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알게 된 이름들

277일째, 캄보디아의 숲과 바다에서 이어지는

by 파나오

더 오래 바라볼 것

공기통을 메고 잠수하는 스쿠버다이빙과 무호흡으로 잠수하는 프리다이빙. 바다를 만나는 두 가지 통로다. 그중 나는 두 번째 방법으로 처음 바다와 사랑에 빠졌다. 스포츠나 교육 프로그램으로서가 아니라, 집 앞에 있는 물가에 매일 풍덩풍덩 뛰어들면서. 집 앞이라 더 배짱이 탄탄했다. 장비도 없이 뛰어들기도 하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파도가 치나 몸을 던졌다. (크리스마스에도 맨몸 수영을 했다. 뇌가 시리도록 찬물에 온몸이 시뻘게지는 그 맛은 마치 불닭볶음면처럼 자극적이다.) 아직 이퀄라이징이 뭔지도 모른 채, 먹먹해지는 귀를 잡고 바닷속 세계에 일 미터, 이미터, 조금씩 깊고 길게 내려가게 한 건 순전히 경외감이었다. 바다생물들의 찬연한 얼굴과 움직임, 빛깔들을 향한 경외심. 하지만 그마저도 한 번에 폐가 담을 수 있는 숨만큼만 물아래서 머물 수 있는 한계가 있었다.


처음 스쿠버다이빙 체험을 하게 된 날을 잊지 못한다. 제주에서 본격적으로 프리다이빙을 배운 지 이 년 만이었다. 지역에서 오래 시민과학자로 활동해 온 다이버들과 어류 식별(fish ID)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매년 열리는 생태 관광 축제의 일환이었다. 나를 인도해 주신 강사님은 물속에서 글자를 적을 수 있는 흰 슬레이트보드를 가지고 잠수하셨다. (물속에서는 말을 할 수 없고 글자로만 알려줄 수 있기에) 나는 그날 수십 수백 어류 종의 이름을 알게 됐다. 그동안 수년을 물속에서 만나왔지만 통성명한 적도 없던 존재들과 이름 부르는 사이가 된 것이다. 그날 강사님은 나를 물속에서 끌어내야 했다. 그러면서 마음먹었다. 언젠가 프리다이빙 과정을 다 마치고 나면, 스쿠버다이빙도 도전하리라. (예산 부족 문제가 아니었다면 곧바로 신청했을 것이다.) 그렇게 2년이 더 흘러 스쿠버 입문 과정을 수료한 것이다. 프리다이빙 강사로 활동하던 까미긴 섬에서였다.


캄보디아의 생태 다이빙 인턴십에 참여하게 된 밑마음도 거기서부터 자라났다. 바다가 주는 경외심이 내 삶의 양분이 되어주는 만큼, 바다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다.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해양정화활동이나 과잉개발 반대행동 말고도, 바다 생태에 대한 지식을 익히는 것 또한 하나의 방법이리라 생각했다.

그런 마음으로 캄보디아의 바다에 뛰어들었으니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마침내 알게 된 이름들. 몸으로 만나고 눈으로 본 적은 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던 현상들. 육지생물들과 그 특징이 너무나 달라 배우면 배울수록 놀라움의 연속이던 해양생태학. 비록 강사이던 A와 J가 프로그램을 조기 종결하면서 그걸 소통하고 마무리한 방식에는 너무나 실망했지만, 그렇다고 거기서 배운 소중한 이름들마저 놓아버리고 싶지 않다. 그들은 운영자로서는 미숙했지만 바다 생명들을 향한 열정만큼은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다. 바다에서 보낸 시간만큼, 거기서 느낀 환한 경외심만큼 그 환경을 설명하는 지식을 익히고 활용해 기록하고, 가르치는 일을 해온 이들. 나보다 훨씬 오랜 기간 동안. 그러니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바다스승님들이다.


산호

가장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형태학이었다. 산호 종마다 그 몸집이 자라나는 패턴이 모두 다르다. 손가락 또는 나뭇가지처럼 삐죽빼죽 뻗어나가는 branching(acropora가 대표적이다) , 곡선의 주름을 따라 자라나는 foliose(상추 산호), 또 정주하지 않고 스스로 뒤집기가 가능한 버섯 산호까지! 게다가 여러 폴립이 공생적 네트워크를 만드는 다른 산호종들과 달리 버섯 산호는 그 자체로 하나의 폴립이다.

프렌치 브리오쉬빵처럼 오돌토돌하게 생긴 파바이트(favite)는 돌과 같은 물체의 표면을 덮으며 자라나는 encrusting, 미로 같은 문양을 가진 brain coral은 전체 모양이 같은 속도로 커지는 submassive 또는 massive 형태를 지닌다.

