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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사유 Dec 17. 2022

"표현의 자유"

'자유'의 맹점과 소셜 미디어에 대하여

 생각을 움직여 다른 꿈을 꾸다, 동상이몽(動想異夢) 매거진은 저자 커피사유가 바라본 세상에 대한 시각을 담는 공간입니다.

 더 많은 생각들을 만나보고 싶으시다면, 저자의 블로그를 방문해주세요.




 Twitter is blocking users from tweeting links to many major servers for Mastodon, one of the most notable Twitter alternatives. The ban was enacted sometime during what’s been a chaotic Thursday evening on the platform after journalists and Mastodon’s own account were unexpectedly suspended.

… (중략) …

 The ban on Mastodon follows the recent controversy around @ElonJet, an account that tracks the whereabouts of Twitter CEO Elon Musk’s private jet. On Wednesday, Twitter suspended the @ElonJet Twitter account and soon after suspended the personal account of the person who manages it. Twitter also introduced a new policy that bans people from sharing live locations of another person.

… (후략)

“Twitter is blocking links to Mastodon” – The Verge




 벤저민 프랭클린은 틀렸다.


 그는 약간의 ‘안전’을 얻기 위해 약간의 ‘자유’를 포기하는 사회는 둘 다 가질 자격이 없으며 결국 둘 다 잃게 될 것이라고 일갈한 바 있다.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였던 그의 ‘자유’에 대한 부르짖음. 이는 오늘날의 미국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사상으로 이어져서 ‘민주주의’라는 자존심을 지탱하는 하나의 견고한 기둥이 되었다고 흔히 일컬어진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소셜 미디어〉라는 변화된 환경 속에서 그의 외침은 오히려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소셜 미디어.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 서비스들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는 구호 하에 수많은 사람들을 인터넷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바쁜 일상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자신이 평소 만나지 않던 다른 이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의 창을 열어주는 것이라 대대적으로 홍보한 이들은 처음에는 짧은 글들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서 출발했지만, 이윽고 사진과 그림, 음악과 영상 등등 좀 더 시각적이고 직접적인 매체들을 인터넷상에 누구나 자유로이 올리고 논의할 수 있도록 했다. “더 많은 사람들과의 소통, 더 많은 이들에 대한 이해!”라는 모토 하에서,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야 말로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진보시킬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추천 알고리즘’의 맹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서비스 이용자들이 자주 확인하는 콘텐츠의 유형을 기반으로 ‘사용자 맞춤형’이라는 편의를 제공한다고 믿었던 그들은, 인간의 ‘확신 편향’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기존에 접하던 것,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조금씩 더 ‘클릭’하기 시작했고, 알고리즘은 ‘클릭’이 일어난 익숙한 것들을 다시 사람들에게 더 많이 보여주는 치명적인 순환이 반복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평소 만나지 않던 다른 이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의 창을 열어주는’ 기대 속에서 출발했던 소셜 미디어는, 오늘날 사람들을 몰이해와 편향 속에 가두어버린 것이다.




 사회학자들과 시민 운동가들 중 이 맹점을 명백히 파악했던 이들은 일찍이 소셜 미디어의 위험성을 강력하게 경고해왔다. 이들은 ‘혐오 콘텐츠’를 차단하고 더 이상 확산하지 못하도록 할 것을, 소셜 미디어 안에서 민주주의의 생태계가 건강히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자정 시스템을 구축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들의 제안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문제는 소셜 미디어의 ‘추천 알고리즘’ 그 자체에 있었던 탓이다. 알고리즘을 공개하지 않는 기업의 이면에, 우리는 이제 자본이라는 더러운 딱지가 붙어 있다는 것을 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는 구호 저편에는 ‘클릭’과 ‘추천’으로 그 몸집을 불려 가는 자본이 자리함을 이제 거의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선구자’가 어떻게 타락했는지, 그 실상을 이제 만인이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 뒤에 숨어있던 자본의 거짓말은 최근에는 트위터를 통해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듯하다. 트위터를 인수한 어떤 이의 행위가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자유’라는 구호 아래에서 그는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사회 갈등을 부추겼던 수많은 혐오와 차별들을 다시 부활시키려 하고 있다. ‘자유’라는 구호 아래에서 그는 자신의 이익에 반대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차단하고 자신의 이익에 합치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부각시킨다. ‘자유’라는 구호 아래에서. 바로 그렇다. 자유! 자유! … 그가 이해하는 바로 그 ‘자유’라는 구호 아래에서!




 그렇기에 벤저민 프랭클린, 그는 ‘자유’의 맹점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자유라는 구호가 통제라는 전체주의적 발상에 대한 훌륭한 저항권을 구성할 것이라 생각한 그는, 역으로 구호로써의 ‘자유’가 통제의 화신(化身)으로서 나타나는 상황을 상정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권력과 압제로부터의 저항’이라는 상황 하에서 자유를 부르짖은 것이기에 ‘권력과 압제가 자유를 부르짖는 경우’라는 모순적 상황을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유’라는 표상이 원래의 표의와 다른 것을 지시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 치명적인 실수, 그리고 그 치명적인 실수를 이해하지 못한 이들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가 바로 그 자신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하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자본이 이끄는 소셜 미디어에게 사망을 선고할 수밖에 없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 준다는 그들의 거짓말 뒤에는 무한히 자기 증식하는 자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셜 미디어에게 희망이 있기 위해서는 오직 자본이 결부되지 않는 방법뿐이다. 나는 자본이 아직까지는 결부되지 않고 있는 소셜 미디어를 하나 알고 있긴 하다. 그러니 아직 희망은 하나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러나 자본은 그 특성상 무한을 탐하고 뻗어나가지 않는 구석이 없으므로, 여전히 위험은 곳곳에 널려 있다.


 그러나 작은 희망이라도 인간은 놓치기 어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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