 모든 이동 수단 중 단연 가장 많은 탄소 배출을 일으킨다. 그리고 지구의 대기는 인류가 만든 탄소와 각종 온실 가스로 이미 포화상태다. 아무리 바다 가까이 살아가는 삶, 소비를 줄이고 화폐 경제에 덜 의존하는 삶이 친환경적이라 해도 그 과정에서 과도한 항공 이동이 동반한다면 결국 그토록 사랑하는 바다의 수많은 생물들을 멸종시키고 마는 기후 위기에 기여하는 일이다. 바닷속의 생태계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서로 상호작용을 주고받는 연결 고리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또, 당장 어떤 수단을 취해서라도 인간 전체가 지구 환경에 미치고 있는 영향을 획기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모두가 더 큰 위험에 빠질 거란 점도 분명하다. 지난 1년을 돌이켜보면, 내가 주로 생활해 온 열대 바다에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여행자들이 날아온다. 이들은 모두 비윤리적이고 바다 생태계를 망치는 행위자들인 걸까? 나 또한 그 파괴적인 구조의 일부분인 것일까? 이 모든 바다 만나기는 그 과정에서 택할 수밖에 없는 파괴성으로 인해서 그 가치를 잃는가?
최근 듣고 있는 팟캐스트 시리즈 <엔드 오브 투어리즘>의 한 에피소드에서 영감을 얻는다. 에피소드는 아누 박사의 책 <Beyond Guilt Trips: Mindful Travel in an Unequal World> 소개와 함께 글로벌 불평등 구조 하에서 초국가적 여행에 따르는 특권의 인식과 그에 따르는 죄책감, 수치심 등을 이야기한다.
"It helps put me in conversation with many, many other kinds of travelers whose [00:34:00] experience might look quite different than mine. Again, I don't know how to fix everything. I don't know how to fix everything. I don't know how to sometimes even hold all the complexities that I'm raising, but I know that for me, a more engaged and plugged in life is about raising these questions without guilt and shame, or even the pressure to have to know what to do with them."
(셀프 번역: 그것(나의 여행 이야기가 수많은 이야기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은 나의 경험과 다른 경험을 가지는 수많은 다른 여행자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 줍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나는 어떻게 모든 걸 다 바로잡을지 알지 못해요. 때로는 제가 제기하는 여러 복잡성들을 다 헤아릴 방법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압니다. 보다 참여적이고, 연결된 삶이란 죄책감이나 수치심 없이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삶이라는 것을요. 심지어 그 질문들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아야만 한다는 압박이 없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삶이라는 거지요.)
비슷한 여행자, 유랑자 집단과 대화 나눌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최소한 이렇게 수기를 남겨서라도 누군가와의 대화, 나 자신과의 대화를 이어가고자 한다. 멈출 수 없다면, 이 인식을 가지고 어떤 방식의 이동을 이어갈 것인가? 누구와 함께하며, 어디로부터 어디로, 얼마나, 어떤 속도로... 또, 이 글을 읽으며 비슷한 고민을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야기를 듣고도 싶다. 플라이트 셰임을 느끼면서도, 굳이 선택해 비행해야 한 때가 있었다면 언제였는지? 그 여행은 당신에게 어떤 이야기였는지? 항공을 통하지 않은 국제 여행이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이었는지? (알고 지내던 지인 중에는 한국에서부터 인도네시아까지 육로와 해로로만 여행한 이들이 있다. 비행기 한 번 타면 수 시간 걸리는 거리를 이들은 기꺼이 몇 주 혹은 몇 달에 걸쳐 천천히 이동했다. 기후 위기에 책임 의식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직접 행동하던 친구들이었다.)
나의 경우, 배를 통한 여행 방식에 좀 더 익숙해지기 위한 노력도 하나의 대안 찾기였다. 폴리네시아에 구태여 몇 번의 환승 항공편으로 이동하여 (저가 항공권을 이용했기 때문에 더욱 탄소 배출은 늘어나는...) 두 달을 머문 것도, 항해를 배우며 배에서 생활할 수 있다는 약속 덕분이기도 했다. 항해 인구가 정말 많은 폴리네시아에서 배를 타고 사람들을 만나며 서서히 항해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를 알아가게 됐고, 각자 또 다양한 이야기를 가지고 전 세계를 항해로만 이동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물론 이것은 또 어떤 정답이나 해결책이라고만 볼 수 없다. 항해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항해 전후의 이동을 위해서는 또 항공편을 이용해야하기 때문이다.
