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해야겠다
내가 울산 집에 도착하고 난 후 조금 있다가 남편이 대구 집으로 돌아갔다. 남편은 어제에 왔었다. 나는 가끔 와서 지내기로 했다. 집이 비어있어서 관리를 해야 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쉬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어서다.
이번에 남편이 울산 집에 온 이유 중 한 가지는 김장을 하기 위해 심어 놓은 배추를 갉아먹는 벌레를 잡는 것이다. 벌레를 잡으면 죽여야 하지 않겠나? 나는 벌레를 죽이지 못한다. 잡아서 어디 던진다고 해도 그게 다 집안이다. 그래서 벌레를 아예 잡지 않는다.
남편은 글을 쓰려면 벌레를 잡고 죽여도 봐야 한다고 한다. 내가 벌레가 예쁘다고 한 말은 다 거짓말이라고 한다. 하긴, 벌레가 예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벌레가 예쁘지만, 전엔 끔찍이도 싫어하고 징그러워했다.
결혼하고 한참이 지난 때였다. 국을 끓이려고 단배추의 뿌리를 잘라내고 있었다. 배춧잎 속에서 녹색 애벌레가 구물구물 기어 나왔다. 배추흰나비 애벌레였다. 나는 놀라 악, 소리를 지르면서 배추를 휙 던져버렸다. 배추는 멀리 날아가 벽에 부딪혀 떨어졌다.
집에 아무도 없었다. 배추벌레를 집어서 버려야 했다. 얼마나 살이 떨리고 소름이 돋고 오글거리던지! 배추를 던져버린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배춧국을 끓이긴 했지만, 한 입도 먹을 수가 없었다. 벌렁거리던 가슴이 가라앉지 않아서다. 왜 내가 벌레를 싫어하고 공포스럽게 생각했을까? 어릴 때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도 벌레와 관련된 좋지 않은 기억이 없는데.
어느 날 벌레가 예뻐 보였다. 쳐다보기도 싫어하던 내 눈에 벌레가 예뻐 보이다니! 참 놀라웠다. 어떻게 해서 벌레가 내 눈에 예뻐 보이는지 생각을 해보았다. 점진적 노출은 인지행동 치료 기법 중 불안장애나 공포증을 치료하는 방법 중의 하나다. 숲해설가로 활동하다가 내가 벌레에게 이 기법인 점진적 노출이 된 것 같았다. 숲해설가란 직업이 나를 치료해 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벌레가 예뻐 보이기까지 하겠는가. 벌레가 예뻐보이는 이유는 벌레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이런 말이 나온다. 모든 사람은 인간이 되기를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이다. 내가 자연이 던진 돌이라면 벌레도 자연이 던진 돌일 것이다. 벌레도 어쩌다 태어난 생명이고 나도 어쩌다 태어난 생명이라 생각하니, 벌레도 나와 그리 다른 존재 같지 않았다. 벌레도 자신의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고 꿈틀대는 것일 테니.
숲해설가로 활동하다 보면 벌레를 보여주기도 하고 만져야 할 때가 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태연한 척 만지고 보여줬다. 장수풍뎅이를 처음 만진 것은 십여 년 전이다. 봉무공원에 근무할 때였다. 동구평생학습축제 기간 부스에서는 생태공예 작품 만들기와 장수풍뎅이 체험을 진행했다.
내게 애벌레를 집어 들고 소리를 치라고 한 사람은 없었다. 나는 체험을 시키는 사람이 만지지 않고 말만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징그러운 마음을 억누르며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간질간질했다. 참을만했다. 장수풍뎅이 굼벵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장수풍뎅이 애벌레 만져 보세요." 소리쳤다. 이 소리를 듣고 아이들이 달려왔다. 아이들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손바닥에 올려놓은 애벌레를 이리저리 쳐다보고 만져도 보았다. "뭘 먹어요?" "언제 번데기가 되나요?" 아이들은 질문을 해댔다.
장수풍뎅이 애벌레는 엄지손가락만 한 게 통통하다. 통통한 애벌레가 고물거리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징그럽게 보이지만, 누군가에겐 귀엽게 보인다. 몇 번 애벌레를 손에 올리고 나니, 나도 신이 났다. 징그럽다는 생각은 멀리 날아가버렸다.
아이들과 온 엄마들은 세 부류가 있었다. 한 부류의 엄마는 "어머, 신기하다."라며. 아이랑 같이 애벌레를 보고 만지고 즐겼다. 한 부류의 엄마들은 아이에게 애벌레를 만져보라 하고 자신은 멀리 떨어져 기다렸다. 몹시 징그러운 표정을 짓고 말이다. 벌레를 만지는 것이 기분 내키는 일은 아니지만, 아이의 교육적인 차원에서 배려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 부류의 엄마들은 놀라" 어어어.."소리쳤다. 아이는 만지겠다고 내가 있는 곳으로 팔을 뻗었다. 엄마는 "안돼, 안돼.' 소리치면서 아이의 팔을 끌고 가버렸다.
사람도 눈이 예쁜 사람, 머리카락 색깔이 아름다운 사람, 코가 멋진 사람,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 있듯이, 벌레도 각기 다른 예쁜 구석이 있다. 눈은 예쁜데, 코가 좀 예쁘지 않은 사람을 볼 때 코를 먼저 보면 눈이 예쁜 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벌레를 볼 때 예쁜 곳을 먼저 본다. 가령 털이 긴 애벌레는 털을 먼저 본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위로 치켜 올라가 있는 털이 흔들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억새가 바람에 날리는 것 못지않다. 우린 가을이면 일부러 억새를 보러 가지 않나.
빨간 줄무늬가 예쁜 벌레는 빨간 줄무늬를 먼저 본다. 자연이 만든 이 빨간 줄무늬가 세련되고 멋있어 감탄이 절로 나온다. 벌레가 발을 곰지락대며 기어가는 것을 보면 아기 같아서 미소를 지을 때도 있다. 나뭇잎에 매달려 있어야 할 애벌레가 땅바닥을 기어갈 때는 '요리도 작은 게! 험한 세상에서' 싶어서 가슴이 뭉클거릴 때도 있다.
남편은 배추를 수확하기 위해 벌레를 잡고 나는 안 잡는다. 내가 벌레를 안 잡는다고 더 선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남편에게 벌레 잡는 것을 떠맡기는 것일 뿐. 약을 쳐서 죽이나 잡아서 죽이나 죽이는 것은 마찬가진데. 나는 그걸 못한다. 내가 벌레를 잡지 못하는 것은 내 심지가 약한 탓이다. 내가 벌레를 잡아 죽일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어쩌면 내키지 않는 일이겠다. 남편이 저번에 말했었다. "내가 죽으면 잡을 건가? 그때 잡을 걸 후회하면서 말이야." 그렇게 해야 될 것 같다. 벌레를 잡아 죽이는 경험이 없어서 글을 못 쓴다해도 남편에게 떠맡기고 있다가 후회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