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만 반겨주었다
50여 년 만에 고향엘 갔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고향에.
요즘 매일 ‘나는 누구인가 ‘를 주제로 나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가제는 ‘푸른 방에서 나온 그녀, 나의 이야기‘ 가부제는 ’그 방을 딛고 ‘이다.
어느 날 아침 고향 생각이 났다. 고향에 다녀오면 지나간 일들이 더 잘 기억날 것 같았다. 딸과 같이 다녀온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새롭게 기억나는 것은 없다.
중학교 때까지 고향 시골에서 살았다. 밤이면 호롱불이 어둠을 밝히는 초가집에서. 안채와 아래채 사이에 장독대가 있었고 마당 양 옆에는 텃밭과 꽃밭과 우물이 있었다. 나중에 아버지와 엄마가 텃밭 한쪽에 흙벽돌을 찍어 양계장을 지었다.
우리 동네는 삼면이 산이고 입구에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있다.. 뒤편 산 아래엔 저수지와 논밭이 있었다. 저수지 바로 아래 오른편에 우리 복숭아밭이 있었다.
저수지와 산과 들판과 복숭아밭은 철 따라 다른 신비한 노래를 불러주었다. 아침이면 싱그러운 바람으로 낮에는 뜨거운 햇빛으로 저녁에는 어둠과 별빛과 달빛으로, 들판 한편에 먹지 않는 샘물이 있었다. 난 이 샘이 좀 무서웠다.
국민학교에 입학한 후 6년, 중학교 입학 한 후 3년을 걸어 다닌 그 길을 걸어서 가보았다. 동네 입구를 못 알아보고 지나쳐 갔다. 논이 있던 자리에 주유소가 생겨서가 아니다.
좁은 도랑 가를 따라 버드나무 고목들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그 버드나무들이 보이지 않아서다. 군도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커다란 버드나무가 한 그루만 서 있어서다.
뒤돌아 와서, 마을 어귀에 들어섰다. 버드나무 앞에 아르러서 또다시 마을로 들어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옆동네 가는 길로 가고 말았다.
9년을 매일 걸어 다녔던 그 길을 몰라 본 것처럼 내 속을 내가 몰라줬다. “이것도 못 해?”라며 면박을 주거나 하찮게 대했다.
이제라도 내게 “그래서 그랬었구나 “. 해주려니 , 나를 알아야겠기에, 아는 얼굴도 없는 그곳엘 갔다.
아버지가 낚시 갈 때 따라갔던, 동네 아이들과 물놀이하던, 엄마가 빨래를 하던 저수지는 사라지고 없었다. 우리 복숭아밭도 논 사이에 있던 샘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살던 집터도 알아보지 못했다. 초가집들이 모두 사라지고 양옥집이 들어서 있었다. 길을 따라 흐르던 개울도 보이지 않았고 공동 우물도 사라지고 없었다.
한참을 헤맨 끝에 알 수 있었다. 비가 오면. 콸콸 물이 흐르던 개울을 시멘트로 덮어버렸다는 것을. 길이 넓어졌다는 것을. 그때 언덕은 그대로이겠지만 지금 내 눈엔. 낮게 보인다는 것을.
그제야 보였다. 내가 뛰놀았던 그 마당과
우리 집이 있던 자리가. 친구들이 살던 집터와 작은할아버지가 살던 집터도. 옛집을 허물고 새로 들어선 양옥들로 고향은 낯설기만 했다.
한 그루 감나무만이 담장너머로 가지를 뻗으며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품 안 그득 안고도 남아 주황색 보석을 머리에 빽빽하게 꽂은 감나무는 조선의 왕비처럼 보였다. 나는 감나무를 향해 활짝 웃어주었다.
감나무는 감나무의 길을 걸어왔는데, ‘나는? ’이란 질문이 생겼다. 다시 감나무를 바라보니 감나무는 자신이 감나무로 제대로 잘 살아왔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나도 나로 잘 살아왔는데 내가 그걸 모르는 걸까? 그래서 책을 쓰며 예전에 걸었던 길을 다시 걷고 있는 걸까?
돌아오는 길 동네 입구에 홀로 서있는 버드나무 고목을 가까이 다가가 어루만져 보았다. 버드나무가 말했다. ” 잘 살고 못 사는 게 어디 있어? 살아 있으면 좋은 거지. . 너도 다시 볼 수 있고. “
그렇다. 살아 있는 것만 해도 괜찮은 일이다. 얼마 후면 허락되지 않을 삶, 소소한 일상을 누리는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 맞다. 나는 내게 부탁했다. 이 사실을 잊지 말기를,
나는 아직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내가 대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