캄보디아의 산호초는 전반적으로 수심이 얕은 곳에서 나타나(우리가 주로 공부한 대부분의 산호들이 6미터 이내에 있었다), 간단히 스노클 장비만 가지고도 잠수시간의 부담 없이 오래 접근할 수 있었다. 필리핀의 깊은 곳까지 뻗어나가는 산호초 장벽(wall)과는 또 다른 풍요가 있었다. 어딘가에서 읽기를, 메콩 강이 가져다주는 어마어마한 영양분으로 인해 캄보디아 인근 해역은 단위면적당 가장 높은 생물밀도를 기록한다고 했다. 그만큼 크기가 엄청나게 큰 어류나 산호 개체가 많았다. 어떤 날은 태어나 본 중에 가장 큰 복어(puffer fish)가 산호초 아래에 숨어있는 걸 봤는데, 길이가 일 미터는 넘어 보였다.


어류

적어도 내가 중점적으로 배운 열대 연안의 어류종은 크게 채식을 하는 종과 육식/잡식을 하는 종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같은 종이어도 그 아래에 채식과 비채식이 또 섞여있기도 하다. 산호초 생태계 안에서 조화롭게 공생하기 위해 서로의 먹이가 경쟁하지 않는 쪽으로 적응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단연 가장 신비로운 현상은 상황과 환경에 따라 성별을 바꾸는 종들! 또 대부분의 어종이 어린 개체일 때와 다 자랐을 때 모습이 극적으로 변화한다. 어린 개체를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해석이 있는데, 정말 '이 둘이 같은 종이라고?'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다르게 생겼다.

이번에도 역시 나는 한국어보다 영어 이름들을 익히게 되었다. 산호초 주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종들 중에서 그루퍼, 패럿피쉬, 래스, 스내퍼, 댐젤피쉬, 엔젤피쉬, 아네모네피쉬, 트리거피쉬, 바라쿠다, 잭피쉬(트레발리), 퓨실리에, 트럼프피쉬, 라이언피시, 프로그피쉬, 모레이 일, 박스피쉬, 뱃피쉬 등의 부류들은 이제 비교적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매번 잠수마다 자신 있게 알아보는 종들보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얼굴들이 훨씬 많다. 산호초에 사는 것으로 현재까지 기록되고 분류된 어종은 3천 여종에 달한다니, 내가 지금부터 죽기 전까지 배워나간다 해도 모든 이름들을 다 헤아리긴 어렵겠지..

어떤 날은 A와 얕은 씨그라스(바다 잔디) 지역을 탐사하다 처음으로 밴디드파이프피쉬를 만났다. 해마와 비슷하지만 몸이 길쭉하게 뻗어있다. 그런가 하면 망그로브 숲 안에는 사수라는 이름을 가진 아처피쉬도 산다. 아처피쉬는 입속에서 강력한 물줄기를 뿜어 물밖의 곤충을 사냥한다.



망그로브숲은 산호초구역, 해초구역과 함께 서로 다른 생태 환경을 다채롭게 연결해 주는 중요한 군집 생태 지역(biome). 내가 오랜 시간을 보낸 우리나라에선 비슷한 생태환경을 꼽자면 갯벌이라고 볼 수 있으려나? 망그로브숲은 염분을 지닌 바닷물과 육지에서 흘러나오는 담수가 자유로이 들고나는 조간대에 위치한다. 바다를 사랑한 나무들. 나무를 사랑한 물고기들. 그 사이 면밀히 얽힌 새들과 게, 조개, 플랑크톤과 해조류들. 하나하나 독립적으로 떼어놓고 생존할 수 없다.

이건 생태학적 지식과 함께 느낄 수 있는 감정적 진실이다. 수많은 과학적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감정적으로는 중립 또는 무감할 수 있을까? 마치 과학자는 그 또한 생태계에서 얽히고설킨 동물종이 아닌 것처럼. 그렇기에 나는 내 강사들의 비윤리성 앞에서 더 크게 아팠다. 당신들의 순수한 열정, 바다를 향한 사랑으로 돌아오길. 당신들의 모든 행동이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연구 영역이길 떠나서 영적인 기도의 영역이기를. 이건 어쩌면 '인간의 도덕'에 대한 염원이 아니라, 생태계에 속한 하나의 종으로서의 소원이다. 환경을 보호하고 보전하는 데 열정적인 사람이라면, 동료 인간동물을 해치지 않는 데도 그만큼 진심이길, 부디.


여담

캄보디아에서 다 마치지 못한 레스큐 다이버 과정을 필리핀에서 친구의 도움으로 끝마쳤다. 친구는 작년 말에 만난 스쿠버 다이빙 강사다. 내가 당한 사정을 듣더니 안타까워하며 기꺼이 나머지 교육 수료과정을 도와주었다.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나쁜 일도 겪어야 하고, 빛을 누리기 위해 어둠을 지나야 한다는 걸 이번 일로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다. 크고 작은 응원으로, 위로로, 지지로 도와준 모든 이들께 감사를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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