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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리 Sep 12. 2021

겨울잠

  12월 29일 아빠의 은퇴식 날 아침, 온 가족과 친척들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누워있는 아빠 앞에 모여 앉았다. 서로 배턴 이어받듯 돌아가며 은퇴식에 참석하러 가자고 아빠에게 조심스레 한 마디씩 건네보지만 아빠는 아무 말 없이 얼굴에 뒤집어쓰고 있는 이불만 작은 숨소리와 함께 들쑥날쑥할 뿐이었다. 은퇴식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마음이 조급해진 엄마가 참지 못하고 아빠에게 빨리 일어나라고 화를 내며 아빠를 흔들었다. 그러자 아빠는 마침내 이불을 벗고 찢어지는 목소리로 목이 갈라져라 소리를 질렀다. 


  “내가 은퇴를 왜 해!”


  결국, 그날 은퇴식에는 엄마와 나, 단둘이 아빠를 대신해 참석했다. 아빠 없는 아빠의 은퇴식이었다.


 아빠는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은 다음 해인 1993년도에 처음 베이징으로 가서 2008년 갑자기 쓰러지기까지 16년을 낮과 밤 구분 없이 일만 하셨다. 내가 사춘기 때에는 ‘저렇게 일만 하고 얼굴도 보기 힘든데 도대체 결혼은 왜 하시고 나는 왜 낳으셨을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까. 결국 아빠는 쓰러졌고 쓰러지고 나서도 언젠가 자신은 회복되어 다시 일어나 일을 할 거라며 10년을 중국에 더 머물었다. 


 하지만 아빠의 몸은 아빠의 바램처럼 따라주지 않았고 아빠의 마음은 점점 우울해져 갔다.


 재작년 우리 가족은 희망을 버리고 베이징의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와서 아빠는 말수가 더욱 적어졌고 평소 거의 아무 말 없이 중국 TV 채널을 보고 중국 라디오를 듣고 중국 책을 읽는다. 그러다 아주 가끔 기분이 나아지면 언젠가 자신은 중국에 다시 돌아갈 거라 말한다. 


 큰 소리가 오고 갔던 은퇴식이 끝난 후 강제로 은퇴한 아빠와 속상한 엄마 사이에서는 냉랭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런데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중국 TV 채널을 틀어 놓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누워있던 아빠가 엄마를 불렀다. 그러고는 잠깐의 침묵 후 이불속에서 꺼져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이번 설에 사천 가고 싶어.”


 경상남도 사천은 아빠의 고향이다. 차가운 분위기를 깨고 먼저 말을 꺼내신 아빠에게 엄마는 일단 짧게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그 후 엄마와 나는 큰 걱정에 빠졌다. 아빠의 고향 집 사천은 몇 년 전 한국에 귀국하고 나서 인사를 드리러 온 가족이 함께 다녀왔었는데 차가 없는 우리는 교통비로 너무 큰돈을 지출했기 때문이다. 그때 렌터카 비용이 부담돼 아주 짧은 일정으로 돌아왔는데 중국에서 그 긴 시간 동안 살며 큰 장례식이 있을 때만 어렵게 만나던 고향집 식구들을 한국에 귀국했어도 밥 한 끼 함께 먹고 바로 돌아 나와야 할 때 아빠의 아쉬운 표정은 부족한 자식으로서 미안함으로 가슴에 항상 남아있었다.


 나는 얼마 전에 알게 된 장애인 자동차 지원 사업이 생각났다. 너무 좋은 사업이라 생각했지만, 평일은 일을 하기 때문에 주말밖에 이용할 수 없는 나는 항상 시간이 맞지 않아 한 번도 이용해 보지 못했었다. 사이트에 접속해보니 마침 설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차량, 경비, 유류 지원이라니! 평생 타국에서 외국인으로 살며 사회 혜택이라곤 한 번도 못 받아본 내게 믿기 힘든 엄청난 지원이었다. 당장 엄마에게 이러한 이벤트가 있다고 알려줬더니, 엄마는 ‘무료라 모집하고 마지막엔 돈을 받겠지’라며 내게 참 세상 물정 모른다는 눈빛을 보냈다.


 “아빠! 내가 이번 설에 사천 보내줄게!”


 엄마의 음모론에 잠시 주춤했지만 갑자기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옆에 조용히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아빠에게 큰소리를 쳤다. 아빠는 나와 엄마가 나눈 대화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이불을 벗고 얼굴을 스윽 내밀어 씩 한번 웃었다. 다듬지 못한 흰 수염 사이에 이불 먼지 잔뜩 묻은 주글주글한 얼굴이라도 아빠가 웃으니 걱정 가득한 내 마음이 펴졌고 엄마도 피식하고 웃으셨다. 


 지원서를 작성하려 컴퓨터 앞에 앉았다. 사천에 갈 수만 있다면! 선정된다면 어디도 가고 싶고, 무엇도 먹고 싶다고 적고 싶어 상상을 해보지만 참 이상하다. 난 오직 우울한 은퇴식 후 두꺼운 이불속에서만 살고 있는 아빠가 이불을 벗어던지고 활짝 웃기만 하면 그 어디도, 무엇도 상관없을 것 같다. 


  나의 간절함을 글로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밤을 지새운다. 옆에 자고 계신 아빠와 엄마를 본다. 그래도 오늘 밤, 함께 사천에 가는 꿈을 꿀 수 있음에 감사한다. 나는 다시 어둠 속에서 마음속 가득한 아빠의 웃음을 글로 써 내려간다. 우리에게 며칠뿐이라도 아빠가 이불속 겨울잠에서 깨어나 미소 짓는 따스한 봄이 찾아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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