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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May 15. 2023

제법 P처럼 살고 있어요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행복


생각해보면 난 어려서부터 스케줄러를 쓰고, 계획을 세우고,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를 쓰는 것을 참 좋아했다. 누구나 그렇게 하는 줄 알았고 정리되지 않은 계획들은 마음 불편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내 인생 첫 자유여행을 떠나게 됐을 때에는 해외 지하철 노선도는 물론, 모든 일정과 티켓들을 두 달 전부터 정리해서 PDF 파일을 핸드폰 속에 넣어갔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여행을 함께 했던 내 친구는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의 PDF 충격을 언급하며 놀랐던 기억을 회상하곤 한다. 


MBTI가 유행을 타기 시작하면서 알게된 P와 J의 차이는 생각보다 극명하고, 친구들의 성향도 알게 되면서 나는 파워 J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여행을 함께 떠난 친구 모두 P였다는 점에서 그들이 놀랄 수 밖에 없던 이유도 이해하게 됐다.


그러나 계획을 세우는 것은 좋지만, 계획을 이행하지 못했을 때의 오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다. 아무도 강요한 적 없고 하지 않는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이미 내 마음 속 투두리스트에 들어있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숙제를 끝내지 못한 찝찝함처럼 남아 괴롭히는 것 같았다. 사전 계획에 없던 일은 나의 하루에 추가 될 일도 없었고 심지어 친구가 불러내는 급약속도 달가운 연락은 아니었다.






그러나 요새 제법 P처럼 살고 있다. 물론 진짜 P들이 들으면 '넌 절대 P가 될 수 없어!' 를 외치지만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렇다. 마음의 여유가 생긴 탓일지, 아니면 그냥 스트레스를 줄이고자 했던 나의 무의식에 의한 변화인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요즘에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는 사람들에게서 긍정적인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변한 걸 수도 있지만 예전 같으면 쉬다가 갑자기 나가는 일, 계획 없이 만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계획을 세우지 않는 자체가 스트레스의 일부였는데 요즘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맞이하는 소소한 즐거움들을 느끼고 있다. 


갑자기 변경된 계획 덕분에 몇 십년 동안 잊고 있던 장소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낙조를 보고, 접점이 없어 평생 만날 일 없을 것 같던 사람들도 알게 되고, 좋은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도 전보다 늘어가고.. 그러면서 타이밍 좋게 뭘 했다고 말하는 순간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계획에 갇혀 살았다면 절대 경험해보지 못할 순간들을 맞이하는 기분은 또 새롭고 즐겁다. 여전히 내 앞날도, 그냥 살아가는 매일도 아무런 계획은 없다. 2월 달에 끄적인 글 속에서도 흘러가는 시간에 나를 맡기고 유영하고 있다고 했는데 지금도 달라진 것 없이 똑같은 상황이다. 어쩔 수 없는 J의 DNA가 남아있기 때문에 무계획이 계획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지만, 오히려 요즘은 일단 부딪쳤을 때 생각하자는 마인드가 좀 더 강해진 것 같다. 그러다보니 학습된 긍정이라도 열심히 긍정회로를 돌릴 수 있는 것 같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최대한 긍정적으로 말해줄 수 있는 여유도 생기는 것 같다. 


미리 사서 걱정을 해도 정해진 시간은 늘 똑같이 흘러가고 어차피 내 행동은 똑같을텐데 너무 어렵게 살진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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