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마르크스로부터
사유(思惟) 매거진은 저자 커피사유가 일상 속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자체 선별하여 연재하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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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평등', 그리고 '박애'.
근 ·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가장 근간을 이루고 있는 이들 이념들은 오늘날 대중들 사이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절대적이며 반드시 준수되어야 하는 가치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절대적'이라 생각되는 것들은 사실 그저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마르크스와 니체는 이런 의심을 가능하게 한다. '자유'에 대해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판가 마르크스가, '평등'과 '박애'에 대해서는 서양 철학의 반항아인 니체가 그 절대성을 흔든다.
마르크스는 '자유'란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즉 자신들이 수탈할 수 있는 노동자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이념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했다. 중세 봉건제 사회에서 농노가 해방되어 부르주아 계급들이 태동하면서 유럽 곳곳에서 일어난 코뮌과 '자유'에 대한 부르짖음은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등장한 '부르주아'들이 기존의 중세 봉건제라는 생산 양식과 모순 · 갈등을 일으키면서 발명되거나 강조된 개념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인 것이다.
니체는 '평등'과 '박애' 정신이란 위선적인 성직자적 가치 판단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거세게 비판했다. 그리스도교는 온 유럽과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고 선언한 니체는 타인에 대한 사랑과 평등에 대한 주장이란, 오래 전부터 계속 존재해온 계급 질서 속에서 피지배자 계급이 지배자 계급에 대해 가진 원한 내지 복수심으로 인한 가치 전도의 시도, 즉 노예도덕의 태동과 주류화 과정에서 태동한 이념이라고 보았다. '평등'은 약자들이 자신들을 지배하는 지배 계급들을 비난하거나 정신적으로 복수하기 위하여 만든 개념이며, ‘박애’는 그러한 복수심의 꽃봉오리로서 피어난 개념이다 ― 이것이 니체의 주장인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와 공화정의 시초로 많은 사람들은 1789년, 1830년, 1848년에 걸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을 제시한다. 그러나 과연 그 당시의 혁명의 열기 속에서 울려퍼진 ‘자유’, ‘평등’, ‘박애’라는 새로운 가치, 이것들의 원천은 무엇이었는가? 이들은 누구로부터 주장되었는가? 혁명의 실체란 무엇이었는가? 혁명에서 만인을 전율케 한 이 가치들이란 원래부터 절대적인 것이었으며 다만 발견되었을 뿐인가? 그렇지 않다. 마르크스의 견해대로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들에 의하여 주도되었으며, 혁명의 세 이념도 부르주아 그들에 의하여 강조된 것이었다. “만인은 불가침의 자유를 가진다.”, “만인은 평등하며 똑같이 존엄하다.”, “모든 사람을 박애의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라는 세 가지 명제는 발견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발명된 것이었다. 이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절대적으로 여겨지는 가치들의 절대성 그 자체에 대한 의심, 이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적인 사람들의 공유된 믿음을 흔든다. 혹자는 나에게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일갈할 것이며, 따라서 더 깊은 생각과 탐구를 중단하라고 강력히 요구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야말로 가장 위험한 것이다. 그들은 체제의 존속을 진실보다도 더 중시하면서 참된 사실을 추구하려는 나의 시도를 좌절시키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실로부터 눈을 돌리는 그들의 행위야말로 가장 비겁한 것이며 가장 위선적인 것이고, 가장 비난받아야 할 행위로서 발전의 걸림돌이다.
나는 올바르게 세상을 보고 싶다. 그러므로 나는 질문의 위험성과는 무관하게 이 위험한 질문을, 절대적이라고 여겨지는 가치들에 대한 의심을 던지는 것이다. 니체와 마르크스가 그러했듯, 나 또한 ‘반-체제적’이라 불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유’, ‘평등’, ‘박애’. 우리가 그토록 절대적이라고 간주하던 이들 가치들은 과연 절대적인가? 이 질문이야말로 살아있는 정신만이, 그리고 올바르게 세상을 보려고 하는 정신만이 던질 수 있는 질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