다만, 항해라는 이동 방식에 스며들면서 얻을 수 있는 소득이라면, (바람을 주 동력원으로 하는) 범선 항해가 파도, 바람, 조류와 같은 자연 현상과 극도로 가까운 관계를 담지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범선 항해는 자주 기다림이 이어진다. 좋은 바람이 오기를 기다리거나,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바로 눈앞에 보이는 거리까지도 비행기나 자동차, 기차 등보다 훨씬 더 천천히 다가가게 된다. 범선 항해를 하는 사람들은 쉽게 자연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음을 몸으로 체감하는 이들이다. 이를테면, 태평양을 건너려면 조류의 이동 방향 때문에 동쪽(중남미)에서 서쪽으로만 갈 수 있는 식이다. 그와 같은 여정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는 항해자라면, 아마 스무 시간의 항공편으로 같은 거리를 여행한 사람과는 다른 일상을 엮어갈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긴 '시간'을 들여 여행할 수 있는 것도 당장 어떤 종류의 계층만 누릴 수 있는 특권 중 하나가 아닌가? 직간접적으로 만난 다양한 방식의 여행자 중에는 딱히 소득원이 없음에도 저비용 장기 여행을 해내는 이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여행 중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국적과 비자, 또는 언어나 신체를 가진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역사적으로 보면, 많은 '장거리 항해'가 허락받지 않은 식민주의적 영토 침략과 거주민 착취로 이어지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모험심에 고취되어, 무기를 들고 미지의 수평선을 향해 나아갔고, '타자'들을 비인간화/대상화하는 계보 아래 수많은 생명을 살상했다. 폴리네시아를 포함한 태평양의 많은 섬들도 여전히 그 긴 그림자 아래 놓여있다. 젠장... 하나하나 세세하게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정말 다양한 복잡성들이 함께 작용한다. 이러한 복잡성 앞에서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움직일 수 없이 꽉 막힌 듯한 갑갑함, 그로 인해 침잠하는 무력감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어쩌면, 감각과 인지를 둔감화시키고 그저 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 편이 가장 속 편하고 몸 편한 길일 테다. 현실이 너무 복잡하고 비관적이어서, 실제로 몸과 마음이 괴로움을 겪는 현상의 일례로 사람들은 '기후-애도', '기후-우울'이란 개념을 말하기 시작했다.
(세계 보건 기구의 정책브리핑에 따르면 기후우울은 1. 기후위기가 촉발하는 정서적 고통, 자연재해 트라우마 등의 스트레스 반응 2. 면역체계 약화와 오염된 물과 공기로 인한 질환 등 신체화 증상 3. 급변하는 날씨에 따른 우울감, 기후변화를 막을 수 없다는 무력감, 이전 세대에 대한 반감 등 우울하고 불안한 심리 4. 재해로 인한 이주 및 생계 수단 상실 등 관계 결속력 약화와 같은 정신건강에 위험 징후가 나타나는 모든 상황을 초래) (출처 : https://www.google.com/amp/s/m.ohmynews.com/NWS_Web/Mobile/amp.aspx%3fCNTN_CD=A0003048294)
이 많은 가능성의 통로들을 다 접고, 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나는 유색인종/아시아 출신 여성의 몸으로 느끼는 '모험'의 필요와 파괴되고 있는 지구 생태계에 지는 책임 사이의 교차점에 좀 더 머무르고 싶다. 여유가 좀 있다면 거기에 유년 시절의 반복된 강제 이주/유랑 경험을 성인이 되어서야 치유하기 시작한 자의 정체성도 살포시 얹어본다. 음... 좀 더 욕심내 본다면 바다라는 생태적 공간과 물리적으로 깊이 엮이어 살아가게 된 지 오 년 차가 된 몸의 서사도 더하고... 마지막으로 동료 인간들을 야생으로, 특히 바닷속 깊은 곳으로 데려가는 역할을 수행할 때 가장 만족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의 관점까지... 이 모든 이야기들이 칵테일처럼 섞여 들어가는 것이 나의 이야기일까? 혹은 씨실과 날실을 올올히 엮어 융단을 짜듯 이 재료들이 얽히고설키어 내 여정 서사의 문양이 만들어지는 걸까?
지금까지 적어내려 온 여행기를 통해 그 문양들이 스스로 드러나고 있었다고 믿고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제야 다시, 더 깊이, 제대로 마주하고 들여다볼 힘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하다. 막 지나온 여정과 지금 현재 사이의 대화를 통해, 여정 이전의 (한편으론 계속 여정 중이었던) 나와 내가 가졌던 질문들이 서서히 변해가는 과정을 밀접하게, 다정하게 지켜보면서... 그 대화 과정 자체가 나의 여행이고 여행기다. 단일하고 균질한 서사가 아니다. 카타르시스적 영웅 서사도, 위대한 정복 서사도 아니다.
카미긴을 떠나고 필리핀을 떠나고 아시아를 떠나는 과정에서, 내 안의 그 다양한 줄거리들이 서로 엎치락뒤치락 싸우거나 뒤엉키고, 관심의 수면 위로 올랐다가 사라지곤 하면서 내 감정과 몸 상태를 뒤흔들어놓았다. 내 안의 각각의 부분들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이런 모양이었으려나.
- 여성 모험가 자아 : "가자! 떠나자! 미지로! 더 무모한 선택으로! 안전한 곳 바깥으로! 넓디넓은 바다로! (원더 우먼 같은 자세를 취하며)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다! "
- 기후 위기를 의식하는 자아 : "이렇게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은 사치 아닐까? 나도 결국 자기 이익을 위해서 파괴적인 수단에 타협하고 마는 건 아닐까? 바다를 사랑하며 친환경적으로 살아가고 싶다면서 이렇게 많은 탄소를 배출에 일조해도 되는 걸까?"
- 잦은 이주를 감내해야 했던 내면아이 : "아무 연고도 없이 스스로 이동해 온 나를 받아주고, 몇 달이나마 함께 거주한 커뮤니티(카미긴 섬과 필리핀)를 떠나다니, (그것도 나의 여정을 계속하겠다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차오르는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도통 모르겠어. 정성 들여 인사하고 싶은데, 커다란 감정에 압도될까 봐 두려워서 아예 차단하고 싶어지기도 해. 서로의 안녕을 바라며 잘 떠나고, 안전하게 이별하는 방법을 배워가고 싶어."
- 바다동반자 자아 : "더 다양한 바다를 만나고 싶어! 더 바다 가까이 살고 싶어! 바다와 가까이 살아가는 더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 바다에 내 몸을 더 내맡기고 싶어!"
'다수의 불쾌감'이라 제목을 우선 짓고 며칠에 걸쳐 이 글을 써내려 오면서 변화하는 나의 시선을 발견한다. 불쾌함이 어느 정도 들어있던 것도 맞지만, 뭉쳐있던 여러 감정의 실타래를 하나하나 골라내다 보니 그 안에 나만의 진실이, 보석이, 깨달음의 실마리가 깃들어 있었다. 그동안 내 안의 다양성들을 받아들이고 보듬기보다는 미워하기 바빴던 것 같다.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자면, 헤아려주자면 복잡하니까. 삶에 대한 재단이 명확하게 떨어질 때가 더 가볍고 편하니까. 이동할 때도 수월하고, 또 사람들과 대화할 때 이해시키고 이해받기도 쉬우니까. 여행기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주위에 흔히 보이고 들리는 '여행기'의 형식에 맞추어,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호감을 받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이게 맞나?' 싶은 회의감이나 자기 의심에 맞닥뜨릴 때면 한동안 글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부끄럽고, 도망치고 싶고, 애도하고 싶고, 어떤 부분들은 숨기고도 싶었다. 나의 복잡성, 다중성에게 정중히 사과합니다. 그곳은 나의 집이고, 떠남을 통해 돌아갈 수 있는 출발점이자 도착점일지도 모르겠어요. 여전히 자주 단순함으로 탈출하고 싶을 테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